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5 각자의 사정
“뒤에서 누가 보고 있었어요.”
“네?”
허리춤을 정돈하고 있던 민국이 소정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입을 즐긴 것은 정말 좋았는데, 막상 행위가 끝나고 나니 약속된 시간이 돌아온 것인가?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기내 플레이가 아니라 수치 플레이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민국의 반응에 소정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뒤를 힐끔 확인하더니 고개를 숙여 민국의 귀에만 들리게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지 확인했어요. 메모리아의 강채영 영웅이에요. 제법 거물이네요.”
“……앞으로 얼굴 보기가 영 껄끄럽겠네요.”
민국의 대답에 소정이 쿡하고 웃었다.
“제 생각에는 공대장님의 늠름한 그것에 반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러고 보니 강채영 영웅의 나이가 몇이었더라?”
메모리아의 딜러장인 강채영은 영웅들을 응원하는 국내 팬들에게는 리빙 레전드라 불릴 정도로 한국의 영웅 역사에 큰 획을 긋고 있는 여인이었다.
현재 15 년차 영웅으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대부분의 영웅 동기들이 이미 은퇴를 결정했을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현역에서 전투를 치러온 영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까지 왕성하게 현역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영웅으로 레이드를 시작한 나이가 굉장히 이르기 때문이었다.
보통 영웅 학교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마력을 다루는 게 익숙해지는 성인부터 본격적으로 어둠의 괴물들과 전투를 벌이는데 반해 어릴 때부터 천재라 소문이 났던 강채영은 열 여섯 살부터 실전에 나선 탓이었다.
“그렇게 계산해보면 올해로 서른하나네요. 흐응…. 여자로써 한창 물이 오를 만한 나이네.”
강채영의 나이를 말하며 소정이 뭔가를 아는 척 비음을 내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이고 있는 민국에게 말했다.
“마침 베트남 원정도 함께하겠다, 이번 기회에 가까워지시는 게 어때요? 공대장님의 그것으로 들이대면 웬만한 영웅들은 거절하지 못할 것 같은데?”
“변태로 찍히고 싶지는 않은데요.”
“에이. 공대장님의 그게 얼마나 대단한데요. 특히 처녀보다는 남자를 아는 몸이라면…. 그리고 남자가 먼저 들이대는 게 어때서요?”
“거절하겠습니다.”
장난기가 가득한 소정의 놀림에 민국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이 복수는 나중에 침대에서 톡톡히 갚아 주리라.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긴 비행 끝에 서울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베트남의 하노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트남 영공에 들어서자마자 베트남과 중국 공군이 영웅들이 탑승하고 있는 비행기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기내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정말로 몬스터들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 도착을 한 것이다. 게다가 중간 중간 무언가가 터지는 모습도 목격되고 있었다.
“폭발이 보이기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다행히 공항은 멀쩡하네요?”
세계 각국에서 보낸 수송기들이 공항의 한 쪽에 세워져 있었다.
민국의 눈에도 여러 나라의 국적기들이 들어왔다. 미국, 중국, 인도, 영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전 세계가 지금의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아직 벽이 뚫린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벽 밖은 상황이 별로 안 좋다고 해요. 그나마 중국 애들이 인원수로 밀어 붙여서 사정이 나은 거지 베트남 자체의 전력이었으면 이미 무너지고 남았을 거예요.”
“베트남의 전력이 그렇게 허약해요?”
“영웅 전력이나 군대 전력이나 엇비슷하다고 해요.”
저마다 한 마디씩을 하며 비행기에서 영웅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들 얼굴로 여러 감정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활동하세요. 괜히 타국에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잖아요?”
이화 클랜의 영웅 한 명이 머리를 거칠게 긁적이며 말했다.
‘아무리 자원을 해도 그렇지 신입 공격대를 보내는 게 말이 되나? 협회도 대체 무슨 생각인지….’
