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4 코 앞에 닥친 위기
“꿀꺽.”
굴림판이 돌아가면서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민국이 갑작스럽게 티켓을 찢어버린 까닭에 다들 경황이 없었는데, 레전더리 클래스를 보상으로 주는 굴림판은 이제껏 그녀들이 봤던 굴림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좀 더 웅장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심지어 굴림판의 위쪽에 새겨진 기이한 문장은 반짝반짝 빛도 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눈은 굴림판의 화살표 그리고 돌아가고 있는 판의 내용에만 집중될 뿐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굴림판의 움직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
“떠, 떴다?!”
“아아아….”
굴림판이 완전히 멈춘 그 순간, 다양한 음색들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쉬움의 탄성이 대부분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영웅은 열 명이지만 티켓으로 획득할 수 있는 레전더리 클래스는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민국 역시 아쉬움의 탄성을 내뱉는 쪽에 속했다.
굴림판에 나타난 레전더리 클래스 중 화살표에 걸린 클래스는 바로 탱커인 【클래스 스톤(A) - 피닉스 나이트】였기 때문이었다.
‘뭐, 상관없나….’
솔직한 마음으로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결과만 따지고 보면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었다. 피닉스 나이트는 메모리아의 공격대장이 강력하게 추천했던 레전더리 클래스였다.
<【클래스 스톤(A) - 피닉스 나이트】
○ 두 번의 날갯짓(S) - 영웅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사망해도 3 초 후 원래의 상태로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한 영웅은 사망하기 전, 본인의 몸에 걸려 있던 강화 스킬은 물론이고 생명력까지 완벽히 회복됩니다.
○ 불꽃의 날갯짓(A) - 피닉스의 뜨거운 열기가 주위의 적들을 불태웁니다. 영웅의 마력 사용 능력에 따라 적들에게 입힐 수 있는 데미지가 크게 달라집니다.>
영웅 패드로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S 라고 찍힌 스킬 등급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전투 중 부활이라는 사기적인 스킬이니 당연한 평가였다.
“탱커 클래스가 나왔네요.”
민국의 말에 순간적으로 현아와 타냐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둘 다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될 둘 만의 레이스에 다른 영웅들이 더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과연 누가 살까?’
영웅 경력만 놓고 보면 타냐가 더욱 길었다. 그렇기에 그 동안 벌어들인 돈도 더 많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현아는 언니가 R’s 클랜의 단장이었다. 일종의 금수저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저는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모두의 긴장감이 최대치까지 올라간 그 때, 의외의 대답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민국이 반사적으로 말을 꺼냈던 타냐를 쳐다보았다.
“타냐?”
“사실입니다. 물론 레전더리 클래스가 탐은 납니다. 하지만 피닉스 나이트로 전직하게 되면 양손 방패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방금 전, 클래스 정보를 살펴보니 피닉스 나이트는 검과 한 손 방패가 강제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타냐의 말에 민국도 클래스 정보를 확인했다. 다른 영웅들도 동일한 행동을 하는 모습들이었다.
“어…, 그렇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본인도 제법 아쉬운 모양인지 몇 번이나 고개를 젓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한손 방패는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이트 팽 클랜으로 영웅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방어 포지션의 탱커 훈련만 하면서 레이드에 나선 까닭에 검은….”
“으음.”
아무래도 자신이 없던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얼마 전 유니크 클래스인 【악의 칼날】을 얻었을 때도 단검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아무도 전직을 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악의 칼날】 클래스는 유니크 클래스임에도 불구하고 민국의 것이 되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오현아 영웅이 검과 한손 방패를 주로 사용하니 저는 입찰을 포기하겠습니다.”
“어, 언니….”
타냐의 결정에 현아의 눈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레전더리 클래스를 포기하다니! 역시 러시아는 대인배의 나라라는 사실이 현아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에이, 이러면 싱겁게 끝나겠네.”
“돈 좀 벌 줄 알았는데, 매너입찰! 매너입찰!!!”
“그러면 전화 찬스 좀 쓰겠습니다!”
자연스레 레전더리 클래스인 피닉스 나이트의 주인이 된 현아는 곧바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언니인 현정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 네, 네에?!
