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3 강렬한 유혹
“그러니까 어휴, 내가 속이 터져가지고는. 남자 새끼들은 뭐가 그리 매일 힘들다고 하냐? 뭐, 나는 세상 편하게 살아?”
“맞아요, 맞아. 저도 애인하고 싸울 때 마다 맨날 ‘내 심정을 알기나 해?’ 그러는데 아니! 그걸 말해줘야 제가 알죠.”
“맞아! 그리고 말이야. 섭섭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잖아? 상황이 이런데 그걸 나보고 어쩌라고?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하는 것도 한 두 번이이어야지.”
다음 날, 레이드 중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채영의 푸념에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러던 찰나였다.
“그거 메리지 블루라는 거예요.”
모두의 시선이 말을 꺼낸 영웅에게로 향했다. 본인을 포함해 세 명의 처를 둔 남자와 결혼에 성공한 영웅이었다.
“메리지 블루?”
결혼에 관해서는 자신의 선배나 다름없는 후배 영웅의 말에 채영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정말 아무에게나 조언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우울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거요. 예비부부들의 30 % 정도 특히 남자의 경우는 70% 정도가 경험하는 현상이래요.”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 건데?”
최고참 영웅인 채영의 물음에 주위에 있던 영웅들이 각자 영웅 패드를 두드렸다.
“어라, 진짜 있네. 찾아보니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고….”
“서로 행복했던 기억들을 계속 떠올려야 한다는 대요?”
“에이, 씨발…….”
동료들의 말에 채영이 얼굴을 구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줄이기는커녕 몇 개월을 기약 없이 혼자 두게 생긴 상황이었다.
“아니,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휘어잡아야 한다니까? 선배님은 너무 남자를 애처럼 오냐오냐 해준다니까요? 여자처럼 딱! 나만 믿고 오라니까? 이러면서 딱! 거기 한 번 만져주고!”
“에라이, 미친년아! 그러면 너한테 호감을 보이던 남자들도 다 도망가겠다. 그러니까 니가 남자가 없지!”
어쨌든 그렇게 레이드를 하면서 채영은 자신의 결혼 선배나 다름없는 영웅에게 계속해서 조언을 구했다.
그래도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제 있었던 스트레스도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남자의 마음도 조금 은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게 있기는 했지만.
‘오늘 통화하면 사과하고, 다시 보듬어줘야지.’
그런 마음을 먹으며 채영이 다음 보스를 향해 이동할 때였다.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이 조심스레 채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배님. 잠시 저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뭔데?”
설마 한국에서도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것인가? 자신을 보며 눈동자를 굴리는 공격대장의 모습에 채영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공격 대장이 한 일은 의외의 행동이었다. 영웅 패드로 여러 장의 사진을 띄어서 그녀에게 보여준 것이다.
“선배님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2 군 애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걔네들이 보내온 사진이에요. 그랜드 호텔 아시죠? 거기서 오늘 찍은 사진이라고 해요.”
한 남성과 여성이 서로 선글라스를 끼고 팔짱을 낀 채 호텔을 돌아다니는 사진이었다. 서로의 사랑이 잔뜩 느껴지는 평범한 사진이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을 모르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말이다.
채영은 미간을 좁히며 사진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사진 속 주인공은 분명 회사에 있어야 할 자신의 예비신랑이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봐온 사이인 만큼 헷갈릴 여지도 없었다.
“…이 여자는 누군야?”
“애들이 잠깐 뒷조사를 해본 모양인데,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일반인인 모양이에요.”
“사진은 언제 찍었다고?”
“오늘요. 2군 공격 대장이 애들 데리고 밥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목격한 것 같아요.”
공격 대장의 대답을 들으며 채영은 심장이 크게 뛰었다. 자랑삼아 애인을 데리고 몇 번이나 클랜을 방문했던 터라 메모리아 소속 영웅들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예비신랑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오로지 자신만 사랑하겠다고 말하던 남자였다. 그래서 결혼까지 결심했었다. 이런 내용들은 다른 동료들도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결혼을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사진을 이렇게까지 찍어서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냥 어울리는 친구겠지.’
