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5 재미있는 방송 촬영
“…어, 그, 그런가요?”
생각 이상으로 쎈 민국의 멘트에 수아가 얼 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보통 얼굴에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괄괄한 성격의 여성 영웅들에게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가 잘생긴 남자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혹시 대본대로 이야기하는 건가? 아니, 대본이면 PD 년 미친 거 아니야? 한민국이 어떤 영웅인데 이미지를 이 따위로?’
그녀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PD와 메인 작가에게 향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둘의 모습을 보고 수아는 조금 전 민국의 멘트가 대본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스튜디오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민국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행여나 취미로 영웅 생활을 하는 거라면 저런 모습을 보여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게임처럼 탱커, 딜러, 힐러가 우르르 몰려가서 몬스터와 투닥투닥 거리면 뭐든지 답이 나오긴 할 겁니다. 몬스터를 잡거나 내가 죽거나.”
“그, 그렇겠죠?”
“맞아요. 영상에 나온 이 분들은 영웅이지 게임을 즐기는 게 아닙니다. 사실 던전 공략을 준비했다는 모습이 거의 안 느껴지기는 하네요. 한민국 영웅님은 그 점을 지적하고 싶으신 것 같아요.”
현직 영웅답게 한다미가 민국의 말에 공감하는 의견을 내었다.
“비슷합니다. 만약 부활석이 없었더라면 분명 저들은 던전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겁니다. 아니면 죽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얻거나요.”
“죽는 것보다 더 큰 상처? 그런 게 있나요?”
“어허! 선우씨. 영웅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그거 몰라요?”
“…네? 영웅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그거요?”
“아,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어쨌든 그런 게 있어요.”
아무것도 모른 척 고개를 갸웃하는 남성 패널인 최선우의 향동에 한다미를 비롯한 여성 패널들이 얼굴로 답답한 감정을 나타났다.
워킹 걸을 말하려는 것 같은데 성적인 내용이 강하게 느껴져서 인지 남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뭐, 전부 대본이겠지만 어쨌든 이 프로그램에서 최선우의 역할이 약간 그런 내용인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남동생.
잠시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기는 했지만 민국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요즘 부활석 시세가 얼마였죠? 만 달러였던가요? 트라이 시간이 십 분 정도 된 거 같으니…. 네. 일반인의 연봉이 십 분 만에 날아갔네요.”
“그래도 영웅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린 거라 생각하면….”
“아까운 돈은 아니죠. 하지만 저들은 더욱 효율적으로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어요.”
모두의 눈이 민국에게 향했다.
멘트가 강하기는 했지만 사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불만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영웅들이 사용하는 부활석은 정부와 영웅 협회의 지원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돈은 전부 일반인들의 세금이었다.
프로 클랜이라면 그나마 그런 불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리바이벌 팀을 운영하며 자체적으로 본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부활석을 수급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던전의 공략이 시작되면 하루에만 부활석 백여 개 이상을 사용하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일단 제가 본 문제점들을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차적으로 경험적인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먼저 저 다섯 분은 본인들의 포지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민국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상의 가장 큰 문제점이 그거였다. 파티가 파티같지 않다는 것.
“포지션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가요?”
“어…. 조금 답답한 모습은 있었지만 전투 부분에서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는데요?”
하지만 의외로 지원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패널들의 반응에 민국은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 벌려야 했다.
‘뭐지? 이상하다는 것은 나만 느낀 건가?’
다들 레이드와 관련해서 전문가적인 지식을 지닌 베테랑이라고 들었는데 잘 못 들었나 싶은 생각이었다.
아니면 생각의 기준이 다른 건가 싶은 의문도 들었다. 영웅 학교의 지식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저건 아니었다.
“어, 음….”
“어, 한민국 영웅님이 우리 패널들의 레이드 지식에 굉장한 충격을 받으신 모양인데요?”
“이, 이거 방송에 나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들의 빈약한 지식이 모조리 폭로되는 거잖아요?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의 진정성에 큰 의문을 가질 수도…!”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벌어졌고, 잠시 후 분위기를 진정시킨 수아가 민국에게 물었다.
민국이 어둠 괴물과의 전쟁에서 보인 활약을 생각하면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닐 게 분명했다.
프로그램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한다미가 있다지만 한민국은 그녀보다도 훨씬 실력이 뛰어난 영웅이었다. 그것도 공격대를 이끄는 공대장이었다.
“그렇다면 한민국 영웅님이 보셨던 이 분들의 포지션 문제.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가요?”
