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0 타임 어택
이 세계는 운 혹은 랜덤이라는 단어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 어둠의 괴물들이 좋아하는 단어인가?
실버, 골드, 플래티넘 티켓도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영웅들의 장비를 티켓을 이용해 랜덤으로 뽑다니? 몬스터의 사체 등으로 제작하는 거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던전을 클리어 한다고 해서 고정적인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확산 현상에 등장하고 있는 임시 던전처럼 등급을 제외하면 어떤 몬스터가 나타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던전들이 있기를 하지 않나.
“인간적으로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이제는 클래스 스톤마저도 랜덤 티켓으로 뽑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민국뿐이었다.
이미 뽑기가 일상인 영웅들은 빛의 기둥으로 인해 나온 【클래스 스톤(A) 티켓 - 레전더리 등급】 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레전더리 등급의 클래스 스톤 티켓이라니? 이런 아이템이 있었어?”
“어, 없어요. 영웅 패드에 검색해 봐도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 공격대가 최초로 획득한 거라고요? 에이, 설마….”
한쪽에서는 이번에 획득한 클래스 스톤 티켓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멤버는 현아, 유나 그리고 신나연. 은근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다른 이들도 영웅 패드를 만지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특별한 아이템이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장비 티켓과 마찬가지로 티켓을 찢은 사람에게 귀속이 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마력으로 각성을 해야만 귀속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이걸 사용해야 뿌우가 준 퀘스트의 보상을 제대로 획득하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클래스들이 레전더리 등급으로 평가를 받는지 궁금해져서 영웅 패드를 펼쳤다.
【에테르 마스터(A)】, 【디멘션 게이트(B)】, 【피닉스 나이트(A)】, 【트와일라잇(A)】, 【마력의 네메시스(B)】, 【수라왕 아슈리트(B)】, 【크림슨 어벤져(B)】…….
“생각보다 많네.”
레전더리 등급의 클래스이기에 종류가 몇 개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어둠의 괴물들이 나타나고 영웅들이 각성하면서 무려 팔십 년이 넘도록 이어진 전쟁 기간 동안 나타난 레전더리 클래스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A, B 등급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니…. 정말 희귀한 클래스는 맞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뭐가 나오려나….’
본인이 사용할 수 있는 힐러가 나오면 좋기야 하겠다만, 솔직히 말하면 아무거나 나와도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단, GGW 공격대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클래스여야 했다.
【악의 칼날】처럼 유니크 등급의 클래스지만, 팀원들이 사용할 수 없는 클래스가 나온다면 사용을 하는 것고 그렇다고 클래스 스톤을 처리하는 것도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왕 줄 거면 클래스를 선택할 수 있는 티켓으로나 줄 것이지….”
민국은 자신의 부름에도 계속 묵묵부답인 뿌우를 향해 원망을 담아 중얼거렸다. 어디서 이런 못된 것만 배웠는지….
【클래스 스톤(A) 티켓 - 레전더리 등급】의 사용은 나중으로 미뤘다. 아니, 미룰 수밖에 없었다.
민국은 당장 티켓을 찢어서 본인들이 얻게 되는 레전더리 클래스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아이템이라는 팀원들의 강력한 요구에 결국 하노이에 호텔에서 찢기로 한 것이다.
아마 호텔에 있는 전 세계의 영웅들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게 끝이 난 건 아니었다. 티켓에 대한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데이트 1 회권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가 기여도 1위인가요?”
“저번에는 이상하게 무마가 되었으니까 이번에는 공대장님이 직접 선택해주세요!”
“기여도 1 위는 당연히 데미지를 가장 많이 넣은 딜러 아니겠습니까?”
다들 자기들의 기여도가 가장 높다고 삐약삐약거리는 팀원들의 모습들에 민국이 저도 모르게 이마를 감싸 쥐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함께 레이드를 한 아홉 명의 영웅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데, 아무나 선택하자니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택을 안 할 수도 없었다.
“먼저 기여도 A- 이하인 분은 일단 탈락. 다음 기회를 노려주세요.”
