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152화 (152/486)

EP.152 김소정

커피가 차갑게 식었다.

눈 앞에서 되도 않는 소리를 떠들어대는 전남편을 보며 소정은 머릿속에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 이 남자를 죽자살자 쫓아다녔던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R’s 클랜의 GGW 공격대. 요즘 아주 유명하던데? 거기서 근거리 딜러를 하고 있다면서?”

“…….”

“베트남에 확산 현상도 해결하고…. 아주 용 됐더라? 뭐, 옛날에도 우리 소정이는 인류애가 가득했지.”

“…….”

“그래서 우리 소현이는? 잘 지내고 있지?”

전 남편의 입에서 딸아이의 입이 나오자 소정이 바로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당신이 버린 아이에 대해서는 얘기하지마. 소현이도 아빠가 죽었다고 알고 있으니까.”

“뭐, 뭐? 내가 죽어? 왜? 이렇게나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앞에서 이죽거리는 남편의 태도에 소정이 이를 까득 깨물었다. 다시 한 번 과거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이런 남자가 좋다고 결혼까지 했으니….

“됐고. 앞으로는 연락 안했으면 좋겠어. 물론, 소현이한테도 접근하지마.”

얼음장같이 차가운 말에 남자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살짝 당황했던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열한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사이에 왜 그래? 전에 있던 일은 내가 다 잘못했어. 그 때는 내가 누구를 책임져야 한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저지른 실수였다고.”

“실수?”

“그래, 실수.”

소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결혼까지 생각하면서 만났던 남자다. 그의 성격을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소정의 반응이 미온적이라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늘어 놓았다.

“진짜 내가 다 잘못했어. 다시 네가 받아준다면 응?”

“…….”

“소현이에게도 좋은 아빠가 될 게. 응? 소현이 아직 4살이야. 아빠가 필요할 시기라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사탕발림을 늘어놓았다. 그래야만 이 여자의 마음을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베트남의 확산현상에 GGW 공격대라면 돈도 많이 벌었겠지?’

자신의 전부인은 가뜩이나 소득이 높은 직업인 영웅이었다.

못해도 몇 억, 아니 수십 억은 있을 게 분명했다. GGW 공격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몇백 억 단위일 수도 있었다.

‘이 년이 돈을 허투루 쓰는 성격도 아니고….’

예전부터 그랬던 성격이 어디 갈리 없었다.

이미 알아본 결과 자신의 전부인은 클랜 하우스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벌어둔 돈들이 다 어디갔겠는가? 본인이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재결합을 했다가 운좋게 소정이 던전에서 사망하기라도 한다면? 그 돈은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

“최윤철.”

“응, 소정아.”

소정의 입에서 나올 말을 생각하며 남자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최악으로 끝이 난 사이지만, 아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너를 모를 줄 알고? 소현이가 생겼다는 말에 네가 조롱하면서 연락을 끊었을 때! 우리 사이는 거기서 끝났어.”

최윤철의 낯빛이 거무튀튀하게 썩어들어갔다.

‘칫.’

그 때 받았던 상처가 생각이상으로 큰 모양이었다. 자신이 계속 숙이고 들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반응이 영 딱딱했다. 그렇다고 포기를 하자니 수백억이라는 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쩔 수 없지.’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건 정말 굴욕적인 일이지만, 돈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에 틈을 만들어 비집고 들어가야했다. 자신의 미래와 노후를 생각해서 말이다.

일단 들어가기만 한다면 소정의 재산을 빼돌리면서 아빠 연기나 조금 하다가 좀 더 어린 다른 여자로 갈아타면 그만이었다.

드르륵.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서 일어난 윤철이 소정에게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언니, 여기서 뭐해요?”

윤철의 귀로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굉장히 잘생긴 남자를 끼고 있는 여자였다.

“혀, 현아? 아, 아아?!”

그런데 남자를 본 소정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여자가 바람핀 광경을 들킨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 * *

“어, 어떻게 여기를?!”