“일단 탱커 분은 시야가 굉장히 좁습니다. 탱커는 먼저 아군 특히 힐러의 보호가 주된 임무입니다. 상황에 따라 딜러를 보호할 때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이 분은 눈앞의 몬스터만 상대할 뿐 다른 몬스터들에게는 시선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파티 플레이를 하는 데 있어 탱커의 임무를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저렇게 싸울 거면 그냥 혼자 싸워야죠.”
탱커를 시작으로 민국은 차근차근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이야기해 나갔다.
어그로 관리를 전혀 못하는 딜러, 위치 선정 실패와 제대로 스킬을 활용하지 못하는 힐러. 그렇게 개개인의 문제점을 지적한 다음에는 레이드에서 보여줬던 형편없는 모습들 또한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단 이 괴물은 언데드를 불러내는 소환형 네임드입니다. 여기서 탱커의 역할은 간단합니다. 네임드와 소환된 괴물의 어그로를 나타나는 대로 붙잡으면 됩니다.”
그리고 딜러들의 공격에 부하가 쓰러지면 시체가 폭발하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탱커의 움직임을 보세요. 네임드랑 일기토를 벌이고 있죠? 본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는 겁니다. 솔직히 이 정도 쯤은 영웅학교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눈앞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쏠렸을 뿐, 팀원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보지 못하고 있어요.”
“딜러들도 문제예요. 일단 레이드의 기본인 어그로 관리를 전혀 못 하고 있어요. 사실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탱커가 어그로를 잡지 못하면 드리블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런 개념도 없습니다. 아니면 탱커에게 욕이라도 했어야죠. 파티 플레이의 기본이 뭡니까? 협력입니다.”
“힐러 분은 먼저 던전에 대한 공부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밑에 딜러들이 처리한 언데드의 시체가 있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빨리 자리를 피해야죠! 네임드가 어떤 능력을 사용하나요? 시체 폭발이잖아요? 이건 던전에 대한 공부를 하나도 안했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민국의 비판에 출연진들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사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피디와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천재 공대장이라 그런 걸까요? 레이드를 보는 기준이 높기는 하네요.”
메인 작가가 고개를 갸웃하며 PD에게 말했다. 듣고 보니 전부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기준을 모두 만족하는 영웅이라면 저희 프로그램에 나올 이유가 없지 않아요?”
문제는 민국이 말한 것들을 모두 전투에서 보여줄 수준의 영웅이라면 지금까지 1, 2 성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런 것들이 가능하게끔 한민국 영웅이 지금부터 만들어내는 거지. GGW 공격대 몰라?”
“…그 친구들은 전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친구들인데, 지원자들 중에 그런 이들이 있을까요?”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 이번 회 차 목표가 뭐였어? 오늘 실패한 던전의 공략 성공이잖아?”
“그렇죠. 정확히 말하면 라이센스를 딸 정도의 실력자로 만드는 것이죠?”
7년차 영웅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녀조차도 라이센스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남자 영웅이라는 것만으로도 시청률은 보장된 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조금 전에 한민국 영웅이 말했던 것의 반의반이라도 출연진들의 바뀐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만 해도 괜찮은 장면은 수십 개나 뽑아낼 수 있을 걸?”
“아무튼 특급 게스트인 만큼 한민국 영웅이 잘했으면 좋겠네요. 아, 출연자 중에서 험하게 생활 한 사람 있잖아요? 괜찮을까요?”
“신지민? 뭐, 큰 문제가 있을라고. 한민국 영웅 말하는 거 보니 성격 장난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어차피 처음에는 일대일 코칭이잖아. 신지민하고 엮일 일도 없지 않을까?”
PD가 말끝을 흐리며 출연진들과 대화를 나누는 민국을 바라보았다.
“뭐,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신지민하고 한민국하고 안 붙이면 되는 거지. 설마 한민국 영웅이 신지민을 고르겠어? 딜러니까 한다미가 맡지 않을까?”
“그렇겠네요. 한민국 영웅은 힐러니….”
이번 50 회 기념으로 힘겹게 섭외하는 데 성공한 초특급 게스트. 행여나 촬영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한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었다.
* * *
스튜디오에서의 녹화가 끝나고 민국은 출연진들과 함께 코칭을 받은 영웅들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방송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던전이었다.
“와…. 진짜 피부 장난 아니다. 형, 혹시 화장품 같은 거 따로 쓰시는 거 있으세요? 에르뎅께 비싸고 잘 나간다던데 남자 영웅들도 그런 거 써요?”
“아, 아니. 딱히 사용하는 화장품은 없는데요.”
