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114화 (114/486)

EP.114 될 놈은 되는 현실

“그게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이야?”

자칭 메모리아의 정보통을 통해 알아냈다는 예린의 이야기를 들은 소정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채영의 예비 신랑이 다른 여자와 몰래 잠자리를 같이 한 까닭에 둘이 헤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는 소정의 상식에 크게 문제될 게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자는 게 어때서?’

어둠 괴물과의 전쟁이 지속되면서 인류의 숫자는 종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통계에 따르면 영웅들도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아직은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지만, 본격적으로 전쟁이 터진다면 분명 큰 문제로 다가올 게 틀림없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남자는 인류의 번식을 위해 여러 여자들을 임신시킬 책임이 있었다. 그렇기에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는 건 어찌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 아니. 언니, 그게 포인트가 아니라….”

그런 소정의 반응에 예린이 허둥거리며 말을 이었다. 한민국 카르텔의 성 비서인 소정은 이런 문제에 관해서라면 심하게 관대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오히려 카르텔의 주인인 민국에게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보라고 부추킬 정도니….

“그러니까 원래는 강채영 선배님이 그 남자와 연애도 안하려고 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 남자가 강채영 선배님만 사랑한다고 여차저차 해서 선배님을 유혹했나 봐요. 그런 지극 정성에 선배님도 마음을 바꾸게 된 거고.”

“와우. 일부일처라…. 책에서나 나올 법한 로맨티스트였나 보네.”

일부일처.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단어였다.

어둠 괴물과의 전쟁이 있기 전에는 중동과 몇몇 나라들을 제외하면 전 세계가 법으로 일부일처를 정했을 정도로 남자들의 숫자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도 엄청 드문 일은 아니지 않아요? 막 재벌 드라마 보면 전부 일부일처던데….”

“그건 드라마라 그렇지. 우리 클랜하고 메모리아 클랜 구단주들 봐. 둘 다 재벌 3 세인데 공대장님에게 목메는 거 못 봤어?”

“그건…. 그렇긴 하네요.”

따지고 보면 민국이 대단한 것이었지만, 예린은 소영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며 넘어갔다. 이상하게 대화가 말리는 느낌이었다.

“아이 참, 그게 아니라 어쨌든 그렇게 되서 서로 알콩달콩 연애도 하고 결혼준비도 딱 끝냈는데 알고 보니! 남자가 다른 여자와 딴 살림을 차리고 있었던 거죠. 그것도 두 명이나.”

“……그러면 강채영 영웅이 세컨드라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써드죠?”

처음에는 한 명인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굵직한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또 다른 한 명은 강채영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만남을 지속하고 있던 여자였던 모양이었다.

강채영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감쪽같이 속았던 거지? 티라고 났을 거 아니야?”

“남자도 치밀하기는 했는데, 선배님이 남자를 의심하고 그런 것을 굉장히 싫어했나 봐요. 상대를 믿고 넘기면 될 것을 괜히 상황 복잡해지는 게 싫었다나?”

덕분에 대한민국 딜러 랭킹 1 위의 영웅이라는 강채영의 자존심은 땅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멍청했네. 애당초 본인만 사랑할 거라 결심하고 연애를 시작한 건데, 수상한 점이 있었으면 의심부터 했어야지.”

그렇게 말을 끝낸 소정이 천천히 고개를 까닥였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여러 상상들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우리 공대장님에게도 기회가 있는 건가?”

“……네?”

“아니, 아니야. 너는 몰라도 되는 그런게 있단다.”

예린에게 손을 휘젓는 소정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 막말로 말해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게 뭐가 잘못됐는데? 일부일처? 그게 무슨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야?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

“…….”

- 후우…. 아니, 아니야. 미안해. 내가 바로 다 정리할게. 원래는 일찌감치 정리를 했어야 했는데….

휴대폰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채영은 피식 웃었다.

육 년을 알고 삼 년이나 사겼던 지냈던 자신의 애인이 이렇게나 재미있는 남자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울증에 걸린 것도 아니고. 화를 냈다가 사과를 했다가 태도가 아주 변화무쌍이었다.