소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현아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 옆에 있는 남자를 확인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민국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소정을 향해 현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오늘 일정도 일찍 마쳤길래 데이트나 좀 하려고요. 그런데, 언니가 보이더라고요. 반가워서 들어왔죠.”

“아, 맞아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민국과 눈이 마추진 소정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 때였다.

“당신 누구야?”

윤철의 다급한 목소리가 소정의 행동을 내리눌렀다.

윤철은 예상치 않은 불청객의 존재가 굉장히 껄끄러웠다. 일단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떳떳치 않은 행동인데다가 더욱이 남자는 자신보다도 훨씬 어리고 잘생겨 보이는 녀석이었다.

‘설마 김소정 이 년, 카르텔에 들어간건가?’

윤철이 보이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혼녀가 남자를 만나는 건 그리 흠이 될 일이 아니다. 그런만큼 그건 아니어야 했다. 만약 김소정이 저 남자의 카르텔에 속한 여자라면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니, 카르텔이라 치면 아빠의 자격을 들어서 소현이를 물고 늘어진다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저 남자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겠지만.

그리고 소정에게 아는 척을 했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네? 저희는 소정 언니 직장 동료인데요?”

“지, 직장 동료라고요?”

“네. GGW 공격대요. 아! 소정이 언니 공격대 동료가 누가 있는지는 잘 모르시는구나.”

현아의 말에 윤철이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김소정 영웅의….”

“네, 알고 있어요. 소현이 버리고 도망가신 분. 굳이 말씀 안하셔도 돼요. 사실 다 들었거든요.”

정곡을 찌르는 현아의 대답에 윤철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분노에 찬 그의 눈에 컵에 담긴 냉수가 들어왔다. 윤철이 반사적으로 컵을 들어 현아의 얼굴에 뿌리려는 찰나.

턱!

가만히 있던 남자의 손이 윤철이 컵을 들지 못하도록 위를 내리 눌렀다.

‘무슨 힘이…!’

아무리 힘을 줘도 컵을 움직일 수조차도 없었다. 그렇게 낑낑거리는 윤철의 귀로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왔다.

“아침 드라마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물을 뿌리는 장면은 봤어도 남자가 물을 뿌리려는 건 또 처음 보네.”

여자들만 가득한 카페의 시선은 어느새 네 남녀에게 향해 있었다.

- 무슨 일이래?

- 앉아있는 남자가 전 남편인데….

- 카르텔 싸움 아니야?

그도 그럴게 남자 둘과 여자 둘이 만들어내는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한 남성은 얼굴의 많은 부분을 가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만 봐도 훈남이라는 티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결국 컵을 빼내는 것에 실패한 윤철이 짧게 숨을 내뱉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표독스러운 눈동자가 이번에는 민국과 현아에게 향했다.

“그건 과거의 일입니다. 타인은 신경 쓰지 마시죠?”

그런 윤철의 말에 민국과 현아의 눈동자가 소정에게 향했다. 그리고 소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니, 최윤철. 이제 그만하자. 당신이 뭐 때문에 나한테 접근했는지 내가 모를 리 없잖아?”

“…….”

“더럽게 끝났지만, 그래도 우리 오래 만났던 사이야.”

울화를 꾹꾹 눌러 참는 표정을 하면서 소정이 말을 이었다.

“돈 때문이지? 얼마가 필요한건데?”

말을 마친 소정의 입술을 비틀었다. 윤철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가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과거가 후회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당신. 대답 안하면 우리 대화는 여기까지야. 다음부터는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만나지 않을 거야. 대신 변호사만 보내줄게.”

윤철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전 부인은 한다면 한다는 여자였다. 떠난 남자에게 미련을 가지는 스타일의 여자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모르는 남녀를 두고 입을 열기가 영 껄끄러웠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500억.”

“와….”

옆에서 여자의 탄성과 함께 비웃음이 들려왔지만, 윤철은 이를 악 물었다. 그 돈만 받으면 소영의 앞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 때였다.

