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웅 소녀 전쟁-195화 (195/486)

EP.195 가라이 레이드

“장난감들이 나타났군.”

가라이의 권태로운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전진 기지에 도착한 이후 그는 한 번의 전투를 제외하면 인간들에게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었다. 때문에 인간계로 침공할 준비는 순조롭게 이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생각보다도 더 잠잠한 인간들의 행보에 가라이는 인간들이 자신들과의 전쟁을 포기하고 멸망의 운명에 순응했나 싶은 생각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와 함께 요새에 있는 녀석들 중 그나마 쓸 만 했던 괴물의 마력이 사라진 것을 보아하면 말이다.

- 가, 강력한 인간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전진 기지의 공사를 맡은 지휘관 격의 괴물이 다급하게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가라이는 괴물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인간 놈들은 이 요새를 어찌할 수 없어.”

가라이의 광오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그리고 가라이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어둠 괴물들의 정점에 있는 십이 재앙. 그들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바로 가라이였다. 그리고 가라이가 살아있는 이상 이 전진 기지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인간들의 공격에 어느 정도 파괴가 되기는 하겠다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감옥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를 무너뜨리는 마력진은 자신을 쓰러뜨려야만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마력진은 곧 있으면 발동이 될 예정.

그렇게 되면 부활석이라는 카오스의 힘을 사용해서 되살아나 반복해서 던전으로 진입하는 인간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아무리 되살아난다 하더라도 인간계에서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을테니 말이다.

“어쨌든 나름 정예를 준비해서 온 모양이겠지만….”

이는 인간들의 헛된 행동에 불과하리라. 그렇게 인간들을 기다리며 가라이는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민국은 계속해서 요새의 길을 뚫어나갔다.

네임드라 불리는 괴물의 공격 패턴에 대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공략 시뮬레이션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을 했었고,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것도 딱히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휴식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은 민국의 리딩에도 실수를 만들어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몇몇 팀원들의 부주의한 움직임은 공든 탑을 무너뜨리듯 레이드의 실패로 이어졌다.

그렇게 제국근위대는 몇 번의 부활석을 사용하고 나서야 가라이의 옥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던전에 진입한 지는 정확히 8시간이 조금 넘어 있었다.

“몇 번이나 트라이 할 수 있을까?”

“남은 시간은요?”

그렇게 가라이의 옥좌를 앞에 둔 상황에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클로에를 향해 민국이 다시 물었다.

전투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면 두 번 정도 트라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얼핏 트라이 기회가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적에 대해 정보가 별로 없다는 점. 그리고 공대원들이 가라이의 패턴에 익숙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유로운 것은 절대 아니었다. 더욱이 시간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상대는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한 괴물이었다.

‘게다가….’

자신 역시 가라이의 패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옥좌를 지키고 있는 이 던전의 마지막 보스는 민국이 지금까지 만났던 상대 중 가장 강력한 녀석이었다. 하물며 일반적인 괴물도 아니었다. 가라이는 바라노라스의 상급자이자 가루다의 심복이라 불리는 놈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게 분명했다.

“73시간.”

“…왜 또 늘어난 거지?”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대답에 민국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은 시간이 71시간이었을 때 던전에 진입해 여덟 시간을 소모했다. 그렇다면 못해도 63시간 정도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던전 타이머는 오히려 전보다 시간이 늘어 있었다.

“우리가 요새의 시설을 파괴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잠시 고민을 하던 브리짓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견은 곧 누군가에게 반박을 당했다.

“그렇게 따지면 던전의 구조물들을 박살내면 던전 타이머가 늘어나는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지만 브리짓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이 던전은 우리들이 없는 사이 오히려 구조물들이 생겨났잖아?”

“맞아요. 갑자기 던전 타이머가 줄어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희들의 파괴 행위가 던전 타이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요?”

“네임드를 잡아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

여러 의견들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정답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조금이나마 가라이를 트라이 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었다.

“브리핑부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리핑이라고 해봤자 정보가 많지 않았기에 공대원들에게 설명을 해 줄 것도 없었다.

오히려 전투 경험은 제국근위대 멤버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민국은 틀린 문제를 복습하듯 꼼꼼하게 가라이의 패턴과 그에 맞춘 자신의 대처 방법들을 팀원들에게 설명해 나갔다.

어차피 전투 중 생기는 문제점은 트라이가 이어질 때 마다 수정해 나갈 예정이었다.

“그러면 트라이 들어가겠습니다.”

“후…. 어디 잡아보자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클로에가 기합을 넣듯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편안히 쉬고 계실 전 공대장님의 복수!”

“브리짓, 셀레스 아직 안 죽었거든?”

다른 영웅들도 전의를 다지며 전투를 준비했다. 남은 시간은 길어 봤자 2, 3일. 이 안에 베트남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트라이가 시작되었다.

“장난감들이 찾아왔군!”

만나자마자 재수 없는 말을 내뱉는 가라이를 향해 제국근위대가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포지션부터 잡습니다!”

도발 능력을 사용한 탱커가 가라이의 시선을 붙잡았고, 그 틈을 이용해 딜러들이 측면과 후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힐러들이 사이사이 자리를 잡았다.

일종의 포위 형태로 짠 포지션으로 민국이 가라이의 공격을 위해 생각해 낸 것이었다.

‘이런 식의 진영이면….’

공대원 중 그 누구라도 두 명 이상의 힐러의 힐 사거리에 들어올 수 있었고, 가라이의 주시 공격에도 쉽게 대응할 수 있었다.

제국근위대의 말에 의하면 가라이의 주시 공격은 가라이의 시선이 닿는 방향으로 이뤄지는 식이었다.

“크하하하! 가소롭구나!”