당장은 확인해 볼 방법이 없던 터라 채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용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던전 안에서는 핸드폰이 터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짜증을 부린다고 해결 될 것도 아니었다.
콰앙!쾅! 콰쾅!!!
채영의 마력이 실린 마력구가 레이저를 한 발씩 발사할 때마다 보스급 몬스터의 피부에서 커다란 폭발이 터져 나왔다.
난이도가 난이도인 터라 처음 마주한 보스 몬스터의 레이드는 생각보다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메모리아 1 군은 부활석을 계속해서 깨뜨려가며 쉬지 않고 레이드를 진행했고, 결국 공략 법을 만들어내며 몬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렇게 레이드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채영의 방으로 메모리아 1군 소속 영웅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다들 국내에서는 한가락 하는 영웅들인지라 지인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오늘은 뭐했어? 기분은 좀 나아졌어?”
- 그냥 그래. 매일 똑같이 회사 갔다 오고. 자기는? 오늘 레이드 한다고 하지 않았어? 【A – 4】 난이도였던가? 잘 끝냈어?
“【A – 3】 이야.”
채영과 그녀의 예비 신량이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는 동안 방 안에 모인 여자들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밥도 그러면 회사에서 먹은 거야? 뭐 먹었어?”
- 그냥 회사 백반. 나가서 먹으려다가 관뒀어.
스피커 폰의 목소리를 들으며 채영의 눈동자가 눈앞의 영웅에게 향했다. 그러자 맞은 편에 있는 여성이 팔로 엑스자를 그렸다.
“다른 데 간 곳은 없고?”
- 없는데? 잠깐, 그런 건 왜 물어 보는데?
갑자기 화가 난 듯 물어보는 남자의 목소리에 채영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을 비롯한 다른 영웅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이상한 거 물어봐서 미안해. 오늘은 이만 끊자. 레이드가 힘들었는지 조금 피곤하네.”
그렇게 말한 채영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 채영의 반응에 뭔가를 직감한 모양인지 곧바로 예비 신랑에게 전화가 걸려왔지만, 채영은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리고는 마력을 이용해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사진 속 주인공, 내 예비신랑이 확실한 거지?”
채영이 못미덥다는 투로 물었다. 그러나 사진 속 주인공은 아무리 봐도 자신의 예비신랑이 분명했다.
“맞아요. 그리고 물어보니까 언니 예비신랑 오늘 회사 출근 안했다고 하는데요? 어제부터 안했다고 해요.”
“그 연예인하는 여자랑 이야기를 나누는 데 성공한 것 같아요. 여자한테 물어보니 남자가 마력 아이템과 관련된 사업을 한다고 했대요. 딱 형부 아니에요?”
“형부는 씨발. 결혼을 해야 너희들한테 형부지. 그래서 둘이 언제부터 만났다는데? 그냥 원나잇 아니야? 그래. 메리지 블루? 뭐, 그런 것도 있으니까. 원나잇이면 그냥 용서해 줄래. 남자가 여자 만나는 게 죄도 아니고.”
동료들의 이야기에 채영이 쿨한 척 말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물병을 집어 들었다.
“저도 그랬으면 했는데…. 작년 7 월부터라고 해요.”
속이 타던 까닭에 물을 마시려던 채영의 움직임이 이어지는 공격 대장의 대답에 멈칫했다.
“씨발, 오래도 만났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물통이 채영의 마력에 의해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그 때 뭔가 있었나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 어떤 문제로 인해 크게 싸웠던 것 같았다.
잠시 기억을 떠올리던 그녀의 눈썹이 크게 들썩거렸다. 싸웠던 이유가 지금처럼 결혼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명성도 있겠다 당연히 ‘다른 여자를 들여서는 안 된다’라는 그녀의 의견과 ‘사업 때문에라도 다른 여자들과도 결혼을 해야 한다’는 예비 신랑과의 의견 대립이었다.
