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159화 (159/486)

EP.159 징조

“…에휴. 다시 이거 되돌릴 수 없나?”

자신의 핸드폰을 보며 강채영이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민국에게 연락을 해버렸다. 무게감 있는 도도한 여성 혹은 질척거리지 않는 쿨한 여자로 남고 싶었건만….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가 없는 상황.

“……후.”

한숨과 함께 강채영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는 알몸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바라보던 채영은 그대로 푹신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커다란 침대가 오늘 따라 필요 이상으로 넓다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레 손이 밑으로 향했다.

“으음.”

손끝으로 까끌까끌한 음모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부분을 매만지자 찌릿한 쾌감이 강채영의 뇌리를 때렸다. 이어서 조금씩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크고 단단한 손. 땀에 젖은 강렬한 체취. 자신을 정복할 듯 몰아붙이던 강력한 파워.

이 조그마한 손으로는 결코 그 때의 감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도구를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질적인 감각의 차이에 더욱 고통만 느낄 뿐이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이래서 타락한 애들이 미친 짓을 해서라도 몬스터를 찾고 그러는 건가?”

강채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중얼거렸다.

오늘처럼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성욕이 폭발하는 날에는 몸이 뒤틀리다 못해 정신이 이상해질 지경이었다.

애당초 처음부터 민국의 것을 몰랐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맺은 인연과 함께 그의 손짓에 녹아버린 채영은 아직도 민국과의 잠자리가 기억에 생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국을 만나지 않는 지금의 시간이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때문에 이런 채영의 불만은 전부 원망으로 변해 민국에게 향하고 있었다.

“나쁜 새끼. 내가 좋다고 말해놓고서는…. 분명 다른 여자랑 뒹굴고 있겠지?”

채영의 눈이 핸드폰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연락이 없는 게 틀림없었다.

괜히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결국 누워있던 채영이 몸을 일으켰다. 격한 운동을 해서라도 머리를 식혀야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그녀의 핸드폰에 불빛이 들어왔다.

“어?!”

화들짝 놀라는 것과 함께 채영의 손이 핸드폰으로 향했다. 묘한 기대감이 얼굴에 잔뜩 담긴 모습이었다.

그리고 핸드폰의 내용을 확인한 채영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 번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핸드폰에 있는 3 번을 꾸욱 눌렀다.

[어? 강채영. 무슨 일이야?]

단축번호가 연결되면서 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나 오늘 휴가 낼게.”

[뭐?! 야! 너는 왜 그걸 지금…!]

수화기 너머로 메모리아 공격대장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그녀의 불만을 한 귀로 흘린 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중요한 약속이 생겼어. 이거 내 미래가 걸린 일이야.”

[뭐래? 이 미친년아?! 나보고 스케줄을 어떻게 하라고! 왜 하필 펑크를 내도 지금 펑크를 내는 건데!!!]

* * *

눈앞의 여성을 보며 현아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의 영웅, 딜러 랭킹 1위, 메모리아의 핵폭탄 이외 눈앞의 여성을 가리키는 다양한 별명과 수식어들이 그녀의 머리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국내에서 활동을 하는 대다수의 영웅들에게는 선배이기도 한 그녀는 메모리아의 강채영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영웅의 시선이 현아에게 향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지금 한민국 영웅하고 같이 살고 있다는 거지?”

“네. 영웅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살았으니까…. 이제 2 년 정도 된 것 같아요.”

“흐음.”

현아의 대답에 강채영의 뺨이 미세하게 실룩였다.

왜 한민국은 그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할 필요가 없던 것일까?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나랑 민국이의 사이는 어떻게 알았는데?”

강채영의 눈동자에서 묘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살짝 화가 난 것 같은 그녀의 반응에 현아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강채영의 이런 태도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영웅학교에서 여자 동기들이 많이 보이던 반응들이었다.

“베트남에서 민국이가 말해줬어요. 그리고 우리 공격대 소속의 영웅이라면 민국이하고 선배님 사이가 좋다는 것 정도는 다 알고 있어요. 전에 저희들을 도와주시기도 했잖아요?”

“그, 그래? 민국이가 그런 말을 했어?”

현아의 대답에 채영이 눈동자에서 기운이 황급히 사라졌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 빛내는 모습이었다.

“또 다른 말은?”

“뛰어난 실력의 영웅이다?”

“그리고?”

“예쁘고 아름답다?”

“아니, 걔는 왜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는 직접 안 하고…”

강채영이 뺨을 붉게 물든 채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강채영의 반응에 현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지어낸 말인데도 불구하고 강채영의 반응이 제법 격렬했다. 그만큼 민국에게 관심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 당연한 반응인건가?

‘과연 이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강채영이 R’s 가 아닌 메모리아 클랜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의 공격대 스케줄이 굉장히 빡빡하다는 점 그리고 나이가 많은 점을 비롯해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면 강채영은 현아가 원하는 파트너의 조건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뭐, 강채영과 민국의 사이가 조금 좋아지기야 하겠다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어차피 같은 클랜과 공격대가 아닌 이상 엄청나게 자주 만날 일도 없을 테고. 서로의 사이가 일정 선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 방해를 하면 그만이었다. 아니면 장기 스케줄로 원정을 나가던가.

확산 현상처럼 원정을 나가게 되면 강채영과 민국의 거리는 멀어지지만 같은 공격대인 자신은 언제까지나 민국과 함께할 수 있었다.

일단은 자신의 컨디션 관리와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민국의 파트너가 되어줄 여자가 무조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선배님. 제가 말씀 드린 거 말인데요.”

