EP.95 운이 좋네요?
“그러면 다시 한 번 브리핑 하겠습니다.”
5 등급 몬스터인 공허 드래곤은 이제까지 만났던 괴물들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상대였다. 지금까지 쓰러뜨리고 온 【B – 1】 난이도의 4 등급 특수 개체랑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까닭에 공허 드래곤의 특성과 주의해야 하는 패턴은 몇 번을 지적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메인 탱커는 티티, 공허 와이번을 마크하는 부 탱커는 오현아입니다. 탱커들은 서로 거리를 이격하는 것.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네.”
민국의 말에 두 탱커가 동시에 대답했다.
공허 와이번을 마크하는 임무를 현아에게 맡긴 이유는 간단했다. 커다란 방패 때문에 타냐의 움직임이 오현아보다 굼뜨기 때문이었다. 막 엄청나게 차이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레이드에서는 그 조금이 성패를 가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게다가 공허 와이번이 나타나자마자 어그로를 잡고 공허 드래곤과 거리를 벌려야 했기에 민국은 타냐보다는 오현아가 임무수행에 더 적합하다고 여겼다.
이후 민국은 와이번 공략조를 비롯해 공허 마력 폭발, 공허 브레스의 순서에 따른 영웅들의 생존기도 일일이 지시를 내렸다. 대충 이 정도 타이밍이면 알아서 자신들의 스킬을 사용하라는 공대장들의 일반적인 리딩과는 다르게 굉장히 꼼꼼하고 자세한 지시였다.
“광역 보호막과 같은 공격대 전체의 생존과 관계있는 스킬은 무조건 제가 콜 하겠습니다. 그 전까지는 절대 마음대로 사용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켄달과 지젤도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민국이 공허 드래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첫 번째 레이드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메인 탱커는 공허 드래곤의 공격 패턴에 익숙해지며, 근접 딜러는 꼬리치기를 피하며 딜링을 하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목표는 공허 드래곤의 소환까지 입니다.”
“넵! 자아! 불곰 전차 나가신다!!!”
레이드의 시작과 함께 타냐가 자신의 방패를 꺼내들었다. 그렇게 커다란 사각 방패를 쿵하고 바닥에 내리찍은 그녀가 공허 드래곤을 향해 용감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 쿠오오오오.
적의 등장을 감지한 공허 드래곤이 낮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제껏 GGW 의 영웅들이 상대했던 몬스터들이 어린이처럼 생각될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고작 등급 하나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성인만한 크기의 이빨과 발톱 그리고 아름드리나무의 기둥만큼이나 커다란 꼬리에 얻어맞는다면 그냥 아프다라는 한 단어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리도 갑니다.”
민국의 수신호와 함께 딜러와 힐러들도 움직이지 시작했다.
콰앙! 쾅!
이미 앞에서는 타냐가 공허 드래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양 팔로 방패를 단단히 지탱하면서 방어 태세에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이 상당한지 영웅 패드에 나타나는 타냐의 생명력이 크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메인 탱커 힐 지원!”
보호막을 사용하면서 뷘드셴 자매에게 명령을 내린 민국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공허 와이번이 나타날지, 또한 어느 방향으로 팀원들이 이동시킬지에 대해 미리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공략 영상을 통해 일찌감치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기는 했지만, 레이드에서는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직접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그런 민국의 눈에 무지갯빛이 어둡게 반짝이는 균열이 들어왔다. 공허 와이번이 나타나는 균열이었다.
“오현아! 2 시 확인!”
“네!”
공허 드래곤의 꼬리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현아가 민국이 가리키는 균열을 확인하고는 눈을 빛냈다. 마력을 끌어올린 그녀의 눈동자가 파란색을 띄며 투지를 불태웠다.
쾅! 콰앙!!! 쾅!
메인 탱커인 타냐는 자신의 대형 방패를 완벽하게 다루며 공허 드래곤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본인이 왜 세계 유망주 순위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영웅인지를 톡톡히 보여주는 활약이었다.
하지만 반격을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만큼 공허 드래곤의 공격은 치명적이었고, 강력했다. 러시아의 불곰 전차가 아닌 그냥 아군을 지키는 전차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메인 탱커로서의 점수는 100 점이었다.