“미친 거 아니야? 헤어졌다면서요? 그 돈을 왜 줘요?”

머릿속으로 전후상황을 그리고 있던 민국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500 억이 누구 애 이름도 아니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전 남편이라는 남자가 소정을 만난 이유는 돈 떄문으로 보였다. 문제는 이 남자가 이상한 놈이라는 것.

소정에게 돈을 요구하는 상대는 몇 년 전, 그녀를 임신만 시켜놓고 도망친 남자였다. 그런 남자에게 500 억? 만 원도 아까웠다. 게다가 몇 년만에 연락해서 한다는 소리가 돈 요구였다.

마음 같아서는 공격대 동료이자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소정을 협박하는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싶었다.

등 뒤에 매고 있는 법봉이 정의를 구현하라고 울고 있었다. 이걸로 신나게 두들겨 패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가….’

이 빌어먹을 놈과 똑같은 놈이 될 뿐이었다. 게다가 영웅이 일반인을 폭행하면 그 처벌이 어마어마했다. 어쨌든 이 남자에게는 만원짜리 한 장도 줄 생각이 없었다.

“김소정씨.”

“네, 네?”

딱딱한 민국의 말투에 소정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는 윤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솔직히 말해 아직까지도 소정씨의 사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현아가 나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일단은 변호사부터 부르도록 하죠.”

“너, 이 개 자식! 네 놈이 뭔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노로 눈이 돌아간 남자가 민국의 멱살을 붙잡았다.

* * *

“뭐, 뭐라고?!”

[그래서 여기 경찰오고 지금 난리났어. 빨리 변호사 좀 보내줘.]

“이, 이런 미친!”

현아의 입을 통해 소정의 이야기를 들은 오현정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R’s 클랜의 미래를 책임질 공대장이 그것도 인류의 영웅을 향해 일반인이 주먹을 휘두른 사고였다.

물론, 어설프게 내지른 주먹에 민국이 맞는 일은 없었다지만. 어쨌든 있어서는 안 되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클랜에 상주하고 있던 변호사가 황급히 사고가 일어난 장소로 달려갔다. 그리고 전후사정을 파악한 현정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아이 버리고 도망간 남자가 돈 때문에 접근한 거라고?”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영웅들 사이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아침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도 여러 번 쓰였었고. 문제는 그 남자가 노린 대상이 R’s 클랜의 영웅이라는 것. 그리고 공대장인 민국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이었다.

“일단 남자는 폭행죄를 물어 구치소에 수감했습니다. 합의는 봐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협박죄도 추가해. 아, 일단. 김소정 영웅의 전 남편이라고 했지? 뭐, 재결합이라도 한대?”

연락 끊고 아이를 버리고 도망간 남자가 개과천선해서 다시 돌아온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보나마나 김소정이 GGW 공격대에서 잘 나가니까 돌아온 게 분명해다. 그러니까 돈을 요구했겠지. 레파토리가 훤하게 그려졌다.

비서가 말했다.

“아뇨. 전 남편에 대해 접근금지를 신청한다고 합니다.”

“에휴, 마음 고생 심하겠네. 그나저나 이거 우리 클랜도 욕 왕창 먹겠어.”

민국이 폭행시비에 휘말렸고, 김소정이 협박을 당한 사건이다.

당연히 R’s 를 응원하는 팬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클랜에게 물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수단 방법을…. 아니지, 최대한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그 자식. 인생 조질 수 있는 방법 찾아 봐.”

얼굴로 모르는 멍청한 남자를 떠올리면서 현정이 험악한 기세를 내뿜었다.

“그리고 김소정 영웅에게도 카운슬러 보내고.”

이런 일들을 겪었으니 보나마나 멘탈이 바사삭 무너졌을 게 틀림없었다.

일단 GGW 공격대의 일정은 중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김소정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김소정을 찾아갔던 카운슬러는 아무 성과 없이 빈 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김소정 영웅에게 딱히 제가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네?”

카운슬러의 말에 현정을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카운슬러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김소정의 집에서 남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아이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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