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2 각자의 사정
회의는 마라톤 마냥 길어졌다. 당연히 자리에 모인 단장들은 자신들의 클랜이 베트남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수십 년이나 지루할 정도로 길게 지속되고 있는 어둠 괴물과의 전쟁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최근 십여 년 간 네임드라 불리는 괴물들의 활동이 없었던 것도 한 몫 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모를까, 타국 그것도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베트남으로 떠나야 하는 위험한 원정길이었다.
“저희 클랜은 다음 달에 부산 원정이 있습니다.”
“우리 영웅시대가 경기도 남부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 다 아시잖습니까? 그곳에 있는 【A】 난이도의 던전만 해도 몇 개입니까? 1 군 애들이 사흘에 한 번씩 레이드를 성공시켜도 쉴 시간이 없을 정도예요!”
세계 영웅 협회의 요청이 있다 해도 다들 가기 싫은 상황. 모두들 온 몸으로 대놓고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원정길에 나서봤자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인류를 수호한다는 명예.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클랜이 손해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감당해주지 않았다.
“다른 놈들도 아니고, 어둠 괴물과 싸우는 일 아닙니까? 실력 있는 클랜이 나서야죠. 랭커 클랜의 존재 의의가 뭡니까?”
“아니, 그러면 저희 클랜이 다른 놈들과 싸웁니까? 국내에 있는 어둠 괴물과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면 베트남에서 【B】 난이도의 던전을 처리할 공격대도 모집한다는데 그 쪽 공격대가 거기에 지원하면 되겠네요? 그러면 우리 클랜에서도 공격대를 내보내는 것에 고민해 보겠습니다.”
“뭐요?”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열혈 단장 몇이 불편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그들 또한 자신들의 공격대를 베트남으로 보내겠다고 말을 하지는 못했다. 행여나 베트남에서 사고라도 터지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
다른 단장들과 마찬가지로 현정도 R’s 의 공격대를 베트남으로 떠나보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가뜩이나 전력이 떨어지는 장미 방패단의 입장으로는 지금의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회의 처음 화제가 되었던 GGW 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들어가고 없었다. 아직 신입에 불과한 GGW를 원정길로 보낸다면 언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로 GGW를 원정길로 내보낸다면 랭커 클랜에서도 1 군의 전력을 베트남으로 보내야 면목이 섰기에, 먼저 말을 꺼냈던 강한 여자들도 또한 그에 동조했던 다른 클랜의 단장들도 알아서 자중하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모습이었다.
결국 서로의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며, 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덕분에 협회장인 이시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내일 오후 2 시까지 메모리아를 제외한 열아홉 개 클랜은 어떻게든 협상을 하던 상의를 하던 어느 클랜이 베트남으로 공격대를 보낼지 결정한 후 저한테 통보하도록 하세요. 만약! 그 전까지 연락이 없을 경우 협회장의 직권으로 네 개 아니 여덟 팀의 공격대를 베트남으로 보내버리겠습니다. 인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도 있겠다, 세계 영웅 협회에서 아주 좋아하겠네요!”
잔뜩 화가 난 시연이 날카로운 눈으로 각 클랜들의 단장들을 노려본 뒤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협회장 직을 맡은 지 몇 년 되지는 않았지만, 이시연은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 여장부였다. 정말로 내일 두 시까지 베트남으로 떠날 공격대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그녀가 장담한 대로 여덟 개의 팀이 강제로 차출될 게 틀림없었다.
“흐. 오늘 밤은 제대로 잠도 못 자겠군.”
“다들 휴대폰 전원 꺼지지 않게 확인합시다.”
“메신저가 있는데, 굳이 휴대폰으로 통화할 필요가 있습니까?”
“둘 다 해야죠, 둘 다. 통화 따로, 채팅 따로.”
그녀가 떠난 회의실에서 각 클랜의 단장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정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어째 오늘 밤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몇몇 단장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대화를 하는 것을 보니 벌써부터 물밑 작업과 협상이 진행되는 모습이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원정 공격대를 보내는 겁니까?”
회의실에서 나온 현정의 옆으로 비서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이미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터진 상황이었다. 뉴스에서도 베트남에서 일어난 일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을 정도였다.
“응. 메모리아의 1 군을 포함해서 최소 다섯 팀.”
“네 팀이 더 출발해야겠군요. 그렇다면 원정팀은 랭커 클랜에서…?”
“확실한 건 알 수 없어. 다들 가기 싫어하는 눈치니까. 일단 【A】 난이도의 공략이 가능한 1 군 팀과, 【B】 난이도 공략이 가능한 공격대가 두 팀. 이렇게 정해질 예정이야.”
“우리 클랜의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비서가 말했다. R’s 클랜의 1 군 팀은 【A – 4】 난이도의 던전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실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A – 1】 난이도의 던전이 폭발한 상황에서 장미 방패단의 1 군이 원정팀에 참여하면 오히려 안 좋은 소리만 들을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A】 난이도의 공략이 가능한 1 군은 메모리아와 비슷한 수준의 클랜들이 나서야 한다는 게 비서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도의 기색이 담긴 비서의 말에 현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A】 난이도의 공략이 가능한 팀은 어차피 랭커 클랜에서 정해질 거야. 타국의 일이라지만 세계 영웅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온 요청인데, 밉보였다가는 큰 일 아니겠어? 문제는 【B】 팀이야.”
“그렇군요. 【B】 난이도 던전이라면 R’s 의 1 군도 손쉽게 공략할 수 있으니까요.”
“1 군이 아니야. 정신 나간 년들이 GGW를 이름에 올리고 있어.”
