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0 운이 좋네요?
터엉! 텅!
조명탄이 밝혀지면서 포화가 시작되었다. 인류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화약 무기들이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간간히 마력이 섞인 공격들도 보였다.
그러나 생존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진격해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에 화약 무기가 통하지 않는 녀석들도 많았다. 그런 놈들은 영웅들이 나서서 상대를 해야 했지만, 몬스터의 규모에 비해 영웅들의 숫자는 굉장히 초라했다.
몇 겹으로 둘러진 콘크리트 벽에 몸을 기댄 병사들이 고성을 지르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벽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니까…. 저곳이 지금 하노이라는 건가요?”
영웅 협회에서 보내온 영상을 확인하던 시연이 얼굴을 굳혔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천 년이나 된 유서 깊은 도시가 몬스터의 공격으로 인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하노이에는 현재 250 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금일 오후 2 시경. 그러니까 약 다섯 시간 전쯤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던전이 폭발한 겁니까? 아니면 어둠 괴물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겁니까?”
저 정도의 대규모 공격은 분명 던전 브레이크라 불리는 던전 폭발이 일어났을 때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시연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전자이기를 바랬다.
야속한 생각이지만 만약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것이라면 베트남과 하노이의 문제로 한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전쟁이 시작되면 국토 곳곳에 어둠의 폐허가 깔려 있는 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던전 폭발입니다. 하노이 북쪽 87 Km 가량 떨어져 있던 【A – 1】 던전이 폭발하면서 그 근방이 어둠의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현재 던전 폭발로 생겨난 대규모의 괴물들이 남하하고 있는 상황이며 근방에 있던 도시 하나가 괴물들에게 삼켜졌습니다.”
비서의 말에 시연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이 삼켜졌다는 표현이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괴물들의 1 차 공세는 끝났다고 합니다. 다행히 하노이의 성벽도 무사하고요. 베트남의 도움 요청을 받은 중국군이 빠르게 개입하면서 하노이를 공격하는 어둠 괴물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어둠 폐허가 된 장소에서 던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확산 현상이군요.”
시연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둠의 폐허가 된 장소에서 던전들이 다수 생겨나는 현상. 어떤 전문가는 이를 가리켜 어둠 괴물들의 군사기지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고 표현을 한 바 있었다.
그리고 확산 현상은 대한민국도 경험한 바가 있는 현상이었다. 오십 년 전 구미에서 던전이 터지면서 그 여파로 인해 충북과 충남 그리고 대구가 쑥대밭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A – 6】 의 던전이 폭발한 사고였지만, 그 때 확산된 던전을 처리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영웅들이 한국으로 몰려들었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 도를 아우르는 넓은 범위에서 확산 현상으로 생겨난 던전의 숫자가 사백 곳이 넘었다.
“던전을 처리할 공격대가 다수 필요하겠군요. 그것도 경험 많은 이들로 말이에요.”
던전 브레이크에 의해 생겨나는 던전들은 일반 던전들보다 던전 타이머가 짧았다. 그만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끔직한 재앙이 연달아 몰아닥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 점도 있었으니 일반 던전들과는 달리 한 번만 클리어해도 던전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영웅 협회에서는 확산 현상으로 생겨난 던전을 가리켜 인스턴트 던전 혹은 임시 던전이라고 불렀다.
시연의 말에 비서가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확인하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세계 영웅 협회에서는 이번 사태의 빠른 해결을 위해 메모리아 1 군을 포함해 한국에서 다섯 개 정도의 공격대가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섯 개라….”
시연은 짧게 신음하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군대의 지원이 있겠지만,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장소에서 펼쳐지는 작전행위였다. 과연 영웅들이 그곳을 가려고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영웅 협회의 제안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10위 내 클랜들의 단장을 소집하세요.”
분명 누군가는 가야겠지만, 다들 해외 원정은 꺼려할 터. 아무래도 피곤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 * *
【B – 1】 난이도의 던전인 공허의 탑.
