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 운이 좋네요?
어둠의 괴물과 영웅들의 마력이 섞이며 커다란 구 형태의 반투명한 돔이 만들어졌다. 그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 시라누이 마이는 떨리는 팔을 부여잡으며 돔 내부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5 등급 어둠의 괴물인 공허 드래곤이 뿜어내는 가공할 위력의 브레스가 계속해서 지면을 불태웠고, 공허 마력의 번개들이 동료 영웅들을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영웅이라 일컫는 그녀의 동료들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들의 마력을 뽑아내며 공허 드래곤을 상대했다.
하지만 영웅 패드에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는 전투 지표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제발, 제발, 제발.”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영웅들의 당해낼 수 없었던 공허 드래곤이 자신의 부하를 불러내었다. 그와 동시에 부 탱커와 딜러로 추정되는 영웅들이 쏜살같이 공허 와이번을 향해 달려들었다.
방패 하나가 멋들어지게 날아가며 공허 와이번을 강타했고, 어그로가 잡히자마자 딜러들이 공세를 가했다. 데미지를 입는 공허 와이번의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시라누이 마이도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저 녀석을 잡고 모두가 한 데 모여 공허 마력 폭발을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 공허에 타 죽어라!
사형 선고와도 같은 공허 드래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방에서 검은색의 번개가 전장을 강타했다. 이어서 여기저기서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생명력이 낮은 힐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고, 딜러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마력 폭발을 버텨낸 메인 탱커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도중 공허 드래곤의 발길질에 납작하게 깔리면서 레이드가 마무리 되었다. 전멸이었다.
부활석이 깨지며 다시 살아난 영웅들이 머리를 휘저었다. 죽음의 충격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리고는 시라누이 마이가 있는 쪽으로 모여 들었다.
“좀 더 파밍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임시로 합류한 2 군 딜러는 계속되는 전멸 이유를 영웅들의 【Gear Score】에서 찾았다. 아직 5 등급 몬스터를 공략하기에는 팀원들의 스펙이 부족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실제로 공허 와이번을 처리하고 합류하기까지 약간의 딜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 패턴만 넘어갈 수 있다면 그 다음을 볼 수 있는데, 이제까지 한 번도 그 이후를 넘어간 적이 없었다.
“…….”
시라누이도 말을 꺼냈던 영웅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섰더라면? 공허 드래곤이 마력 폭발을 사용하기 전에 공허 와이번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몰랐다.
그녀는 데미지 딜러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데미지 딜링 능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그 때였다.
“시라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민국의 목소리에 시라누이가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본인보다 십 센티는 더 큰 남성 영웅이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묘한 기대감이 시라누이의 마음에 뭉클 피어올랐다.
“백정홍과 교대합니다.”
“공대장님?”
갑작스러운 대기 명령에 2 군 딜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일 딜링 능력만큼은 일본 제일이라 들었습니다.”
민국이 시라누이 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는 영웅 패드를 톡톡 두드리는 행동에 2 군 딜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그녀는 근거리 딜러라는 거리의 약점이 있다 해도 다섯 명의 딜러 중 데미지 딜링 능력이 가장 떨어졌다. 심지어 최유나보다도 낮았다. 하물며 그녀 또한 GGW 에는 임시로 합류한 팀원. 대기 딜러인 시라누이 마이와 비교해 팀 내 위상이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일단 레이드에 투입 시킬 생각입니다만…. 마력이 폭주할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까? 이건 솔직하게 말해주셔야 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에 마이가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꺼내들며 빙글빙글 휘둘렀다.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어제 눈 앞의 남자 영웅과 관계도 맺었던 까닭인지 오염된 성욕도 지금은 별달리 문제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이제껏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뒤에서 구경만 하던 까닭에 힘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임무는 공허 드래곤의 딜링 그리고 와이번의 전담 딜입니다. 첫 공허 브레스가 오기 전 공허 폭발을 먼저 보는 것이 첫 번째 목표. 두 번째는 공허 와이번이 나타났을 때 공허 마력 폭발이 오기 전까지 쓰러뜨리는 것입니다. 아시겠죠?”
