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9 그녀의 소원
“나, 은퇴할 생각이야.”
강채영의 말에 커피를 마시려던 민국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래도 놀라서 커피를 뿜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한 번 보자는 말에 가벼운 생각으로 자리에 나왔는데 뭔가 굉장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강채영이 은퇴라고?’
놀라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굉장히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 오른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슬슬 은퇴를 결심해도 이상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강채영이 마력을 각성했던 시기를 생각하면 그녀는 본인의 인생 대부분을 어둠 괴물과의 전장에서 보낸 셈이었다.
마력을 각성하고서부터 일생을 어둠 괴물과의 전쟁으로 보내는 영웅들의 은퇴 연령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인류가 위기의 상황인데 고작 그 나이에 은퇴를 이야기한다는 게 이상하게 들리기는 하겠지만, 영웅들 사이에서는 사명감이나 개인의 행복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나이를 먹어서도 왕성하게 1선에서 활동하는 영웅들도 있기는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상위 던전이라 불리는 【A - 5】 난이도 이상의 공격대에는 나이가 많은 영웅들이 없지.’
강채영처럼 은퇴 시기가 가까워지는 영웅들은 있어도, 그 시기를 훌쩍 넘은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전부 늙어가는 육체와 흐려지는 판단력 때문에 오히려 공격대의 발을 붙잡는 경우가 종종 나오기 때문이었다.
정말 특별한 재능을 지닌 영웅이 아니라면 은퇴할 시기가 된 대부분의 영웅들은 상위 난이도를 공략하다가 워킹 걸로 전락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B】 난이도 공략조로 공격대를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강채영은 영웅의 딜레마라는 사명감과 개인의 행복 중에서 후자를 택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채영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력을 각성하고 30년 가까이 어둠 괴물과 싸웠어. 모르긴 해도 내가 때려잡은 네임드 숫자만 해도 수십만 마리는 될 거야.”
“어쩌면 그 배가 될 수도 있겠죠.”
“그 때문에 대한민국 랭킹 1위, 최강의 딜러라는 명성을 얻었을 수 있었지. 아무튼 그래. 사실 요즘 들어서 지친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있잖아. 트라이가 길어지면 이제는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다?”
말과 함께 강채영의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끈한 피부를 지닌 예쁜 손이었지만, 저 안에 담겨진 상처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는 건 민국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아쉽기는 해. 은퇴하기 전에 대구 문제는 해결하고 싶었거든.”
“아…….”
던전 브레이크로 생겨난 공허의 대지.
그녀는 공허로 오염된 대지에 위치한 던전들을 모두 무너뜨려서 대구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상위 난이도의 던전은 대구가 아니더라도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메모리아 클랜을 비롯한 한국의 영웅 전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튼 갑자기 내린 결정은 아니고, 고민 좀 많이 했어. 그러다가 중국의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하는 동안 한계를 느낀 거지. 아,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워킹걸이 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도 들었고.”
“어, 그건 내가 고쳐줄 수 있는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아….”
능글맞은 자신의 말에 낮은 탄식으로 답하는 강채영을 보며 민국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치유한 워킹 걸이 시라누이 마이에 제국근위대의 셀레스도 있는데 믿지를 못하다니…. 오랜만이라 그런지 본인의 왕성한 정력을 기억에서 지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네가 말하니까 그럴싸하게 들리긴 한다.”
강채영이 히죽 웃었다. 다른 남자가 말하면 웬 미친 소리인가 싶었겠지만 눈앞의 녀석은 조금 특별한 영웅이었다. 그렇게 잠시 강채영을 보던 민국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아무튼 은퇴를 한다고 치면 메모리아 클랜은 알고 있어요? 모르긴 해도 그 강채영이 은퇴한다면 정말 난리가 날 것 같은데?”