“시라누이 마이.”
“네!”
마지막 보스 몬스터이자 5 등급 몬스터인 공허 드래곤을 앞두고 민국은 예비 딜러인 시라누이를 차출했다.
그녀는 보유한 스킬의 특성 상 다른 몬스터들과의 전투, 특히 부하들을 다수 소환하는 녀석들에게는 평범한 수준에 불과한 영웅이었지만 공허 드래곤처럼 강력한 단일 개체를 소환하는 몬스터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신체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문제없습니다.”
민국의 질문에 마이는 자신의 고개를 끄덕이며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력이 오염되면 시도 때도 없이 발정을 한다고 하는데, 자신은 상태가 조금 덜한 모양인지 아무 때나 미친 듯이 남자의 그것을 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들 공허 드래곤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잊지 않았겠죠?”
민국이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두 번째 공략인데도 불구하고 모두들 얼굴에 여유가 있었다. 특히 【블라스트 샤프 슈터】, 줄여서 블샤슈로 전직한 유나는 표정에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이래서 영웅들이 비싼 돈을 들여 클래스 스톤을 사는 거구나. 살다 살다 유나의 DPS가 나보다 위에 있는 모습을 봐야 하다니.”
“에헷! 분발하시지요. 정예린 영웅님?”
“뭐야? 운 좋게 급소를 맞출 수 있던 것 가지고!”
5 등급 몬스터를 앞에 둔 상황에서 정예린과 유나가 투닥거리며 떠들었다. 소리가 조금 크기는 했지만, 장난이라는 것을 다들 알기에 진지하게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예린의 말대로 【블라스트 샤프 슈터】의 특수 스킬인 샤프 모드는 이번에 처음으로 레이드에서 선보인 능력이었지만, 제법 괜찮은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스킬 칸 하나를 차지하고, 3 초라는 짧지 않은 준비 시간과 함께 움직일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샤프 모드에 들어간 유나의 공격은 한 번으로 세 번을 타격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부족한 데미지 딜링 능력을 크게 높여준 것이다.
“지젤의 광역 보호막 타이밍은 제가 신호하겠습니다. 그리고 딜러들은 공허 와이번의 출현을 생각하고, 딜 조절 하셔야 합니다.”
이미 한 번 쓰러뜨려 본 경험이 있는 몬스터였지만, 그래도 지목할 것은 지목해야 했다.
“그러면 전투 시작하겠습니다.”
민국의 신호에 따라 공허 드래곤 레이드의 메인 탱커인 타냐가 요란한 기합과 함께 달려들었다.
자신보다 몇 배나 큰 커다란 몬스터를 상대하는 전투였지만, 타냐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란 감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민국도 지팡이를 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집중 치료술사로 전직했기 때문일까? 저번보다 영웅들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게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게다가 유나의 화력도 급상승했으니….’
패턴을 넘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그 증거로 공허 드래곤의 생명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미 본인의 자리에서 샤프모드에 들어간 유나가 강하게 한 발 한 발 공허 드래곤의 몸통에 화살을 꽂아 넣었고, 시라누이 마이도 벼락같은 속도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젤!”
영웅 패드로 공허 드래곤의 생명력을 확인하던 민국이 지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지젤이 광역 보호막을 캐스팅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허 드래곤의 멘트와 함께 사방에서 검은색의 벼락이 내리쳐졌다.
“생각보다 버틸 만하네.”
공허 드래곤의 마력 폭발은 여전히 강력했다. 하지만 전처럼 온 힘을 쏟지 않아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같은 대상에게 같은 회복 스킬을 사용하면 회복력이 크게 높아지는 클래스의 특성에 따라 시전이 간단한 도트 힐만 연속으로 두 번 걸어도 충분히 팀원 한 명의 생명력을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민국은 세인트로 던전을 공략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웅들을 치료하는 게 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두 시 와이번입니다.”