다른 영웅들도 용맹하게 드래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하아아압!”
기합과 함께 크게 도약한 소정이 대검으로 공허 드래곤의 꼬리를 내리쳤다. 하지만 공허 드래곤은 그런 소정의 공격이 간지러운 듯 가볍게 꼬리를 흔드는 것만으로 공격을 가했던 소정을 멀리 튕겨내었다. R’s 의 2 군 딜러도 비슷한 형태로 튕겨져 나갔다.
‘생각 이상으로 차이가 크게 나는데?’
볼썽사납게 두 바퀴 가량 바닥을 구른 소정이 대검을 지팡이삼아 몸을 일으켰다.
5 등급 몬스터부터 제대로 된 레이드라는 선배 영웅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4 등급 특수 개체와 비교해 고작 한 등급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생명력과 방어력 등이 비교가 되지를 않았다. 위압감도 마찬가지였다.
4 등급 개체였으면 지금쯤 적어도 오분의 일 가량의 생명력을 빼앗았을 시간인데, 공허 드래곤은 다섯 딜러의 합공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고작해야 8 % 남짓한 피해만을 입었을 뿐이었다.
- 쿠르르르.
“브레스!”
전투 도중 공허 드래곤의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 민국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순간적으로 타냐의 얼굴에 동요한 기색이 나타났지만, 그녀는 민국의 리딩에 따라 바로 방패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하아아압!!!”
이어서 타냐의 마력이 폭발하며 그녀의 생존 스킬이 발휘되었다. 불곰 전차라 불리는 여성의 몸이 하얗게 물들며 마력으로 생겨난 커다란 방패가 그녀의 적을 단단하게 가로막았다.
타냐의 뒤에서 공허 드래곤의 얼굴을 공격하고 있던 원거리 딜러들은 바로 몸을 피했다. 그녀들은 브레스를 감당할 만한 생존 스킬도 생명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숨을 가다듬었던 공허 드래곤이 메인 탱커를 향해 브레스를 내뱉었다.
콰아아아아아!!!
“메인탱커 힐 집중!”
검은색이 섞인 보랏빛 브레스가 타냐를 불태우기 위해 날아들었다. 공허 브레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타냐를 덮치자마자 그녀의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생각 이상으로 브레스의 위력이 강력한 탓에 민국을 비롯한 뷘드셴 자매들은 홀로 공허 브레스를 받아내는 타냐를 회복시키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마나를 폭발시킨 탓에 켄달과 지젤은 뜨거운 숨을 몇 번이나 내뱉었다. 그에 반해 민국은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는 정도였다.
“후우! 빨간색도 아닌데 엄청나게 뜨거웠습니다.”
“전투 진행은?”
“탱커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버텨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야 가뿐합니다! 계속 진행하셔도 됩니다.”
누구와의 첫 만남과는 완전히 다른 타냐의 터프한 대답에 민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공허 드래곤의 강력한 공격 패턴 중 하나인 공허 브레스를 메인 탱커가 홀로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행여나 문제가 생기면 오현아의 스킬을 이용하거나 보호막을 덮는 것으로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딜이 조금 부족한데….’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공허 드래곤이 브레스를 사용하기 전에 드래곤의 생명력을 90 % 이하 까지 깎아내려 공허 마력 폭발을 봐야 했다. 하지만 브레스가 먼저 사용되었고, 이어서 공허 드래곤이 자신의 마나를 모으는 모습이 민국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메인탱커 제외. 뭉칩니다! 최유나 쪽으로!”
공허 마력 폭발을 대비해 타냐를 제외한 팀원들이 한 자리에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민국은 타냐에게 계속해서 보호막을 걸며 회복 능력을 사용했다. 브리핑 때 받은 자신의 임무를 떠올린 지젤은 광역 보호막을 켄달도 회복의 마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 공허에 타 죽어라!
드래곤의 무거운 목소리가 전장을 흔드는 것과 동시에 공허 마력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번개들이 전장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위력에 광역 보호막을 유지하는 지젤의 이빨이 위아래로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씨…, 씨발!”
“오현아! 지젤에게 희망의 방패!”