현아의 입을 통해 자세한 소식을 들은 현정을 화들짝 놀라며 곧바로 돈을 송금했다. R’s 의 레전드나 다름없는 박다영 공격대장과 함께 공격대 생활을 한 그녀는 레전더리 클래스의 대단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 한민국 공대장님 덕분에 현아가 엄청난 귀물을 손에 넣게 되었네요. 클랜 단장이 아닌 현아의 언니로 정말 감사드려요. 아, 며칠 뒤에 클랜에서 대량의 부활석을 베트남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저희 공격대에 대한 지원인가요?”
- 네, 요즘 GGW 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많이 언급되는데다가 ‘가루다의 분신’ 때문이라도 부활석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아, 감사드립니다.”
이런 것은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부활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었다.
협회에서 무제한적으로 부활석을 지원받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 무제한이었지 하노이에 모여든 공격대가 워낙에 많은 터라 순번을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부활석의 대부분은 상위 공격대에 지원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세계 영웅 협회에서 부활석을 받기 전까지 오현정이 보낸 부활석으로 대체를 하면 될 것 같았다.
현아가 레전더리 클래스의 구매 대금으로 내놓은 돈은 5000 만 달러였다.
분명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전더리 클래스 스톤의 가치에 비하면 헐 값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대의 전력이 올라간다는 이유 때문인지 다들 돈에 대해서 큰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레전더리 클래스의 가치가 워낙 대단한 터라 지젤이 조금 불평어린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팀의 맏언니라 할 수 있는 소정과 둘이서 무언가를 쑥덕대더니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는 빠르게 불만을 철회했다.
그렇게 현아는 GGW 공격대에서 가장 먼저 레전더리 클래스를 손에 넣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 * *
탱커가 단단하면 공격대의 생존력이 높아진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였다.
뿌우의 퀘스트를 완료한 민국은 공격대의 일정을 바꿔 【B - 1】 난이도의 던전을 위주로 공략을 시작했다. 5 등급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마력의 결정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아직 기어 스코어가 떨어지는 동료들의 장비도 얻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마주치게 된 5 등급 몬스터인 그레드모이라. 괴상한 이름답게 지렁이처럼 생긴 징그러운 몬스터였다.
“지렁이 등장! 네 시 방향!!!”
그런 그레드모이라가 불러낸 조그마한 식인 지렁이들이 영웅들을 향해 꾸물꾸물 기어들었다.
커다란 칠성장어처럼 생긴 녀석들이었는데, 빨판처럼 생긴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나 있었다. 물리면 적어도 아프다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식인 지렁이들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민국을 포함한 GGW 의 영웅들은 그레드모이라를 공격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민국이 리딩을 내린 터라 식인지렁이의 접근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전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전부 처리할게!”
타냐에서 보스 몬스터의 탱킹을 인계한 현아가 꾸물꾸물 몰려드는 식인 지렁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탱커의 위협적인 마나 때문에 현아에게 어그로 끌린 식인지렁이들은 이동을 멈추고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텅! 터터텅!
현아가 크게 방패를 휘두르자 그녀에게 달려들던 식인 지렁이들이 괴상하게 찌그러진 채 땅바닥에 내팽겨졌다. 아무리 식인 지렁이들의 이빨이 날카롭다 해도 탱커의 단단한 방패와 두터운 갑주를 뚫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식인 지렁이의 숫자는 수십 마리가 넘었다. 힐러와 딜러의 도움 없이는 처리하기가 힘든 숫자였다. 그 때 현아의 몸에서 붉은 마나가 불꽃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피닉스 나이트의 스킬, 불꽃의 날갯짓이 사용된 것이다.
“꺄하하하! 덤벼! 덤벼 보라고!!!”
스킬의 발동을 확인한 현아는 식인 지렁이를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검과 방패를 휘둘렀다. 굳이 식인 지렁이들에게 공격을 성공시킬 필요도 없었다.
어그로가 끌려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녀석들이 피닉스의 불꽃으로 타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email protected]#%@#$
- ^@#[email protected]#$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드모이라가 불러낸 수십 마리의 식인 지렁이는 오현아라는 천적을 만나 검은 재로 변해버리고야 말았다.
“나이스, 오현아.”