- 그 여자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질질 끄는 바람에 상황이 이렇게 됐어. 미안해, 채영아. 내가 다 잘못했어.

애타는 남자의 음성이 채영의 귀로 들려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채영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 여자들에게 미안했다면, 나는? 웃기지도 않았다.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시퍼렇게 떠져 있었다. 만약 남자가 앞에 있었더라면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아니, 됐어. 너 좋아하는 그 여자들과 짝짜꿍 하면서 잘 지내. 그리고 일부일처? 그걸 내가 강요했냐? 네가 그렇게 한다면서?”

- 채영아, 화내지 마. 내가 다 잘 못 했어. 다 잘못했다니까?

울먹이는 남자의 목소리에 채영은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고 있었다. 저렇게 미안하다고만 하면 모든 게 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나? 남자들은 저런 태도가 문제였다.

“응, 화내는 거 아니야. 화를 낼 가치조차 없는 새끼한테 내가 화를 왜 내? 어쨌든 너랑은 이제 끝이야. 사람들에게 연락해 놓을 테니까 당장 내 집에서 짐 싸서 나가. 그리고 니 놈 회사에 들어간 내 돈, 그래도 불쌍하니 한 달 줄게. 다 토해내라. 변호사 보내 놓는다.”

그렇게 쏘아붙인 채영은 바로 통화를 끊었다.

수초도 지나지 않아 예비 신랑, 아니 이제는 전 남친에 불과한 남자에게서 계속 전화가 걸려왔지만 채영은 자신의 마력으로 휴대폰을 콰드득 우그러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괜찮으세요, 언니?”

뒤에서 둘의 통화를 듣던 한 여성이 조심스레 말했다.

메모리아의 공격 대장이었다. 강채영은 메모리아의 간판일 뿐 아니라 메모리아의 큰 언니나 다름없는 영웅이었다. 그런 까닭에 공격 대장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후배의 모습에 채영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후배들이 마음 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이, 별거 아닌 일에 괜히 내가 미안하네. 야야 너희들도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어떻게….”

“괜찮아, 괜찮아. 쓰레기 같은 놈 한 명 걸렀다고 생각하면 잘 된 거지, 뭐. 어차피 나한테 안 어울렸던 새끼야. 적어도 이 강채영의 남자라면 네임드 정도 되는 몬스터는 쓰러뜨려야 되는 거 아니겠어?”

손을 크게 펼치며 과장하듯 말하는 채영의 행동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둠 괴물과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 인류를 벼랑까지 몰아넣었던 괴물인 네임드들. 하지만 인류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영웅들은 네임드는커녕, 그들을 보좌하는 괴물들고 쓰러뜨리는 것을 버거워 하는 상황이었다.

“어휴. 그래도 기분이 좆같기는 하네. 간단하게 【B】 난이도 레이드라도 다녀올까? 스트레스나 쫘악 풀고 싶은데.”

“어머? 그거 괜찮겠네요. 전리품 상자 몰빵하기 어때요?”

“나도 콜!”

“그러면 전 클래스 체인지 해서 갈게요. 오랜만에 탱커 연습 해봐야겠다.”

채영의 말에 메모리아 소속 1 군 영웅들이 하나, 둘씩 참여 의사를 내비쳤다.

전부 8 등급의 영웅들인 그녀들에게 【B】 난이도의 던전은 5 등급 몬스터가 아닌 이상 장난을 치면서도 클리어 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공략도 딱히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멤버가 순식간에 정해졌고, 던전으로 가기 위해 앞서 나서던 채영이 문을 벌컥 열었다.

“…어?”

채영을 비롯해 메모리아 소속 영웅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라? 대화 좀 나누려고 했는데…. 회의 중 이셨나 보네요? 타이밍이 나빴네. 다음에 찾아올까요?”

