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3 제국근위대
가아아악! 가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하피의 울음소리가 ‘가라이의 전진 기지’의 아침을 알렸다. 잠시 후, 자신의 옥좌에서 쉬고 있던 가라이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오늘도 조용한 밤이었군.”
눈을 뜬 그의 목소리에는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일꾼으로 부리는 괴물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자신의 전진 기지가 완성이 되어가는 모습이었지만 오늘도 인간들의 도발은 없었다. 아니, 그 때 이후로는 그 누구도 던전에 진입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던 인간들과의 전쟁을 생각하면 이는 가라이로서도 조금은 의외인 결과였다.
‘그만큼 며칠 전에 물리쳤던 인간 영웅들이 제법 지위가 높았던 것이겠지.’
파란색, 흰색,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삼색기를 가슴에 단 그녀들은 확실히 범상치 않았던 실력을 지닌 무리들이었다.
게다가 그가 모시고 있는 가루다와 손을 잡은 바이콘의 난동 역시 인간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다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던전이 지금처럼 잠잠할 리 없었다.
분명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들의 실력자들이 자신의 던전으로 쳐들어 왔을 게 틀림없었다.
“뭐, 조금 심심한 것을 제외하면….”
어쨌든 돌아가는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전진 기지가 완성이 되고, 마력진이 발동하면 가루다님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감옥과도 다름없는 이 세계를 뚫고 인간들의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인간계에 공허의 대지를 넓히고, 더 많은 임시 던전의 마력진을 발동시키는 것.
다시 말해 인간계에 존재한 마력을 공허의 세계와 비슷한 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을 비롯해 십이 재앙인 가루다님이 던전이라 불리는 감옥이 아닌 인간 세계에서 본신의 힘을 지닌 채 현현할 수 있었다.
‘그러면 길었던 이 전쟁도 끝이겠지.’
그리고 전쟁의 수훈은 가루다님과 새의 종족이 가지고 갈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손맛은 조금 보고 싶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인질이라도 잡아 놓을 걸 그랬나?”
가라이는 며칠 전, 자신에게 범해졌던 인간 영웅을 떠올렸다.
마력을 사용하는 인간들 중에서도 제법 실력이 있었던 무리들. 그리고 자신이 범한 이는 그 무리의 지휘관 격인 영웅이었다.
덕분에 그녀가 범해지는 모습을 보며 당황과 좌절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던 인간들의 꼴을 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었다.
“흐으….”
공허의 마력에 오염되며 타락한 인간 영웅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절로 하체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몬스터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있는 던전으로 오면 좋을텐데 말이야.”
하지만 인간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으니 자신에 의해 타락한 인간 또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 방도가 없었다.
어쨌든 이 전진기지에는 가라이가 범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하피 여성체가 있기는 했지만, 네임드가 아닌 일반 괴물은 그의 힘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자신의 성기를 찔러 넣는 순간 밀려오는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게 분명했다.
“쩌업.”
성욕을 참기 위해 가라이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던전에 갇혀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닷새 뒤, 바라노라스의 전진기지가 완성이 되고 공허의 대지가 인간의 세계로 퍼져나가면 자신 역시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 전에라도 인간 무리들이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내면 좋겠는데.”
그렇다면 저번처럼 쉽사리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 자신이 인간들의 세계로 현현할 때까지 질리도록 범해줄 작정이었다. 그리고
가루다의 심복이자 다름없는 그는 그럴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런 자신을 노리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걸 가라이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
“드디어…!”
눈앞에 놓은 블루급 정신력의 결정을 보며 민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민국의 영웅 패드 또한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마력의 결정만 흡수하면 7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패드의 알림뿐 아니라 민국이 받는 느낌도 그랬다.
그리고 정신력을 결정을 흡수한 순간 민국의 몸에 마력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성급 상승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광경이었다.
“와…. 진짜로 해냈네.”
“이거 신기록 아니에요? 도대체 며칠 만에 6성을 7성으로 만든 거지?”