“공대장만 알고 있어. 클랜장은 모르고. 뭐, 한국의 어둠 괴물 방어 전력이 크게 낮아질 거다, 국민들이 불안해 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를 하겠지. 보나마나 정부와 영웅 협회에서도 사람이 찾아올 테고.”
“안 좋은 기사를 내는 언론들도 있을 거예요. 강채영이라는 이름값이 있으니까요.”
“딱히 신경 안 써. 그리고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강채영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만큼 진심으로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채영의 선택을 민국도 존중했다. 그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나저나 강채영이 은퇴를 하면….’
모르긴 해도 한국 정부와 영웅 협회 그리고 메모리아 클랜 이 세 곳은 난리가 날 게 분명했다. 은퇴를 이야기 할 정도로 나이가 많긴 해도 그녀는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딜러 랭커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영웅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한국의 괴물 방위 전력이 급감한다? 그건 인정하기 힘들었다. 어둠 괴물과의 레이드는 딜러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뛰어난 딜러가 있다면 트라이의 성공이 쉬워지긴 했지만 민국이 생각하기에 이 세계는 영웅 개개인의 기량보다는 레이드를 해결하는 전술과 지시를 내리는 공대장의 기량 문제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강채영의 은퇴 후를 생각하던 도중 그녀가 다시 되물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달리 생각할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본인의 선택이잖아요? 나는 찬성. 딱히 반대는 안 해요.”
“정말?”
곧바로 튀어나오는 민국의 대답에 강채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자신을 보며 끔벅이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렇게 대답이 의외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은퇴를 해도 카르텔에는 계속 소속될 수 있겠지?”
“…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 민국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남자들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카르텔의 영웅들이 벌어오는 돈으로 단물을 쪽쪽 빨아먹었다가 은퇴시기가 되면 차 버리는 이들. 사회적인 문제로 언론에도 몇 번 다뤄진 적이 있던 문제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쓰레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강채영에게는 조금의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를 빼앗은 거니까. 사실 예쁘기도 했고.
“당연하죠.”
민국의 대답에 강채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 터라 민국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은퇴를 하고 나면 앞으로는 뭐하며 살 생각이세요?”
“일단은 메모리아 클랜에서 계속 머무를 생각이긴 해. 보통 나처럼 레전드급 영웅이 은퇴하면 후배들을 가르치는 교관 자리를 주곤 하거든. 그러면서 난이도가 낮은 리바이벌 팀이나 도와줄까 싶어.”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어차피 벌어놓은 돈이야 많을 테고….”
“서울에 있는 빌딩 중 열여섯 개가 내 명의로 되어 있지. 어때? 누나한테 장가올래?”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강채영이 테이블 위로 슬쩍 키를 올려놓았다. 그녀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열쇠였다. 참고로 강채영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수백만 달러가 넘는 하이퍼 카였다.
“와우….”
건물주도 아니고 빌딩주. 월세만 받아도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으니 끌리긴 했다. 만약 전의 세계에서 받은 제안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자신도 원하면 건물주가 될 수 있었다.
“말을 바로 해야죠. 내가 장가가는 게 아니라 누나가 나한테 와야지.”
솔직히 자신도 모아둔 돈들이 적지는 않았다. 전부 부활석에 꼴아 박기는 했지만, 어차피 돈은 던전을 돌면 벌 수 있었다. 특히나 【A – 5】 난이도의 상위 던전에서 나오는 전리품은 하나하나가 고가였다.
“그러면 반지부터 하러 갈까?”
“그것도 괜찮죠.”
은근히 묻는 채영의 질문에 민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레 하는 소리가 아닌 진심이었다.
‘한 열 개 쯤 맞출까?’
생각해 보니 카르텔의 여인들하고 반지를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매일 마다 반지를 바꿔 끼면서 그 날은 반지 낀 대상자와 으쌰으쌰. 진짜 중동의 왕족들이 이런 삶을 사는가 싶었다.
“아…. 진짜?”