“네!”
민국의 지시에 시라누이는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대기를 하는 동안 GGW 공격대가 어떤 방식으로 공허 드래곤을 공략하는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브리핑 설명에도 빠지지 않고 집중했었다. 그렇기에 지금 레이드에서 어떤 게 부족하고, 문제점으로 작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공격대장인 민국이 2 군 딜러를 제외하고 자신을 포함시키는 이유도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최선을 다해 우주류의 검술을 보여주겠어!’
5 등급 몬스터를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에 시라누이 마이가 전의를 불태웠다.
* * *
브리핑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들 공허 드래곤의 공략에 필요한 전술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황. 문제는 그대로 행동하면서 적의 공격을 어떻게 버텨내느냐는 점이었다.
“회복 패턴은 그대로 갑니다. 지젤은 광역 보호막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켄달은 저와 함께 아군의 생명력에 힘을 씁니다. 그리고 현아는 알지?”
“위험할 것 같은 대상에게 희망의 방패 스킬 써주기.”
“딩동댕. 문제는 공허 와이번이 나타날 때입니다.”
그 패턴을 넘기지 못하고 전멸을 한 게 벌써 네 번째였다.
“공허 와이번이 나타나면 현아 너는 바로 어그로를 잡아. 그리고 모든 딜러는 공허 드래곤의 공격을 중지하고 와이번의 처리에 집중합니다. 아, 김소정 딜러는 예외입니다. 공허 드래곤을 공격하세요.”
커다란 대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소정은 다른 딜러들에 비해 움직임이 굼뜬 편이었다. 두 번 정도 그녀를 와이번 처리 조에 넣어봤지만, 매번 제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마력 폭발에 목숨을 잃었다.
“스킬 하나를 이동 계열로 바꿔서 착용할까요?”
본인 나름대로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소정이 민국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그 제안에 민국은 고개를 저었다.
원거리 딜러와는 다르게 근접 딜러의 딜링은 연계 공격에서 나오는 경우 많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선택은 오히려 그녀 본인의 장점을 죽이는 일이 될 터였다. 애당초 패턴 자체가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공허 와이번의 처리만 하면 되는 패턴이었다.
‘그에 반해….’
시라누이 마이는 가벼운 장검을 무기로 사용했다. 게다가 본인 고유의 능력에도 이동 속도와 관련이 된 게 있었다.
바람의 걸음이라는 스킬이었는데 무기를 수납하는 동안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며, 그 동안 이동한 걸음걸이만큼 무기에 깃드는 마력의 위력이 % 로 상승하는 능력이었다. 마이가 지닌 클래스 고유의 스킬이었다.
“그러면 바로 공략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브리핑을 끝낸 민국이 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신호와 함께 다시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콰아앙!
전투가 시작되면서 공허 드래곤의 거대한 발이 타냐를 짓눌렀다. 커다란 방패가 들썩이며 드래곤의 시선을 끄는 사이, 양 옆으로 펼쳐진 딜러들이 자신의 마력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아앗!!!”
신나연의 마력구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기관총처럼 마력 화살을 쏘아대었다. 시작부터 자신의 마력을 불태우는 강렬한 공격이었다.
김소정과 정예린, 최유나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브레스가 오기 전, 마력 폭발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힐러들이 그 이후를 생각하며 버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라누이 마이도 자신의 검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의 검에는 우주를 담을 수 있다.”
우주류의 뜻을 되새기며 호흡을 가다듬은 마이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자신의 적을 바라보았다.
공허로 물든 거대한 드래곤. 어둠의 괴물 중에서도 본격적인 개체라고 부를 수 있는 5 등급의 몬스터가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공허 드래곤과 거리를 좁힌 그녀의 검 끝에서 눈부신 빛살이 갈라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마력으로 붉게 물든 장검이 공허 드래곤의 피부를 연이어 꿰뚫었다. 쾌검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화려한 효과에 비해 시라누이 마이의 초반 데미지 딜링 능력은 굉장히 낮은 수준이었다.
