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1 그녀의 소원
“뭐, 뭐라고?! 이, 임신?”
현아가 물고 있던 칫솔이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동자도 화등잔만한 크기로 떠진 것이 예상치 못한 단어에 굉장히 놀란 모양이었다.
“너 잠깐! 잠깐 거기서 기다려 봐.”
급하게 화장실로 향한 현아가 빠르게 입을 헹구고는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외투를 걸어놓고 거실로 나온 민국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임신이라니?!”
“강채영 선배가 간절히도 원해서 말이야. 나도 딱히 싫지는 않았고, 그래서 되면 좋겠다하고…?”
그렇게 말끝을 흐린 민국은 슬쩍 현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그게 말이 돼?! 아, 미안.”
소리를 빽 질렀다가 잽싸게 고개를 꾸벅인 현아가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그래도 지금의 화제를 조용히 넘어갈 생각은 없던 모양이었다.
“한민국 너, 강채영 선배님하고 결혼하려고?”
자신이 강채영에게 올인 할 거라 생각한 걸까?
다급해 보이는 현아의 목소리에 민국은 속으로 슬쩍 웃었다. 그녀가 질투하는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
“당장 결혼 생각은 없지만…. 아이는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말을 꺼내면서 민국은 자신의 고개를 휘휘 저었다. 결혼 없이 아이라고 말하니 뭔가 뉘앙스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거의 당연하다시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강채영 영웅 정도면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본인의 소원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 게다가 강채영 영웅도 민국이 네 카르텔의 여성이니….”
현아가 힘 빠지는 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나면 오현아가 아니였다.
“그, 그런데 남자는 여자가 임신하는 거 싫어한다며?”
“나는 괜찮은데?”
기다렸다는 듯 민국의 대답이 이어졌다. 이건 정말이었다.
단지 내 아이를 가질 사랑스러운 여성을 가족에게 소개시켜주지 못한다는 게 흠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김소정의 딸과 놀아줄 때도 신나게 놀았듯 민국은 딱히 아이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면 좋아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 잠깐.”
민국의 대답에 다시 목소리를 높이던 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민국을 훑듯 바라봤다. 잠시 후,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나도 가능성이 있는 건가? 내 꿈도 좋은 엄마인데….”
“으음…. 미안하지만 너는 안 돼.”
“아, 왜!”
입을 벙긋거리던 현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 나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단 말이야.”
민국의 대답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현아가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조금 전의 말이 빈 말이 아니듯 현아도 강채영처럼 좋은 엄마가 되는 게 꿈인 여성이었다.
특히나 한민국을 닮은 아들을 하나 가졌으면 남부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뿌우. 씨 없는 수박 모드로.’
《넵! 강채영 영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에게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민국은 강채영과는 다르게 현아를 임신 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건 현아가 실망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기는 한데 너는 나와 함께 어둠의 괴물들을 때려잡아야 하잖아? 공격대의 메인 탱커가 임신 때문에 공격대에서 빠지면 그것도 곤란하다고.”
특히나 GGW 공격대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팀원 하나가 빠지는 것은 정말로 큰 타격이었다. 특히나 현아는 피닉스 나이트라는 레전드리 클래스의 소유자였다.
“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 너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탱커를 또 어디서 어떻게 구하라고?”
“하기야 내가 좀 대단하기는 하지? 어, 음….”
입바른 민국의 칭찬에 현아가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동자는 슬픔이 가득했다. 정말로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강채영이 임신을 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정말 부러운 모양이었다.
“강채영 선배야 은퇴를 한다니까 소원이나 들어줄 겸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린거지.”
“…그래. 그런데 정말로 은퇴를 하신데? 강채영 선배님 기량이면 지금도 충분히 현역으로 뛸 수 있지 않아?”
“슬슬 몸이 말을 안 듣나 봐.”
“아….”