당연하다는 듯 거리낌 없이 말하는 민국의 대답에 강채영은 감동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한참동안 자신의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뭔데요?”
“사, 사실 그것보다는 더 가지고 싶은 게 있어.”
그 모습이 답답했던 민국이 되묻자 강채영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반지보다 더 가지고 싶은 거요?”
민국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건 없었다. 설마 대구의 던전 브레이크를 같이 공략하자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닐테고.
“내가 결혼할 남자가 있었던 건 알지?”
“…어, 음.”
갑자기 튀어나오는 전 남친의 이야기에 민국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채영을 바라봤다.
그 남자와 만나던 강채영을 베트남의 던전 브레이크를 이용해서 빼앗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놓고 방치 플레이라니…. 둘 다 공격대의 주축 영웅들이니 만큼 서로가 바쁘기도 했고 중국과 베트남의 던전 브레이크와 GGW 공격대의 성장 문제도 있기는 했다.
그래도 조금 미안할 짓을 했나 싶었다. 하지만 강채영은 그 때의 미련이 전혀 없는 뉘앙스로 말을 이어나갔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결혼을 생각하던 것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였거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이가 있었고.”
“…아이요?”
“응.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가장 가지기를 원하는 것.”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민국은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서 한국의 출산율은 고작해야 0.3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엄청나게 높은 수준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남녀의 성비가 무너진 상황에서 출산율이 0.3이나 유지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분발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전 세계에서의 대한민국 출산율이 0.49였는데….’
전쟁이라는 재앙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내리막길을 걷다가 조선족과 난민을 받아들여서 엉망이 되어버린 전 세계의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그래도 이 세계의 정부는 여성들이 애를 잘 키울 수 있도록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강채영이 민국의 눈치를 잔뜩 보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게 오늘 만남의 본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아기라….’
아무튼 한 여자가 자신의 아기를 가지고 싶다니 기본이 묘했다. 이상한 것은 거부감이 들면서도 막 싫지만은 않았다.
물론,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고 질내 사정도 수도 없이 했지만 그 중 아이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
《민국님께서 원하신다면 저 여자를 임신시키는 것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뭐, 저는 추천 드리는 바입니다.》
부르르 떨며 모습을 드러내는 뿌우 때문이었다.
저 녀석에게 부탁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정자를 씨 없는 수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관계를 가지게 되면…….’
자신의 왕성한 성욕을 생각하면 임신도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강채영의 안에 몇 번이나 싸지를 테니 말이다.
“그건 역시 시, 싫겠지?”
“어…?”
은근히 자신의 눈치를 보는 강채영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는 느낌이었다. 전 세계에서는 애인도 없던 자신이 이 세계에서는 아기 아빠라니…….
“그래도 나 정말 열심히 키울 자신 있어. 응? 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키울게.”
고민을 하는 민국의 모습에 조금의 희망을 느낀 모양인지 강채영이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였다.
《미, 민국님! 제가 퀘스트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큐우♡가 모습을 드러내며 메시지를 만들어 냈다. 대체 이 놈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퀘스트가 나타났다. 목표는 역시나 강채영의 임신. 그리고 보상은 카오스 상점의 단계 업그레이드였다. 보상 자체는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내 여자라 할 수 있는 카르텔 소속의 여인이 간절하게 원하는 데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자신과 함께 십이 재앙을 쓰러뜨려야 하는 GGW 공격대의 멤버라면 조금 고민은 했겠다만.
강채영은 이제 은퇴를 하려는 영웅이었다. 게다가 재정적으로도 굉장히 부유한 여성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끝낸 민국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임신이라는 게 쉽게 안 되는 건 알아. 그래도 가끔씩은 노력을 해 줬으면…. 아!”
갑작스런 민국의 행동에 강채영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은 듯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괜히 아기에 대한 말을 꺼내서 민국의 기분이 나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강채영에게 민국이 말했다.
“일단 따라와요.”
임신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안에 열 번은 싸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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