8 년차 베테랑 영웅인 그녀의 시선은 신입 공격대에 불과한 GGW 의 팀원들에게 향해 있었다. 다들 미래가 창창한 뛰어난 영웅 유망주라는데, 이번 전쟁에서 크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선배의 마음이었다.
한국에서 공격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은 하노이의 시장은 한걸음에 달려 나와 공격대를 맞이했다. 예비대를 포함해 육십 명에 가까운 영웅은 하노이의 안전과 베트남의 위기를 구원해줄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바로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온 공격대들의 숙소는 베트남 국립 미술 박물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5 성급 호텔로 정해졌다.
GGW 는 호텔 6 층에 위치한 방 중 다섯 개를 배정받았다. 공격대장인 민국이 방 하나를 쓰고, 남은 아홉 명이 네 개의 방에 나눠서 묵기로 했다.
“원정 계획은 베트남 영웅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민국이 팀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도시를 둘러싼 벽의 밖에는 던전 브레이크로 생겨난 몬스터들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베트남과 중국군 그리고 양 국가의 영웅들이 열심히 소탕에 나서고 있었지만, 그 수가 적지 않은데다가 위험 개체들도 있어서 피해가 적지 않게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런 탓에 확산 현상을 막기 위해 베트남에 도착한 공격대들은 군대의 도움을 받아 이동해야했다.
“그 전까지는 숙소에서 푹 쉬셔도 됩니다. 외출도 가능은 하다지만 관광을 온 게 아니니 멀리 나가지는 마세요.”
그렇게 말한 민국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일단 방에서 【B - 1】 난이도의 던전과 관련된 공략 영상들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임시 던전에서 어떤 패턴의 몬스터들이 등장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보스 몬스터의 공격 패턴들이 조금에라도 기억에 남아 있으면 공략에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6 층에 도착한 민국이 자신의 방문에 카드키를 넣을 때였다.
덜컥.
옆의 호실에서 누군가가 편한 옷차림으로 나오고 있었다. 방금 막 샤워를 끝낸 모양인지 여인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어라?”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강채영과 눈을 마주친 민국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대한민국에서 전설을 써내려나가고 있는 선배 영웅에 대한 예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내에서 했던 행동과 소정이 했던 말 때문에 채영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던 탓이었다.
여기서 강채영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꺼냈다면? 수치가 따로 없었다.
“아! 그러게, 오랜만이네요. 뭐, 좋은 만남은 아니었지만 서로 앙금이 있던 것도 아니니 얼굴 붉힐 필요는 없겠고. 일단 멀리 베트남까지 어둠 괴물들과 싸우러 왔는데 저도 잘 부탁해요. 코를 골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딱히 옆방이라고 불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하하.”
강채영의 농담 아닌 농담에 민국은 멋쩍게 웃으며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손이었지만, 베테랑 영웅의 단단함이 한껏 느껴지는 손이었다.
“그러면 전 우리 공격 대장한테 볼일이 있어서. 수고해요.”
“네.”
그렇게 강채영과의 짤막한 대화를 마친 민국은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하필이면 기내에서 자신의 은밀한 행위를 목격했다는 강채영과 옆방이라니….
다행히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모습을 보면 기내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래도 잊은 모양이었다. 혹은 김소정이 착각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민국은 옷을 대충 벗어 던져놓고는 원래의 계획대로 【B - 1】 난이도의 던전 영상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뿌우라는 놈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이번 원정에서 최소 50 개 이상의 임시 던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파괴를 해야 했다.
‘그래도 유니크 등급도 아니고 레전더리 등급의 클래스 스톤을 준다니….’
물론 이번 베트남 원정의 가장 큰 이유는 가루다라 불리는 네임드 어둠의 괴물이 깨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퀘스트의 부수입 또한 놓칠 수는 없었다.