사용하는 화장품이라고는 스킨, 로션이 전부. 그것도 얼굴이 따가울 때 마다 현아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머릿결에 영향을 주는 샴푸 역시 그냥 대충 마트에서 파는 탈모방지용 샴푸를 쓰고 있었다. 이것 역시 현아가 사온 것이었다.
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는 남자 패널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제가 동생이에요.”
촬영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민국에게 가장 많이 말을 건 사람은 바로 유일한 남자 출연진인 최선우였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그는 끊임없이 민국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친한 형만 만나면 팔짱을 끼는 게 버릇이 되어서….”
“하, 하하하.”
심지어 자연스레 팔짱까지 끼려고 한 탓에 민국이 기겁하기까지 했다.
여자면 모를까 남자는 사절이었다. 아무튼 이 세계에서 다른 남자들과 만날 일이 딱히 없던 까닭에 이런 선우의 행동은 민국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런 민국의 반응에 풀이 죽었는지 옆에서 재잘거리며 떠들던 선우는 슬그머니 다른 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제야 민국은 오늘 자신이 코칭을 할 다섯 명의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지민? 뭐지? 좀 놀아본 여자인가?’
PD가 준비한 코칭이 필요한 영웅들의 프로필 사진은 첫 장부터 제법 충격적이었다.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에 컬러렌즈를 꼈는지 눈동자의 색깔이 옅은 푸른색이었다.
거기에 피어싱이 귀를 뒤덮고 있었으며 쇄골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글자로 레터링까지 새겨져 있었다. 그 옆에는 장미 모양의 문신까지.
‘배꼽에도 피어싱에 골반 쪽에 문신이 하나 더 있네? 아니, 이거 노출이 좀 심한 거 아닌가?’
복장 또한 몸에 달라붙는 돌핀 팬츠였다.
사진을 확대하면 갈라진 부위가 그대로 드러나 보일 정도. 당연하지만 영웅답게 몸매는 모델인 지수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
프로필 사진인 만큼 분명 이 모습들이 방송에 적나라하게 나갈 텐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니 수위에 관해서는 기준이 상당히 너그러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남자도 아니고 여자의 이런 모습을 이 세계에서 그리 이상하게 여길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라면 어디까지 허용이 되는 지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그나마 정상적이긴 하네.’
어쨌든 다들 여러 사연들이 있었다.
재능이 부족한 것 같아서, 몬스터가 무서워서, 여러 생활을 전전하다가 갑자기 마력을 각성해서. 그런 이유들 때문에 영웅 학교는 졸업했지만 라이센스를 따지 못한 이들이었다.
당연하지만 R’s 와 같은 대형 클랜은 물론이고, 중소형 클랜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들이었다. 애당초 영웅 라이센스가 없으니 클랜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다른 출연진들의 뒤를 따라가며 민국은 이들의 프로필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방송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던전 앞에는 이미 또 다른 촬영 팀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 회에 출연하는 영웅들의 각오와 같은 멘트를 따는 팀인 모양이었다.
“와아아아아!!!”
“하, 한민국이야! 한민국!”
이미 게스트가 자신이라는 것이 알려졌는지 던전 근처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방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촬영 팀이 있다는 말에 구경을 하러 온 일반인들도 민국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기에 스탭들은 빠르게 시민들을 통제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서야 본격적인 야외 촬영이 시작되었다. 처음은 메인 MC인 수아를 제외한 다섯 명이 코칭을 할 이들을 선택하는 시간이었다.
코칭이 필요한 영웅들의 문제점을 듣고 본인들의 실력 및 인맥을 통해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간을 가지는 식으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한민국 영웅님은 힐러인 홍예나 영웅을 선택하겠죠?”
긴장한 얼굴로 출연진을 바라보는 다섯 명의 초보 영웅을 앞에 두고 유나가 물었다. 민국의 포지션을 생각하면 당연히 보이는 말이긴 했다.
그리고 이는 PD의 은근한 압박 때문이었는데 다섯 명의 영웅 중 힐러인 홍예나가 성격이 가장 괜찮았고 기량 또한 준수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홍예나의 문제는 경제적인 것과 큰 관련이 있었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방송에 나올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한 번쯤 이런 양아치 스타일의 여성하고 친해지고 싶었기는 했지.’
하지만 민국은 이미 마음에 둔 영웅이 있었다.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양아치 누나의 특징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신지민이었다.
전 세계에서 이런 여성들의 공통된 특징은 이쁘고, 꼴리고, 친해지면 잘해주지만 일단 우리랑은 안 사귄다는 특징이 있었다.
“아뇨. 저는 신지민 영웅을 코칭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달랐다. 그리고 민국은 남성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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