조금 언급이 되다가 그냥 흘러간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현정은 1 년차 신입 공격대에 불과한 GGW 가 단장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협회장인 이시연의 강한 경고가 단장들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현정이 클랜 하우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A】 난이도의 공략에 참여할 원정 공격대가 정해졌다. 메모리아를 포함해 ‘강한 여자들’과 ‘이화’ 클랜이었다.
랭킹 2위인 ‘강한 여자들’ 클랜이 메모리아와 함께 원정길을 떠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럴만한 실력이 충분히 있는 공격대였다. 하지만 이화 클랜이 나서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이화 클랜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로 영웅시대, 화이트 플라워, 엔젤 윙스와 같은 랭커 클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화 클랜은 자발적으로 원정길에 나서겠다고 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어쨌든 ‘강한 여자들’ 클랜이 원정팀에 속했다는 것은 R’s 클랜의 단장인 현정에게는 피하고 싶었던 결과였다. 어차피 원정길에 나서야 되는 상황, 강한 여자들 클랜의 단장이 다시 GGW 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강한 여자들 대신 영웅시대 클랜을 원정팀으로 밀려고 했는데….’
하지만 영웅시대 클랜이 경기도 남부 지역의 던전을 관리하고 있다는 게 다른 클랜들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었다. 회의실에서 드러냈던 엄살이 거짓이 아닌 게 영웅시대가 관리하는 【A】 난이도의 던전은 그 수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자기네들이 가는 게 아니라고 너무 쉽게 생각한단 말이야. 이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이란….”
거기에 R’s 의 모 기업인 로즈 그룹도 은근히 이번 원정길에 R’s 클랜이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로즈 그룹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데다가 하노이에는 로즈 그룹의 차량 생산 공장이 있었다.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만큼 만약 하노이가 무너지게 되면 그룹 입장에서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될 예정이었다.
- 우리 R’s 가 베트남으로 원정 공격대를 보낼 정도로 여유 있고, 실력이 넘치는 클랜이었나요? 다들 현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잖아요? 우리는 국내의 던전을 관리하는 것도 벅찬 실정이에요. 지금도 한 자릿수 랭킹을 간신히 유지하는 형편인데, 여기서 더 추락하자고요?
그래도 구단주라고 조수영이 어느 정도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기는 했지만 흘러가는 상황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다른 클랜들의 입김이 들어간 모양인지 언론사에서도 베트남에서 터진 던전 브레이크에 대한 기사를 속보로 내보내도 R’s 클랜의 이름을 슬며시 올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R’s 클랜에서 한 팀을 보내야 하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어차피 한 팀을 보내야 된다면….”
이왕이면 1 군이 아닌 2 군을 보내고 싶었다. 【A – 5】 난이도의 던전까지는 공략이 가능한 1 군을 【B】 난이도 던전의 공략 대용으로 쓴다? 소 잡는 칼을 닭 잡는데 쓰는 격이었다.
게다가 클랜의 1 군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R’s 가 관리하는 【A】 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할 팀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었다. 실력의 격차가 크게 차이가 나는 2 군으로는 땜빵조차 할 수 없었다.
GGW 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포텐 높은 유망주들이 모여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1 년차에 불과한 공격대였다.
삐익!
그렇게 복잡하게 낀 머릿속의 안개를 정리하고 있을 무렵, 현정의 귀로 알림이 들려왔다. 다른 클랜에서 온 연락인가 싶었는데, 비서실이었다.
“무슨 일이야?”
“동생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현아가? 들어오라고 해.”
대답과 동시에 현정은 비서실과 통하는 버튼에서 손을 떼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GGW 공격대의 두 번째 ‘공허의 탑’ 공략이 있었다. 1 년차 공격대임에도 불구하고 성장세가 눈이 부시다 못해 멀 지경이었다. 빠르게 손을 놀려 보고서를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공략에 성공했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나보다 훨씬 잘 나가네.”
현정은 그런 공격대의 주축이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그렇기에 자신이 단장으로 있는 한, GGW 의 앞에 꽃길만을 깔아둘 생각이었다. 물론 장미 방패단도 함께하는 꽃길이었다.
“언니!”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현아가 들어왔다. 이어서 현정이 사랑스러운 동생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불쑥 현아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GGW 의 공격대장인 민국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서실에서 뭔가 말을 더 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현정의 시선이 재빠르게 민국에게 향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한민국 공대장님. 아차, 두 번째 공허에 탑 공략에 성공하신 것도 축하드려요. 성과가 제법 좋으시던데요?”
보고서를 통해 GGW 가 ‘공허의 탑’을 공략하면서 클래스 스톤을 획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래스 스톤(A) - 집중 치료술사】. 최근 시세가 1900 만 달러나 하는 값비싼 물품이었다. 이 정도의 가격이면 팀원 개개인에게 분배될 돈도 상당한 수준일 게 틀림없었다. 물론, 클랜도 간만에 목돈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클랜에서 한 팀이 베트남으로 원정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 공대장님?”
“전부 그렇게 알고 있던데? 올라오는 뉴스들도 뉘앙스가 그렇고.”
동생의 말에 현정이 표정을 굳혔다. R’s 에서 공격대를 보낸다는 것은 아직 확실하게 결정이 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다른 클랜들과의 조율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모 그룹이라는 것들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골치 아프네.’
민국과 현아가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정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려고 하니 마음이 어수선했다.
모 그룹에 그리고 다른 클랜들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야 했지만, 과연 어느 정도까지 양보를 받을 수 있을지 그것도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 때, 민국이 현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약 R’s 클랜이 베트남으로 원정을 가야 한다면, 저희 공격대가 가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B】 난이도의 던전만 공략하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말에 현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민국도 조금 전까지 자신이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갑자기 나타난 빌어먹을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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