영웅 패드에 나타나는 다섯 명의 딜러 중 네 번째. 이것만 보면 민국이 2군 딜러인 백정홍 대신 시라누이 마이를 투입시킨 게 실패라 생각할 수 있었다. 적어도 백정홍은 초반 데미지 딜링 에서는 다섯 명 중 중간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웅 패드(Hero Pad)에 나타나는 시라누이 마이의 DPS 가 폭주하듯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 어어?”
“급소라도 찾은 거야?”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갑작스레 높아지는 시라누이의 데미지 딜링에 다른 딜러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매섭게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허 드래곤만이 박혀 있었다. 일본 최고의 유망주라고 하더니만 그 명성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굉장한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놀란 것은 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스킬 스톤(A) - 우주류 검술의 춤.
단일 대상의 단일 부위를 2초 안에 연속적으로 공격할 경우 마력 데미지가 가격 횟수에 따라 데미지가 최대 250 % 까지 높아집니다. 단, 착용한 모든 아이템의 방어력이 30% 하락합니다.》
패시브 계통의 스킬로 시라누이 마이의 강력한 데미지 딜링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빠르게 패시브를 채워서 최대 데미지로 공격을 발휘할지는 몰랐다. 그만큼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신속 그 자체였다. 그리고 생명력이 줄어든 공허 드래곤이 본인의 특수한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 공허에 타 죽어라!!!
“됐어!!!”
민국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라누이 마이의 높은 데미지 딜링 능력을 보고 어느 정도 기대를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브레스 보다 공허 마력 폭발 패턴이 먼저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빠른 시간 내에 공허 드래곤을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공허 와이번의 처리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마력 폭발이다?! 빨리 모여요!”
처음으로 브레스보다 마력 폭발 패턴을 먼저 사용하게 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드러내는 딜러들을 향해 지젤이 버럭 외쳤다. 그리고는 광역 보호막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들의 시간이었다.
파직! 파직! 파지지지직!!!
검은색의 번개가 전장을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로는 지젤의 보호막이 그 다음은 민국과 켄달이 자신들의 마력을 폭발시키며 영웅들을 회복시켰다. 그렇게 이중으로 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빈사 상태에 빠지는 영웅도 있었다.
“오현아! 시라누이에게 희망의 방패!”
“네!”
아군의 생명력을 체크하며 민국도 바삐 지시를 내리며 수인을 맺었다. 그리고는 부상을 당한 영웅들을 향해 회복 능력을 사용했다. 대부분 민국의 회복 능력은 시라누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방어력을 내주고 공격력을 얻은 광전사처럼 패시브 스킬에 영향을 받는 시라누이의 방어력은 동급 【Gear Score】 의 아이템을 장비한 영웅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지금과 같은 강력한 공격에는 그 조금도 굉장히 아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도 공허 드래곤에게 데미지를 넣을 수 있는 딜러의 힘이 중요했다. 슬슬 공략의 각이 보이고 있었다.
“이어서 브레스 옵니다! 티티 준비!”
“예썰! 언제든지 막아낼 수 있습니다!”
마력 폭발 패턴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냐가 밖으로 튀어나갔다. 행여나 공허 드래곤이 아군의 본진을 향해 브레스를 사용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공허 드래곤이 숨을 들이키는 잠시의 시간 동안 민국을 포함한 세 명의 힐러들은 쉴 새 없이 부상을 당한 아군들을 회복 시켰다. 그러면서도 홀로 브레스를 감당해내야 하는 메인 탱커에게 보호막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
“메인 탱커한테 힐 집중!!!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마력 폭발과 브레스가 동시에 오는 초반만 버틸 수 있으면 그 이후로는 딜을 조절해가며 공허 드래곤의 공격을 번갈아 유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브레스까지 성공적으로 버텨내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의 레이드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조금씩 공략의 각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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