그런 민국의 모습을 보며 제국근위대 멤버들은 하나같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버스를 태워주기로 한 그녀들조차도 반신반의했던 일이었다. 심지어 버스 승객이 공대장이었다. 제대로 버스를 태워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영웅답게 민국의 능력은 제국근위대를 리딩을 함에 있어 아무런 모자람이 없었다. 오히려 기존의 공대장이었던 셀레스보다도 더욱 리딩을 잘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육일 걸렸어. 아무리 우리들이 버스를 태웠다 해도….”
“솔직히 공대장이 한민국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버스라고 해도 바퀴 세 개는 없어진 버스였죠. 버스 기사가 승객 명령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아무튼 리딩 능력은 진짜 대단해. 어떻게 저게 2년차 영웅이지?”
“전에 딜러장님이 혼잣말로 했던 거 못 들었어? 인생 2회 차일지도 모른다고 하잖아?”
“…그거 가능성 있는데?”
성급 상승이 시작된 민국을 보며 제국근위대의 영웅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자신들의 공대장이었던 셀레스를 타락시킨 새 머리의 괴물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기대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력의 번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한순간에 잠잠했다. 민국의 성급 상승이 끝난 것이다.
“축하해, 이제 7성 영웅이네?”
민국을 향해 클로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전과 비교해 외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민국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남자 영웅이 7성이라니…. 기네스북 감일거야.”
“하하, 아직 멀었어요. 이제 고작 7성인데요. 갈 길이 멀어요.”
“정말…. 그렇게 말하는 남자 영웅은 너 뿐일 걸? 아무튼 장비는 전부 준비된 상황이야. 999의 스코어는 아니지만 970 수준으로 맞춰놨어.”
그 중 세 부위는 베트남 정부와 영웅 협회에서 지원한 장비였다.
덕분에 영웅 장비의 구입에 굉장한 돈을 써야 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호아빈의 확산 현상을 막아내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다.
“호아빈으로 바로 가야겠네요. 시간이 얼마 없죠?”
“나흘 정도.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여유를 부릴 정도는 아니지.”
가라이라는 괴물을 제외하더라도 던전에 있던 괴물들은 전부 【A - 1】에서 【A - 4】 난이도의 던전에서 만날 수 있는 8등급 수준의 괴물.
제국근위대의 공략이 대략 일주일 전쯤에 이뤄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괴물들도 던전의 힘에 의해 다시 되살아났을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민국이 클로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가 제국근위대의 영웅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면 전 공대장의 복수를 하러 가도록 하죠. 빨리 때려잡고 쉽시다.”
“전 공대장? 그러면 앞으로는 한민국 공대장이 제국근위대를 지휘하는 건가?”
민국의 말에 브리짓이 장난삼아 말했고, 이어서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브리짓 너 셀레스 언니에게 다 이를 거임. 언니, 지금 호아빈에 있는 거 알지?”
다들 자신들에게 패배를 안겨다주었던 새 머리의 괴물을 다시 공략하러 간다는 사실이 기쁜 것인지 떠들썩한 모습이었다.
* * *
“어떻게든 몬스터만 물리쳐 주신다면…. 저희 베트남은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민국과 제국근위대의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에 베트남 정부와 영웅 협회의 사람이 바로 찾아왔다. 이미 공항에는 호위 전투기와 비행기가 준비 중에 있었고, 영웅들의 탑승이 끝나면 바로 날아오를 예정이었다.
‘스펙이 나쁘지 않은데?’
베트남 정부가 준비한 장비는 중상급 수준이라 할 수 있는 장비였다.
나쁘지 않은 수준에 귀속 아이템도 아닌 만큼 장비를 구하느라 고생 꽤나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민국이 장비를 귀속시키는 동안 제국근위대의 영웅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태국의 던전을 공략하느라 부서진 장비들을 수리하는 한 편, 가라이와의 전투를 떠올리면서 그에 대한 내용을 민국에게 말해줘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주시 공격만큼은 조심해야 돼.”