결국 배경의 끗발이 훨씬 센 자신이 이기기는 했지만…. 결혼만 안할 뿐이지 따로 와이프를 만든 모양이었다.
“……한국에 있는 애들에게 조사 좀 해보라고 해.”
“언니, 이 정도면 확실한 거 아니에요?”
“나도 알아. 그런데…. 혹시 모르잖아.”
무려 육 년이나 사귀던 사이였다. 그런 추억과 믿음을 고작 사진 하나로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미련이 담긴 채영의 말에 영웅들이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 있었다.
“에이, 씨발. 뭐, 사람 죽었냐? 왜 이래? 나 괜찮다니까. 남자가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채영이 특유의 욕설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슬쩍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예비 신랑한테 부재중 전화가 열통이 넘게 걸려와 있었다.
‘개새끼가 진짜. 이렇게 나오니 더 불안하잖아.’
평상시에는 먼저 자신에게 전화를 건 적이 거의 없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채영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채영은 일단 남자친구의 번호를 차단했다. 왠지 구구절절 남자친구의 변명을 듣다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여자답게 쿨하게 넘겨야 한다고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깨뜨렸다면 채영은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그래. 너 그 남자 얼굴 알지? 어어, 확실하다고?”
“그거 진짜야? 뭐? 당장 사진 찍어서 바로 나한테 보내봐.”
점심 식사를 마치고 룰루랄라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던 예린이 복도를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슬쩍 확인해 보니 메모리아 소속 영웅 선배들이 심각한 얼굴로 영웅 패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메모리아 1 군 영웅들에게 다가간 예린이 그녀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하노이에 오기 전까지는 아예 모르는 사이에 불과했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해 던전 브레이크의 확산 현상을 함께 막아내고 있다는 공감대 때문일까? 쉽게 그녀들과 인연을 쌓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한민국 공대장의 존재로 인해 그녀가 앞날이 창창한 영웅이라는 사실도 서로 친해지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어? 예린이네, 안녕? 식사하고 온 거야?”
“예린이 안녕.”
“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엘리베이터 앞까지 소리가 들려오던데….”
예린의 물음에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던 한 영웅이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던 영웅이 고개를 슬쩍 저으며 말했다.
“그냥 공격대 내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별거 아니니까 크게 신경 쓰지마.”
“넵,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한민국 공대장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다시 한 번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예린의 눈동자가 그녀들의 손에 들고 있던 영웅 패드를 빠르게 훑었다. 웬 남자와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이 패드에 나타나 있었다. 영웅은 아니지만 제법 인물이 훤칠한 남자였다.
“메모리아 선배님들이 남자를 조사하고 있다고?”
“그렇다니까요?”
예린과 방을 같이 쓰고 있는 소정이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어둠 괴물과의 전쟁으로 인해 남자가 부족한 세계라지만 메모리아 수준의 클랜에 속한 영웅이라면 남자 정도는 골라서 만날 수 있었다.
그녀들의 격에 맞게 외모가 괜찮고, 사회적으로도 능력이 좀 되는 남자들을 찾는 게 어려울 뿐이었다.
“그 분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남자 사진을 보고? 영웅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라며?”
“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심각하게 떠들고 있었어요. 대체 뭘까요?”
“글쎄다. 알고 보면 메모리아 공격 대장의 애인인데. 딴 여자랑 바람을 핀 거야. 그런데 그 대상이 우리 클랜의 공격 대장인거지.”
“그런 거라면 확실히 난리가 나도 이상하진 않네요.”
소정의 말을 들으며 예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여자 영웅들이 모여 남자 사진을 보며 숙덕거릴 이유가 없었다. 괜히 더욱 궁금해지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예린이 영웅 패드를 통화 모드로 변경하고 번호를 꾹꾹 눌렀다.
“응, 응. 어…. 뭐?”
- 그렇다니까. 아, 이거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선배님들한테 알면 나 죽을지도 몰라.
“물론이지. 나 입 무거운 거 알지?”
그리고 통화를 끊은 예린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소정을 바라보았다.
“어, 언니! 대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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