새 머리를 지닌 괴물의 주먹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강력한 힘이 실린 펀치였다. 그러나 제국근위대의 메인 탱커 역시 만만한 여성은 아니었다.

콰아앙!

주먹과 방패가 부딪쳤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소리가 전장에 울렸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탱커와 가라이의 공방이 이어졌다.

콰앙! 쾅!

커다란 충격음이 들릴 때 마다 메인 탱커의 생명력이 뭉텅뭉텅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힐러들이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현아가 바라노라스를 상대할 때보다도 훨씬 안정적이었다.

‘육체적인 스펙은 8성에 가깝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제국근위대가 했던 그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트라이에 실패했다는 것은 그만큼 가라이의 특수 능력이 꽤나 위협적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오히려 그게 편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트라이 경험들이 몸과 머릿속에 배어 있는 만큼 지금의 상황에서는 깡 스펙으로 밀어붙이는 놈들 보다는 복잡한 패턴을 지니고 있어 전술적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녀석들이 오히려 상대하기가 쉬웠다.

민국이 당장 부족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 적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는 스펙이었으니까. 그리고 가라이는 후자에 속하는 놈이었다.

“왼쪽의 근접 딜러들은 조금 더 거리 벌리세요.”

“굳이 적의 공격 범위내로 진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리하지 마요!”

“메인 탱커 힐!”

첫 번째 트라이지만 민국은 침착하게 트라이를 진행해 나갔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경험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기에 긴장으로 몸이 굳거나 행동이 꼬이는 일은 없었다.

가라이 역시 도발 능력을 사용하는 탱커가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마력이라 생각하고는 메인 탱커만을 공격하는 모습이었다.

중간 중간 눈동자를 굴리면서 전장을 살피는 게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흠!”

그러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메인 탱커를 공격하던 가라이가 자신의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민국의 위험 본능이 최고조에 달했다. 저 괴물은 분명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순간적으로 가라이의 패턴 하나가 민국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 이게 말로만 듣던 주시 공격인 모양이었다.

이어서 민국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는 순간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쇄도를 한 가라이가 자신의 주먹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그리고 괴물의 주먹은 민국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이라도 늦게 반응했으면 제대로 한 대 얻어맞았을 공격이었다. 하지만 가라이의 공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민국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달립니다!”

코에서 느껴지는 아릿함 통증을 무시하며 민국이 반시계 방향으로 전장을 크게 돌기 시작했다.

뒤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가라이 놈이 자신을 후려치기 위해 따라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민국과 가라이의 추격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민국을 잡을 수 없다고 여긴 것인지 가라이가 다시 메인 탱커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포지션으로 돌아온 민국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주시 공격이 생각보다 빠르네요. 이거 집중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는데요?”

"…그래도 잘 피했던데?”

제국근위대의 힐러 중 한 명인 레아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던 공격이었는데, 남자인 민국이 그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 것이었다. 마치 서로 합을 맞추고 싸우는 영화 장면과도 흡사했던 광경이었다.

“운이 좋았어요.”

“운도 실력이야. 그리고 피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 아니겠어? 우리 전 공대장은 그것을 못 피해서 영웅 인생이 끝장났는데.”

힐러의 말에 민국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영웅 인생이 끝장났다니…. 조금 이른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셀레스를 마력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은 눈앞의 괴물을 쓰러뜨리고 나서일 테지만.

“브리짓 주시 조심!!!”

“우왓?!”

“레아! 당신을 보고 있어요!”

가라이의 주시 공격을 한 번 경험한 이후 민국은 어렵지 않게 가라이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다. 보스 몬스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쯤은 모바일 가상현실로 단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팀원들이 가라이의 공격을 피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딜러들이야 문제없이 공격을 피하는 모습이지만, 반사 신경이 살짝 떨어지는 힐러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뛰어요!”

하지만 힐러들 역시 연계로 이어지는 공격에 얻어맞고 죽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힐러들이 사용하는 회복 마법은 죽음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탱커 도발! 디버프 관리 안 해요?! 디얀 집중합시다!”

몇몇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협적인 공격인 가라이의 주시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순조롭게 전투를 이어나가던 도중이었다.

촤라라락!

메인 탱커를 향해 주먹을 날리던 가라이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자신의 날개를 활짝 폈다. 그와 동시에 가라이의 커다란 깃털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건…!’

언젠가 디얀이 말했던 가라이의 쓰레기 같은 공격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패턴은 가라이의 주위로 접근하는 모든 영웅들을 죽음을 몰아넣었다.

“모두 후퇴!!!”

아니나 다를까 민국의 지시가 끝나기도 전에 다들 몸을 뒤로 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가 있었다.

“꺄아아악!!!”

팀원들을 지켜야 하는 탱커의 본능. 그 본능으로 인해 메인 탱커가 깃털의 사정거리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깃털 세례를 몸으로 받아냈던 메인 탱커가 바로 사망하는 것을 보며 민국은 지체 없이 전멸 사인을 내렸다.

그래도 소득이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일단 주시 공격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깃털 패턴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들은 것보다도 위력이 더 강해 보였다.

‘탱커조차 저렇게 죽을 정도면….’

저건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이 아니었다.

스펙의 차이가 크게 난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제국근위대는 다들 8성 영웅이었고, 장비 역시 최상위 수준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뿌우의 말에 의하면 가라이는 9성 어둠의 괴물. 더욱이 스펙은 8성 정도로 추정되는 지략형이라 할 수 있는 놈이었다.

그런 것들을 감안하면 가라이의 깃털 공격은 분명 다른 식으로 공략을 해야 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민국은 가라이의 공략을 위한 정보를 하나하나씩 습득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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