“피닉스 나이트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뽐내는 것 같은 현아의 대답에 민국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똑같은 A 등급이라 해도 레전더리 클래스는 일반 클래스보다 훨씬 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일반 탱커 클래스였다면, 방금 전의 현아처럼 식인지렁이들을 금방 처리하지 못했을 터였다.
최소한 딜러 둘, 셋은 그레드모이라의 졸개들을 처리하기 위해 따로 빠져나갔어야 했다. 당연히 그만큼 힐러들의 신경도 분산될 테고, 레이드도 좀 더 길어졌을 터였다. 아니면 혹시 모를 사고가 터지거나.
“오현아, 제법이잖아?”
레이드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정예린이 현아를 툭 치며 말했다.
“이 정도야 간단하죠.”
그런 예린의 칭찬에 현아의 얼굴이 화사하게 빛났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 레이드에서의 기여도는 그녀가 1 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레드모이라 공략의 키 포인트는 식인 지렁이가 공격대의 본진에 달라붙기 전에 처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GGW는 피닉스 나이트로 전직한 현아의 능력을 한껏 이용해 식인 지렁이들을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었다.
“휘이익!”
“역시 레전더리는 다르네. 대단한 걸?”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현아의 활약을 칭찬했다. 그만큼 이번 레이드는 그녀의 활약으로 인해 편하게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바로 레전더리 클래스의 탱커입니다!”
동료들의 칭찬에 현아는 허리를 연달아 숙였다. 왠지 뭉클한 기분이었다. 이래서 영웅들이 상위 클래스를 손에 넣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쓰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도중 현아의 눈동자가 민국에게로 향했다. 이 모든 결과물들은 민국이 아니었으면 얻지 못했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민국에게 자신의 고마움을 나타내고 싶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일단은 레이드나 열심히 해야겠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현아는 결국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영웅 학교에서는 느끼지 못했지만, 정식 영웅이 된 후 민국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하게 레이드 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만큼 영웅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현아는 민국의 가장 옆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가 되고 싶었다.
* * *
“읏, 으으읏!”
위협을 느낀 여성이 본능적으로 몸을 바동거렸다. 하지만 그녀를 앞에 둔 머리가 반질한 새에게는 유혹에 가까운 몸짓일 뿐이었다.
아이젠 크로이츠는 【A】 난이도의 하위 던전을 주로 공략하는 독일의 공격대였다. 베트남의 확산 현상에 참여해서도 주로 【A - 7】 에서 【A - 9】 사이의 던전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본인들의 일정을 수행하던 도중 마주치게 된 가루다의 분신.
그리고 아이젠 크로이츠의 공격대장은 민국이 올린 공략법을 참고삼아 가루다의 분신 레이드를 진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멸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전투 경험이 없는 탱커들이 분신들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전멸로 끝이 났다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공격대가 전멸하던 도중 재수없게 붙잡힌 영웅이 있었다.
- 캬아악! 칵!
뭐라 소리를 내뱉던 대머리 새가 아이젠 크로이츠의 힐러 영웅인 페냐의 다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돌처럼 단단한 몬스터의 괴력에 페냐의 눈에 두려움이 물들었다.
‘이대로라면 위험해.’
말로만 듣던 타락이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페냐는 마음을 다잡고는 바로 혀를 깨물려고 했다.
“쿠우웁?!”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녀의 입안으로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페냐의 눈동자에 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꽁지 깃털의 새가 비쳐졌다. 자신의 입으로 들어온 것은 괴물의 커다란 생식기였다.
“우우웁! 우웁!!!”
이어서 자신의 다리가 확 벌려지는 느낌에 페냐는 연신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단단한 벽에 끼인 것 마냥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ㅡㅡㅡㅡㅡ!!!!”
그리고 커다란 무언가가 그녀의 배까지 치고 올라온 순간 페냐는 정신을 놓았다. 더러운 몬스터의 것이 자신을 더럽히고 있었지만, 저항할 수 없는 쾌락이 그녀의 뇌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인류를 위해 싸우던 영웅이 몬스터에게 타락하던 그 시각.
아이젠 크로이츠가 공략하던 던전에서 천키로는 넘게 떨어졌던 새의 탑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새의 탑의 변화는 새의 탑을 관찰하고 있던 사람들을 통해 바로 하노이에 있는 세계 영웅 협회의 본부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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