“맞아. 셀레스 공대장님도 그것에 당했어. 거리가 제법 있었는데, 그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서 공격을 하더라고.”
“피할 수 없는 수준이었나요?”
브리짓의 말에 민국이 되물었다. 만약 그런 공격이라면 보호막 스킬은 무조건 아껴놔야 했다. 하지만 그런 민국의 질문에 브리짓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아. 나도 그렇고 클로에 선배님도 피했던 공격이었어.”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는 해야겠네요. 다른 패턴은요?”
“아?! 그 사방으로 깃털을 날리는 공격도 있었지?”
“젠장…. 그건 진짜 쓰레기 같은 공격이었어.”
누군가의 말에 공격대의 서브 탱커인 디얀이 생각을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보아하니 제국근위대를 제법 곤란하게 만들었던 패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디얀의 말은 살짝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국 그것을 뚫지 못해서 계속해서 전멸했지. 클래스에 관계없이 괴물에게 접근을 할 수가 없더라고.”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녀의 말에 민국은 눈을 깜빡였다.
그렇다면 공격은? 원거리 딜러들만 공격을 하고 나머지는 일정 시간 동안 버텨야 하는 패턴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민국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탱커나 딜러나 접근만 하면 깃털 세례가 쏟아졌지. 영웅의 기합을 사용하고 힐러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버틸 수가 없는 공격이었어.”
“으음….”
디얀의 말을 들으며 민국은 고개를 주억였다.
제국근위대의 스펙을 생각하면 가라이의 깃털 세례는 탱커와 근거리 딜러들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패턴인 게 분명했다.
“그러면 가라이는요? 그 놈은 움직였나요?”
“아니,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아. 하지만 사방으로 흩뿌린 깃털들을 던져서 어그로가 잡힌 메인 탱커를 공격하더라고.”
“데미지는요?”
“그건…. 어느 정도 버틸 만 했어.”
“그런데 메인 탱커가 접근하면 수많은 깃털들이 날아와 메인 탱커를 죽이고요?”
“아마 그랬던 것 같지?”
제국근위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민국은 계속해서 가라이의 맞춤 전술을 구성해 나갔다.
원래는 몸으로 직접 얻어맞아가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들이지만, 다행히 제국근위대가 가라이를 트라이 한 횟수가 적지 않아 기억하고 있는 패턴이 굉장히 많았다. 이미 어떤 식으로 공략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때문에 민국은 전술을 짜는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실전에서는 무수한 시행착오가 벌어지겠지만….
“중요한 것은 가라이 놈이 저번처럼 함정을 팔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우리도 알아. 저번처럼 멍청하게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바로 목숨을 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얼핏 들으면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잠깐의 고통과 두려움을 감당하는 게 어둠의 괴물에게 타락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행여나 여기서 누군가가 타락하기라도 한다면 베트남은 정말로 끝장이었다. 이제는 준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렇게 최종검점을 끝낸 민국과 제국근위대는 가라이가 있는 던전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 전에도 말했지만 전리품 상자에서 나오는 물품 중 클래스 스톤은 제겁니다?”
“걱정하지 마. 그 놈만 쓰러뜨릴 수 있다면 전리품 상자 너 다 가져도 돼.”
뜬금없는 민국의 말에 클로에가 그의 등을 살짝 때리며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 전리품 상자가 대수일까라는 반응이었다.
‘전리품 상자를 확인하면 배가 조금 아프실텐데?’
당연하지만 클로에는 가라이의 전리품 상자에 위그드라실이라는 레전드리 클래스 스톤과 장비 선택이 가능한 다이아 티켓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 그리고 공략이 끝나면 셀레스 공대장을 만나게 해주는 것도 잊지 말고요.”
가라이에게 타락한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셀레스와도 관계를 가져야 했다.
생각해보면….
이번 일이 끝나면 제법 고달파 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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