“그래. 함께 동거하자는 거 말이지?”

강채영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현아에게 향했다.

“그런데 너는 내가 들어오게 되면 불편하지 않아?”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선배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영광이죠. 어둠의 괴물들과 여러 전투를 경험했던 선배님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사실 제가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저를 위해서기도 하거든요.”

“무슨 말이야?”

“…밤마다 너무 힘들어서요.”

솔직한 현아의 말에 채영이 움찔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복에 겹다 못해서 넘치는 말에 괜히 화까지 났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얼마나 힘들었기에 자신에게 이런 사실을 말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기야….’

한민국의 엄청난 체력과 스킬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일반 남자는커녕 남자 영웅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짐승 같은 놈이었다.

게다가 몇 번 만나자마자 하늘같은 영웅 선배인 자신의 엉덩이를 주물럭대던 그 놈의 손버릇과 짐승같은 성욕 생각하면….

강채영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런 성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연락 한 통 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후, 채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언제부터 들어가면 되는 건데?”

그런 강채영의 말에 현아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성공이었다.

“언제든지 들어오시면 돼요. 그런데…. 집이 그렇게 크지는 않아서요. 70 평?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상관없어. 던전 내에서도 잘도 자는데, 잠만 제대로 잘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역시 선배님."

“게다가 나는 짐 같은 것도 별로 없어. 하지만 메모리아의 계약도 있으니 일주일 내로 정리해서 다시 연락 줄게.”

강채영의 말에 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굵직한 볼일이 끝나자 다른 이야기로 화제가 변경되었다. 영웅답게 던전이나 서로의 스케줄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었다.

“너희들 이제 【A】 난이도의 공략에 들어간다며?”

“네? 아, 아직 모르시겠구나. 그제 【A - 9】 던전의 공략 끝냈어요.”

“…빠르네. 확실히 민국이의 리딩이 조금 특별하기는 하지.”

민국의 리딩을 떠올리며 강채영의 핑크빛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재능이라면 재능일까? 영웅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가 해낼 수 있는 리딩은 확실히 아니었다.

“진짜 이러다가 어둠과의 전쟁이 끝나는 거 아닌지 몰라?”

GGW 공격대의 엄청난 성장 속도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어둠 괴물과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영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지만. 한민국과 같은 임팩트를 보이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채영의 눈동자가 현아에게 향했다.

“아, 물론 너희들의 기량이 대단하니까 민국이가 제대로 활약할 수 있는 거기도 하겠다만.”

공대장의 리딩이 뛰어나도 그런 공대장의 지시를 수행하는 것은 팀원이었다. 그런 실력의 영웅이 돕지 않으면 레이드는 결코 성공시킬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R’s 클랜의 GGW 공격대는 비슷한 수준의 떡잎이 괜찮은 이들만 모여 있었다.

“아, 타냐는 어때?”

GGW 공격대의 멤버들을 떠올리던 채영이 미소와 함께 물었다.

타냐 루스. 현재 GGW 공격대에서 부 탱커를 맡고 있는 그녀는 R’s 클랜에 임대로 온 영웅이었다. 그리고 타냐 루스에 대한 권리는 메모리아 클랜이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가 배출한 유망주답게 대단하죠. 트라이를 할 때 마다 타냐를 보면서 많이 배워요. 민국이도 타냐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는 것 같고요.”

“잘하고 있나 보네.”

강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냐는 러시아의 초특급 유망주였다. 러시아의 강력한 영웅 전력을 생각하면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렇게 두 여자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함께 살게 될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서로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서로 살면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하면 둘 중 한 명은 민국이의 옆을 떠나야 했다.

* * *

“…뭐라고?”

“응, 그렇게 이야기가 됐어. 잠깐만.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온 현아가 하는 말에 태블릿으로 공략 영상을 보고 있던 민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거인이 한 명 더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적은 있었다. 그랬는데….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느낌이었다.

“강채영이 이 집에 들어온다고? 왜?”

물론, 그녀가 생활할 공간은 충분히 있었다. 불편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강채영은 R’s가 아닌 메모리아 클랜의 영웅이었다. 이 집에서 함께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현아와 강채영이 친했던가?’

잠시 고민을 하던 민국은 곧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존경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건 기억나지만….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왜지? 동거인이라면 유나나 정예린이 더 편하지 않나? 함께 살면서 강채영의 레이드 경험을 배우려는 건가?”

여러 가지 가정이 떠올랐지만 확실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외출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현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왜 하필 강채영 영웅이야?”

민국의 질문에 현아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마치 민국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라? 그리고 너도 어느 정도 친한 사이잖아. 설마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어쨌든 그래서 한 번 여쭤봤는데,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 그리고 강채영이 뭐야? 채영 선배라고 해야지.”

“어, 그래. 그런데 클랜에서 뭐라고 안 할까? 채영 선배는 메모리아 클랜이잖아.”

“기숙사도 아닌데 뭐 어때?”

대수롭지 않은 현아의 반응에 민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쨌든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다. 현아와 둘이서 사는 집에 새로운 사람이 끼어들게 되는 셈이니 말했다.

그래도 강채영이라면 베트남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낸 적도 있는 영웅.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너는 괜찮아? 안 불편해?”

갑작스러운 민국의 질문에 현아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우우우우웅!!!

둘의 핸드폰이 동시에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민국과 현아의 시선이 서로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핸드폰의 내용을 확인했다.

[중국 허베이 성의 청더시 부근에서 【A - 7】 난이도의 던전 폭발 확인. 현재 확산 현상 진행 중.]

메시지를 확인한 두 남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던전 브레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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