낮은 탄성과 함께 현아의 눈동자에 걱정의 빛이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민국을 사이에 둔 라이벌이자 동료였지만, 어쨌든 강채영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대다수 영웅들의 선배였으며 수십 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방패로 어둠 괴물과 싸워 온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아직 발표는 안 난거지?”
“응. 나도 어제 갑작스럽게 들은 이야기야?”
“이건 비밀로 해야겠네. 언론이 알게 되면 진짜 난리가 나도 보통 난리가 아닐 거야.”
현아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강채영의 위치와 상징성을 생각하면 그녀의 은퇴는 분명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줄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녀의 은퇴를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만큼 고생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올해 까지는 1군에서 활동하고 내년부터는 1군 공격대에서는 물러나 리바이벌 팀에서 활동하며 후배 영웅들을 코칭하실 생각인가 봐.”
“그러면서 아이도 갖고?”
현아가 다시 한 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리 대한민국 모든 영웅들의 선배라 하더라도 민국의 씨를 받은 첫 아이의 엄마가 자신이 아닌 강채영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은퇴를 말해도 이상하지 않는 강채영과는 다르게 아직 나이가 어린 현아는 앞으로 십 여년은 넘게 일선에서 굴러야 했다.
특히나 현아는 민국이 말한대로 GGW 공격대의 메인 탱커였다.
공격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공대장이라 하면 넘버 투는 메인 탱커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비중 있는 위치였다. 정말 큰 부상을 입는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빠짐없이 팀원들과 함께하면서 어둠의 괴물들을 쓰러뜨려 나가야 하는 위치인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 지 계속해서 현아의 거친 콧김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런 현아를 향해 민국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큼큼. 뭐, 어둠 괴물 녀석들을 몰아내고 나면….”
“…몰아내고 나면?”
헛기침과 함께 이어지는 민국의 말에 현아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왠지 의미심장한 말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뜸을 들인 민국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임신 시켜준다고 하면 뭔가 책임감 없는 사람 같으니까, 아무튼 그때 가서?”
“저, 정말?!”
현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본인이 기대하던 정확한 단어는 나오지 않았지만 눈치가 없는 이가 아닌 이상 민국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좋아! 어둠 괴물 녀석들을 전부 때려잡고! 세계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아이는 셋이 좋겠지?”
“셋….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아니야, 민국아. 너는 해낼 수 있어. 그런 의미로 지금부터 연습을?”
벌써부터 자신과의 미래를 그리다가 야릇한 얼굴로 유횩의 손짓을 그리는 현아의 행동에 민국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 강채영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 맞다. 강채영 선배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기 전에 대규모 원정을 하나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대규모 원정?”
현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부정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는 게 아닌 이상 자신들이 원정을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도 문제였다. 가뜩이나 중국과 베트남 사태 때문에 국내의 실력 있는 공격대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에 대해 국민들의 반발과 불안감이 상당했다.
“걱정 마. 해외 원정은 아니니까.”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원정을 갈 곳이….”
“대구 브레이크. 강채영 선배가 은퇴 전에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더라고.”
“와우….”
민국의 말에 감탄을 터뜨린 현아가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 아닐까? 구미와 대구 지방에 위치한 던전이 몇 개인지는 알지?”
“대략 수백 개?”
“그래. 그리고 그 중 【A - 4】 난이도 이상의 던전만 무려 아홉 개야. 전부 랭커 클랜들이 관리하는 던전이고.”
현아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만큼의 던전을 전부 무너뜨리려면 얼마나 많이 던전을 공략해야 할 지 상상조차 힘들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반복해서 공략하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글쎄?”
최근 들어 GGW 공격대가 던전을 연속으로 무너뜨리는데 성공하면서 던전의 공허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내면 던전이 무너진다는 가설이 힘을 받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확신을 내리기에는 아직 표본이 많이 부족했다.
이미 반복적으로 공략이 진행 중인 던전이 한, 두 곳이 아니었지만 실제로 무너진 던전은 민국과 GGW 공격대가 공략한 던전 뿐이었다.