그리고 가장 객관적으로 기여도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영웅 패드에 나오는 기록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민국의 말에 영웅들의 아쉬움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어라?’
희희낙락한 표정과 함께 남아 있는 영웅들을 보며 민국은 고개를 갸웃했다. 의외로 물러나는 영웅들의 숫자가 제법 많았다. 딜러진은 전부 기여도가 A 를 넘지 못했고, 나름 메인 탱커의 전담 힐을 보았던 켄달도 탈락이었다.
아무래도 첫 레이드인 까닭에 마력과 동선에 대한 낭비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은 것은 탱커진인 현아와 타냐 그리고….
“우후훗!”
섹시를 뛰어넘어 변태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지젤이었다. 타냐와 지젤은 영볼루션에도 언급이 되는 실력 있는 영웅들이었고, 현아 역시 민국이 인정하는 재능 넘치는 영웅이었다.
덕분에 민국은 쉽게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현아는 이 중에서 가장 많이 데이트를 한 여성이었고, 지젤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제 선택은 타냐 루스입니다. 이유는 다 아시겠죠?”
“무, 무슨! 어째서 제가 아닌데요?”
“그, 그거야 타냐는 팀의 메인 탱커로 두 마리의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완벽에 가까운 탱킹 능력을 선보였을 뿐더러…. 아 거기는 터치 금지! 그리고 갑작스러운 위기에서 순간적인 오더로 팀을 구해내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육체를 이용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지젤에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야 했지만, 어쨌든 민국의 이런 선택에 전과는 다르게 다들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하하핫! 공대장님과 데이트라니! 저는 오늘도 좋습니다!”
그리고 일일 데이트권을 획득한 타냐가 러시아의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 *
“아니, 너는 대체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거야? 남자로 각성한 것도 모자라 어쩜 이렇게 운까지 좋을 수 있지? 벌써 빛기둥을 본 게 몇 번이야? 그 정도 해 먹었으면 그 운 제발 나에게도 좀 나눠줄래?”
탄생 처음으로 GGW 공격대에서 빛의 기둥을 뽑아냈지만, 메모리아에서 레이드만 하면 똥 손이 되어버리는 강채영이 울상을 지으며 민국에게 달려들었다.
오늘 메모리아가 진행한 레이드는 무려 【A - 3】 난이도의 레이드였다. 그런데 채영은 두 번의 보상상자를 열어 부활석조차 뽑지 못해 알게 모르게 팀원들의 눈치를 봐야했었다. 그런데 GGW에서 초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괜찮아요, 운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죠. 그리고 제 운도 아닌데요? 한 번은 강채영 영웅님이 그리고 나머지는 천호동 럭키 걸이 뽑았는데요, 뭐.”
“그래도 전부 네가 공격대장으로 있을 때 나온 빛기둥들이잖아. 아, 생각해보면 이건 상자를 여는 영웅이 중요한 게 아니라 팀원들을 리딩하는 공격대장의 운에 달린 게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언니는 진짜로 운이 나쁜 거고요.”
민국이 강채영을 토닥거리는 사이 【클래스 스톤(A) 티켓 - 레전더리 등급】을 구경하던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너어…?!”
“먼저 축하의 말씀부터 드릴게요, 한민국 공대장님.”
버럭하는 강채영을 무시하며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이 민국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민국은 둘이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레전더리 클래스 스톤을 획득할 수 있는 티켓이라니…. 저런 것도 있었네요. 그러면 어떤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지는 티켓을 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겁니까?”
“영웅 패드로 아이템의 정보를 읽어보니 랜덤으로 정해진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그렇다면 피닉스 나이트 혹은 에테르 마스터 정도가 나오면 최상이겠네요.”
솔깃한 소리에 민국이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을 바라보았다.
메모리아 1군의 공격대장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영웅 중 한 명. 괜한 말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나요?”
“레이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탱커의 생존 능력이라는 건 아시겠죠?”
물론이었다. 탱커가 사망하면 레이드는 거기서 끝이나 다름없었다.
“피닉스 나이트는 탱커가 사망하면 그 자리에서 다시 부활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도 생명력을 풀로 채운채로 말이죠. 심지어 죽기 전에 잡고 있던 몬스터에 대한 어그로도 튀지 않아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아시겠죠?”