공허 드래곤의 가장 강력한 공격이라 할 수 있는 브레스와 마력 폭발을 견뎌낼 수 있으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그나마 까다로운 패턴이라 할 수 있는 공허 와이번도 딜러들의 연속 공격에 빠르게 죽어나갔다. 전과는 달리 설렁설렁 뛰면서 귀환을 해도 늦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5 등급 몬스터를 상대하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와! 공대장님과 유나가 클래스 업 했다고 이렇게 레이드가 편해지나?”
“전부 공대장님 덕분이야. 저번 보다 팀원들의 생명력 유지가 한 결 편해졌어.”
현아의 말에 지젤이 답했다.
레이드 인원에서 힐러의 숫자는 셋.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힐러진은 세 명으로 고정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힐러들은 동료들의 실력과 능력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을 하곤 했다.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동료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팀원들의 서포트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민국은 뛰어난 공대장이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대단한 실력을 지닌 힐러였다.
삐익!
▶ “공허의 탑”의 토벌을 완료했습니다.
▶ 영웅 패드에 업적 포인트가 4 주어집니다.
▶ 영웅 도감의 횟수가 갱신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오르지 못 할 나무처럼 보였던 공허 드래곤은 너무나도 쉽게 쓰러져 버렸다. 고작 두 번째 공략에 불과했지만, 레이드에 잔뼈가 굵은 민국에게 공략에 성공한 몬스터는 변수가 있지 않는 한 두려울 게 없었다.
큰 위기 없이 너무나도 쉽게 레이드를 성공시킨 까닭일까? 다들 전처럼 열광적으로 반응을 하는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밖에서 레이드를 지켜보고 있던 2 군 딜러가 가장 크게 환호했을 정도로 다들 침착했다.
그렇게 공허 드래곤의 사체가 사라지면서 황금색의 전리품 상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이번에도 클래스 스톤이 나오면 좋겠어요.”
켄달이 전리품 상자를 보며 말했다. 이번 레이드에서 두 번째로 듣는 목소리였다. 동생인 지젤과는 정말 정반대의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켄달의 말에 민국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전리품 상자 열어볼 사람?”
“이럴 때 나설 사람은 역시 이 천호동 럭키 걸이지.”
다들 쭈뼛거리는 사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현아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마치 전리품 상자를 열기 위해 레이드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가끔 오현아가 크게 한 방씩 해주기는 했는데….”
민국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성큼성큼 전리품 상자로 걸어가는 현아의 뒷모습을 보며 예린이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화염 다리 – 이프리트’ 레이드에서 마력의 결정을 동시에 두 개나 뽑아낸 것을 비롯해 현아는 종종 대박 아이템을 뽑아낸 전적이 있었다.
“그래도 설마 클래스 스톤이 나올까요?”
“확률이 아예 없지는 않지?”
유나의 말에 예린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하지만 질문을 던진 유나도 대답을 한 예린도 크게 기대를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만큼 클래스 스톤의 드랍 확률은 낮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 어어?!”
전리품 상자를 연 현아가 내용물을 확인하던 도중 탄성과 함께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눈에 영롱하게 빛나는 클래스 스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클래스 스톤(A) - 집중 치료술사】.
“이것도 뿌우의 영향은 아니겠지? 아니면 쟤가 진짜로 럭키 걸인건가?”
손에 들린 클래스 스톤을 보며 민국은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클래스 스톤의 드랍 확률은 굉장히 낮다는데….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었다.
대박도 이런 대박이 따로 없었다. 【클래스 스톤(A) - 집중 치료술사】 가격은 약 1900만 달러. 부활석 백 개를 구매할 수 있는 돈을 한 번의 레이드로 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클래스 스톤을 뽑아낸 현아는 축하를 보내는 팀원들에게 자신의 축복받은 손을 자랑하면서 곧바로 자신의 언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 기쁨을 클랜의 단장인 언니와 함께 나누려는 생각이었다.
“뭐지? 전화를 안 받네.”
계속해서 부재중 메시지는 뜨는 전화를 보며 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바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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