민국의 본능적인 지시와 함께 현아가 지체 없이 희망의 방패(B)를 지젤에게 걸었다. 지젤이 받는 피해량의 반이 현아에게로 전달되면서, 여유가 조금 생겼고 그 틈을 이용해 켄달이 지젤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브레스도 그렇고, 이번 공격도 생각보다 위력이 강력한데?’
아무래도 공략 영상에 나오는 영웅들의 스펙이 자신들보다 많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정도의 위력이라면 지젤의 광역 보호막 없이는 버티기가 힘들어 보였다.
‘문제는….’
공허 와이번이 나타났을 때였다. 그 상황이 되면 필연적으로 아군의 진형이 둘로 나눠지게 되는데, 힐러가 세 명밖에 없는 상황이니 만큼 한 쪽은 한 명의 힐러가 전담으로 치유를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허 마력 폭발을 감당한다? 버티기가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얼마나 회복이 빡빡한지 직접 체험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대처 방법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한심한 놈들. 때가 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부나방처럼 달려드는구나.
첫 번째 공허 드래곤 레이드는 실패로 끝이 났다. 공허 와이번도 만나지 못했다. 공허 드래곤의 생명력이 70 % 이하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브레스 타이밍이 겹치면서 메인 탱커인 타냐가 그대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운이 나빴습니다.”
민국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민국의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헝클어지고 있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이건 엄연히 딜링 부족 현상이었다. 만약 딜러들의 딜링 넘쳤다면, 이런 일이 발생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딜러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상황도 아니었다. 2 군 딜러를 제외한 네 딜러는 공허 드래곤을 상대하는 게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공허 드래곤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얼마나 빠르냐에 따라 그녀들의 평가도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지적할 부분은….’
아무래도 힐러진의 스킬 조합을 새로 짜야 할 것 같았다. 공허 드래곤의 공격이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 * *
“공허 마력, 아니 브레스 먼저 옵니다!!!”
두 번째 공략도 실패. 애매한 타이밍에 강력한 동시에 연달아 보니, 아무리 힐러들이 밥 먹던 힘까지 마력을 쏟아 부어도 도저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딜링 타이밍을 조절하겠습니다. 브레스의 피해를 완전히 회복시키고 나서, 공허 마력 폭발을 보는 방식으로 레이드를 진행하겠습니다.”
세 번째 시도부터는 아예 천천히 진행을 했다. 거북이처럼 단단하게 버티면서 공허 드래곤에게 피해를 누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 캬오오오오!!!
“공허 와이번! 오현아!! 어그로 잡아!”
“네!!!”
공허 와이번까지는 성공적으로 불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공허 와이번을 쓰러뜨리기 전에 보스 몬스터가 공허 마력 폭발을 사용하면서 와이번을 상대하러 간 특공대가 버티지 못하고 연달아 전멸한 것이다.
힐링에 자신이 있는 민국이 특공대를 맡아도 마찬가지였다. 공허 드래곤의 마력 폭발은 현재의 스펙으로는 홀로 버텨낼 수가 없었다. 적어도 광역 보호막의 방패 안에서 두 명 이상의 힐러들이 연달아 회복 능력을 발휘하면서 영웅들을 회복시켜줘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공허 드래곤이 마력 폭발을 사용하기 전에 와이번을 끝장내야 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공허 드래곤의 마력에 영향을 받은 공허 와이번이 폭주하며 달려들기 때문이었다. 그 위력은 아무리 탱커라도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곱 번 연속으로 트라이가 실패했다. 공허 와이번까지는 무난하게 불러냈지만, 그 이후의 데미지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좀 더 파밍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2 군 딜러가 조심스레 말했다. R’s 의 2 군도 공허 드래곤을 공략할 때는 이보다 훨씬 높은 【Gear Score】로 도전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번이 넘게 깨져나가고서야 가까스로 잡을 수 있던 몬스터가 공허 드래곤이었다.
그런 2 군 딜러의 말에 민국은 고개를 저었다. 힘들긴 해도 이정도면 아직까지는 공략의 사정권 내였다. 다만, 멤버를 교체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공허 와이번을 쓰러뜨리기 위해 단일 딜링에 특화된 딜러가 필요했다.
“시라누이.”
민국의 입에서 우주류를 사용하는 검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제껏 대기만 하고 있던 딜러의 첫 출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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