“어…, 음…. 사기적이네요.”
메모리아 공격대장의 물음에 민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중 부활이라니. 어째서 레전더리 등급에 속하는 지 설명만 들어도 이해가 되는 클래스였다.
피닉스 나이트의 장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위에 접근하는 적들에게 뜨거운 불꽃의 열기를 내뿜어 데미지를 준다는 특징도 있었다. 탱커이면서도 탱커보다 높은 데미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에테르 마스터도 피닉스 나이트 못지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아니, 레전더리 클래스들은 하나하나가 일반 클래스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스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상위 레이드를 진행할수록 등급이 높은 클래스와 클래스의 숙련도가 높은 영웅들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동일 포지션이라도 상황에 따라 클래스를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물론, 일반 클래스로도 공략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자체적으로 패널티를 안고 레이드를 하는 기분이죠.”
이미 레이드를 하고 있는 공격대장으로서 민국은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이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 클래스 티켓은 어떻게 구하셨나요? 어떤 몬스터에게 얻으셨는지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아, 네. 물론입니다.”
딱히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 정보를 이용해 장사를 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 가루다의 분신? 그 녀석들에게서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B - 1】 난이도에서요.”
“…네?”
민국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메모리아의 공격대장과 강채영의 얼굴이 싸악 굳었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이유를 생각하니, 어렴풋이 짐작이 되는 것들이 있었다. 【B – 1】 난이도에서 가루다의 분신이 등장한 것 자체가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세계 영웅 협회의 골치를 가장 썩이는 문제도 가루다의 분신이라는 새롭게 나타난 괴물들이었다.
“어째 하위 난이도에서도 등장하는 횟수가 점점 빈번해지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죠. 이렇게 되면 상황이 지금보다 조금 더 심각해질 수도 있겠는데요? 가뜩이나 던전 타이머가 얼마 남지 않는 던전들이 많은데, 그런 던전에서 가루다의 분신들이 나오게 되면….”
민국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만약 여기서 던전 브레이크가 또 한 번 터지면 베트남은 끝장이나 다름없었다. 십이 재앙인 가루다 또한 어떻게 나올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 상황은 이제 【B - 1】 수준의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자신이 걱정할 게 아니었다. 세계 영웅 협회가 그리고 인류의 수호자라 불리는 랭커 클랜들의 단장 혹은 공격대장들이 고심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의 GGW 는 수준에 맞게 【B - 1】 난이도의 던전이나 클리어하면서 나중을 위한 성장을….
“아! 단장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소매가 없는 흰색 남방을 입은 서양 여성이 민국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민국이 기다리고 있었던 타나 루스였다. 풀 플레이트 메일은 물론이고, 커다란 방패로 온 몸을 꽁꽁 가렸던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편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커다란 머리핀으로 머리를 뒤로 묶어서 고정시킨 모습도 딱 나이에 맞게 귀여웠다. 아니, 몸매가 몸매인지라 성숙해 보인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았다.
“누구야?”
갑작스러운 서양 미녀의 등장에 강채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런 채영의 물음에 민국은 절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왠지 살짝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 데이트 상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채영이 홱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채영의 눈을 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섹스 파트너에게 또 다른 파트너를 소개시키는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하지만 여기는 그것이 당연시 되는 세계였다.
“자세히 봐요. 우리 공격대의 타냐 루스잖아요. 그 시베리아의 불곰 전차.”
“어…? 아, 그렇구나. 그런데 너랑 볼일이 있는 거야?”
“네. 가루다의 분신 레이드 기여도 1 위 보상으로 오늘 데이트하기로 했어요.”
민국의 대답에 채영의 얼굴에 진심으로 부럽다는 감정이 깃들었다.
“언니. 남자도 아니고 왜 그렇게 쿨 하지 못해요? 누가 보면 둘이 결혼이라도 한 줄 알겠네.”
그런 채영의 어깨에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이 손을 턱 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채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렇게 살벌한 술래잡기를 하는 두 영웅을 뒤로 하고 민국은 타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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