하지만 민국도 대구를 해방시키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다. 현아의 말대로 수 백개의 던전을 무너뜨리는 일은 GGW 공격대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생 대구에서 살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차피 퍼플급 마력의 결정 때문에라도 【A - 4】 난이도 이상의 던전을 공략해야 하잖아? 대구 사태를 해결하면서 던전을 공략하는 셈 치면 되지.”
“하기야 그러다가 【A - 2】 난이도의 광역시청 던전을 무너뜨리게 되면 진짜 난리가 나긴 하겠다.”
현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리아 클랜이 관리하고 있는 대구 사태의 대장격인 던전. 대구 광역시청 던전이 무너지면 그 근방의 공허의 대지도 마력을 잃고 전부 사라질 터였다. 석산 던전처럼 말이다.
“하,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면….”
잠시 상상을 하던 현아가 헤벌쭉 웃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국민 영웅으로 등극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현아를 보며 민국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의 시선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는데. 딱히 그런 건 모양이었다.
* * *
“…네? 강채영 선배가 은퇴를 할 예정이라고요?”
“그 전에 대구 관련해서 대규모 원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고요?”
갑작스럽게 클랜 하우스의 회의실로 모인 GGW 팀원들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웅이자 딜러 랭킹 1위인 강채영이 은퇴할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이어 조만간 대구 관련해서 원정을 가야할 지도 모른다는 민국의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니까 그냥 알고 있기만 해. 그리고 강채영 선배의 은퇴는 알지? 기자들이 알면 곤란하다는 거.”
“넵!”
“조용히 있겠습니다.”
정예린과 신나연이 자신의 입을 지퍼로 채우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그런 둘을 보던 민국이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보통 이럴 때 호들갑을 떠는 분위기 메이커가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민국의 눈동자가 회의실의 끄트머리에 있는 최유나에게 향했다.
“…….”
그리고 유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장난스럽게 입을 열려던 민국은 조용히 자신의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얗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큼직한 눈동자가 누가 봐도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떨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구 관련해서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 유나야. 괜찮아?!”
다른 팀원들도 그런 유나의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본인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회의실을 가득 메우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유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옛날에 대구에서 살았어요.”
“…….”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지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흘러나올 이야기가 무슨 내용으로 이어질 지 너무나도 쉽게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대구 시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파트였어요. 주변에 커다란 마트도 있었고, 학교도 가까웠죠. 그리고…. 아빠 직장도 가까웠어요. 공무원이셨거든요.”
“서, 설마….”
정예린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하듯 크게 떨렸다.
“맞아요. 대구 시청에서 일하셨어요. 그리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 사고를 당하셨죠. 저랑 엄마는 운 좋게 부산의 할머니네 집으로 놀러가 있어서 화를 피했지만…요.”
울컥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이 아슬아슬하게 눈동자에 달라붙어 있었다.
동시에 옆에 있던 지젤이 살며시 유나를 끌어안았다. 국적은 다르지만 몬스터에게 가족을 잃은 슬픔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구 시청 던전의 난이도가 【A - 2】죠? 거기는 무조건 공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팀원의 흐느낌에 타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겠네요.”
그 말에 동의하듯 시라누이 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라누이 역시 가족 전부를 어둠 괴물들의 손에 잃은 여성이었다.
아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어둠 괴물의 손에 친인척이 화를 입지 않은 이들이 보기 힘들 정도. 그렇기에 GGW 공격대의 팀원들은 그런 유나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먼저 【A - 4】 난이도의 던전부터 공략을 시작해야겠네. 이왕이면 특수 개체와 함께 괜찮은 장비를 주는 녀석들을 주는 던전을 물색해보도록 할게.”
이어서 민국이 말했다.
어차피 퍼플급 결정을 흡수해서 8성 영웅이 되려면 【A - 1】에서 【A - 4】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해야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8등급 몬스터의 트라이에 적응하고 나면 대구 시청 던전을 뺑뺑이 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강채영의 은퇴 선물과 함께 팀원의 복수도 겸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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