민국은 뿌우의 퀘스트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뿌우의 퀘스트 보상은 옐로우급 마력의 결정과 플레티넘 티켓 그리고 클래스 스톤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중에서 민국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시 최종 보상이라 할 수 있는 【클래스 스톤(A) - 레전더리 등급】 이었다. 던전 공략 영상이 나오고 있는 영웅 패드의 화면이 민국의 손놀림에 따라 클래스와 관련된 내용으로 바뀌었다.
“탱커, 딜러, 힐러.”
어둠의 괴물들을 쓰러뜨리면 얻을 수 있는 전리품 상자에서는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클래스 스톤들이 쏟아졌다.
이 많은 클래스들은 각자의 특성에 따라 탱커, 딜러, 힐러 계통으로 나뉘는데, 크게 클래스 스톤의 색에 따라 S, A, B, C 등급 등으로 구별을 했다.
하지만 조그마한 것에도 순위를 나누는 게 인간의 본성. 그게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라면 더더욱 효율에 따라 순위를 나누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어둠 괴물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클래스 스톤이라는 것이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들은 본인들의 경험을 통해 레이드의 유용성, 희귀성 등에 따라 각각의 클래스들을 1 티어, 2 티어 등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현재에 이르러 노말, 레어, 유니크, 레전더리와 같은 등급으로 구별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나 이렇게 구별을 내린 것이지 전리품 상자에서 【클래스 스톤(A) - 레전더리 등급】 이 나왔다고 폭죽이 터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GGW 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집중 치료술사나】 현아의 【수호 기사】, 유나의 【블라스트 샤프 슈터】가 레어 등급으로 평가 받는 클래스였다.
아, 블라스트 샤프 슈터는 유니크 등급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획득 확률이 심각할 정도로 낮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영웅들은 A 등급의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지.”
이유는 간단했다. 높은 【Gear Score】 의 장비처럼 자격이 되지 않는 영웅이 등급이 높은 클래스로 전직한다고 해서 클래스 고유의 특성을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S 등급의 클래스는 8 성 영웅 되어야만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원정에 걸린 보상은 【클래스 스톤(A) - 유니크 등급】 이 두 개, 【클래스 스톤(A) - 레전더리 등급】 가 한 개였다.
단계가 단계인 만큼 어떤 클래스가 나오더라도 공격대의 전력 상승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거기에 큐우라는 녀석의 퀘스트도 클리어 해야겠지.’
다른 보상은 그다지 큰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카오스 상점의 등급 업은 제법 탐이 났다. 문제는 GGW 공격대 소속을 제외한 여성 영웅 열 명과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 세계의 여성 영웅들은 대부분이 성욕의 화신들이니까.”
게다가 아드레날린과 호르몬이 급격하게 폭발하는 레이드를 연달아 치러야 위기 상황이라는 점과 남성 영웅이 굉장히 희귀하다는 사실을 이용하면 어찌어찌 가능은 할 것 같았다.
* * *
대한민국에서 도착한 공격대가 호텔에 도착한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각 클랜의 공격대장들이 호텔에 마련된 회의실로 소집되었다. 편히 쉬라더니 한 시간 만에 부른 것을 보며, 민국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모든 공격대들이 소집이 된 모양인지 회의실로 탈바꿈 된 호텔의 연회실에는 다른 국적의 영웅들도 제법 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국적의 영웅들은 회의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민국의 모습에 다들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남성 영웅의 숫자가 극히 적은 마당에 공격대장까지 맡아서 확산 현상을 막기 위해 나섰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개 중에는 민국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인지, 아는 척 윙크를 하거나 엄지를 들어 올리는 영웅들도 있었다.
그렇게 회의실의 자리가 공격 대장으로 꽉 차기 시작하자, 어깨에 별이 두 개나 달려 있는 군인이 단상위에 올라섰다. 이어서 프로젝터가 화면에 쏘아지며 하나의 지도를 나타났다.
그 순간 여러 자리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좋은 의미의 소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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