잘생긴 남자 영웅이 벨을 누르려는 어정쩡한 자세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민국의 얼굴을 확인한 채영이 입을 꾹 다무는 것도 모른 채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이 재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남자 영웅이 여자 영웅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방을 찾아온다? 필시 이건 뭔가가 있어서가 틀림 없었다. 그리고 남자에게서 받은 상처는 남자로 치유하라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어머? 아뇨. 저희들 회의 다 끝났어요. 선배님,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맞아요. 그러면 이야기 재미있게 나누세요.”

“선배님. 던전은 다음에 같이 가요. 밥 먹으러 가자!”

공격 대장의 눈빛과 손짓을 확인한 다른 동료들도 재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야, 야. 잠깐! 어디 가?!”

바람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팀 동료들의 모습에 채영이 황당한 얼굴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채영의 얼굴이 다시 민국에게 향했을 때는 친근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선배 영웅이 아닌, 메모리아의 딜러 장이자 한국의 랭커 영웅인 강채영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 우리 후배님. 제가 오늘 기분이 굉장히 안 좋은 데요. 그냥 가면 안 되겠니?”

“그거 알고 왔어요.”

“뭐, 뭐?”

새파란 후배의 뻔뻔한 대답에 절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겁 대가리도 상실한 모양인지 민국은 자신을 힘으로 방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누가 영웅 아니랄까봐, 힘은 더럽게도 셌다.

‘건방진 놈.’

당장이라도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꺼지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분위기를 타는 바람에 그거 한 번 빨아줬다고 너무 나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뻔뻔한 민국의 행동에 차마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오히려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자신을 배신한 전 애인의 얼굴도 잊히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신나게 마력이라도 쏟아내며 쫘악 힘을 빼려고 했는데….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채영은 혼란스러운 머리로 하는 생각을 멈췄다.

“야, 한민국. 진짜 내가 오늘은 일이 있어서 기분이 굉장히 나쁘…. 읏챠! 이거 뭐야? 맥주?”

“기분이 나쁘면 한 캔 따야죠. 같이 마셔줄게요. 저 술 굉장히 쎕니다?”

“……웃긴 새끼.”

그렇게 중얼거리며 채영은 맥주를 깠다. 외모가 잘생겨서 그런지 그래도 왠지 싫지는 않은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냉장고에 있던 맥주는 굉장히 시원했다. 던전 브레이크 이후 몬스터들의 국토를 유린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의 상황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정부와 하노이 시의 영웅 대우는 굉장히 호화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세계 영웅 협회의 공문을 받고 전 세계에서 찾아온 영웅들은 베트남의 확산 현상을 해결해줄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베트남 영웅들? 걔들의 수준은 한국과도 비교해도 형편이 없는 수준이었다.

“안주는 룸 서비스로 할게요?”

“마음대로 해라.”

결국 채영은 민국은 자신의 방에 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뻔뻔하게 까지 나오는 데, 그냥 한 번 놀아주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 남녀는 소파에 털썩 앉아서 조촐하게 술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말을 하는 이는 채영이었고, 민국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에 넘어갔던 내가 바보지. 우리 할아버지랑 아빠도 할머니랑 엄마만을 사랑하셨거든. 그런데 세상이 달라진 거지. 하기야 지금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남자가 어디에 있겠냐?”

“있을 수도 있죠.”

“남자라고 남자 편들기는. 없어, 임마.”

채영의 푸념에 민국은 어깨를 으쓱였다. 민국이 살던 세계는 일부일처가 기본으로 깔려있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런 곳에 강채영이 간다면?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간과 쓸개를 다 빼어줄 애들이 수십 트럭은 더 될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지.’

뿌우의 말에 의하면 어둠 괴물과의 전쟁을 끝내고 나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이 세계의 생활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리고 가상현실게임처럼 느껴지는 터라 딱히 그에 대해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부모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들고 있었다.

‘이 세계를 구하고 나서 효도하면 되겠지.’

그렇게 잠시 딴 생각에 빠져 있었던 민국은 천천히 채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쉴 새 없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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