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2 그녀의 소원
“오현아, 이리와 봐!”
민국이 네임드 앞에서 몸을 풀고 있는 현아를 호출했다.
그런 민국의 호출에 현아와 함께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부 탱커 타냐도 슬그머니 민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A - 4】 난이도에서 등장하는 8 등급 특수 개체 중 하나인 ‘악취 나는 도축자’.
커다란 부식 칼을 휘두르는 이 끔찍한 괴물은 8 등급 괴물 중에서도 공격의 위력이 굉장히 강한 녀석이었다. 때문에 메인 탱커의 부담이 상당히 높은 괴물이었다.
때문에 악취 나는 도축자가 나타나는 상위 던전은 랭커 클랜의 메인 탱커라도 기피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
그리고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 민국이 【A – 4】 난이도의 던전을 물색하자마자 거의 떠밀리듯 르네상스 클랜의 【A – 4】 난이도의 던전 공략을 맡을 수 있었다.
“어때? 버틸 만 해?”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아.”
민국의 질문에 현아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이에 들어간 지 세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던전의 첫 네임드라 할 수 있는 도축자에게 서른 번이 넘게 죽임을 당했던 현아였다.
그만큼 처음 접하는 8 등급 특수 개체 네임드의 위력은 7등급 몬스터와는 비교도 할 정도로 강렬했다.
상위 영웅들이 등급 하나를 가지고 하늘과 땅 차이라고 이야기하는 데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만 집중한다고 하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현아의 클래스는 부활이 가능한 피닉스 나이트. 큰 실수를 저질러도 한 번은 무마시키며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처음에는 눈 깜빡할 사이에 죽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어느 정도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도축자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면 아직까지 버티는 것이 위태위태하기는 했지만.
그런 현아의 대답에 민국은 알았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너는 도축자의 공격을 탱킹하는 데만 집중해. 타냐도 옆에서 도우면서 도축자의 공격대 패턴을 계속해서 눈으로 익혀야 해.”
“예썰.”
“쉽지 않겠지만 탱커들이 든든하게 버텨줘야 레이드가 진행될 수 있다는 점 기억하고.”
이어서 민국은 딜러와 힐러들을 불러 모아 지금까지의 트라이에 대한 피드백을 진행했다.
처음 접하는 8 등급 개체는 7등급과는 차원의 달리하는 괴물. 공격 패턴에 따른 복잡한 전술적 움직임을 요구할 뿐 아니라 영웅의 전투 능력과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GGW 공격대는 꽤나 괜찮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공격대였다.
일반적인 공격대와는 달리 한민국이라는 공대장 아래에 카르텔로 묶인 여인들은 무시무시한 네임드를 상대로 두려움 없이 트라이를 진행했고, 민국 역시 레이드라면 이골이 난 고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슬슬 클래스 조합은 필요하겠네.’
상위 난이도의 레이드를 대비해 전투에 큰 도움이 되는 궁극기를 보유한 클래스와 함께 회복, 보호막, 버프 등 팀원들의 기량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조합을 슬슬 짜 맞춰야 할 것 같았다.
‘필요한 것은 경매장에서 구해야겠지만….’
클래스 스톤과 같은 아이템은 대부분 것은 구하는 게 불가능한 물품들. 직접 발로 뛰며 구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면에서 GGW 공격대는 클랜의 던전 할당에 관련해 자유롭다는 게 장점이기는 했다.
쾅! 콰아앙!
다시 트라이가 진행되면서 열 명의 영웅들과 악취 나는 도축자라 불리는 괴물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생김새는 녹슨 칼이나 다름없지만, 도축자가 지니고 있는 공허의 마력이 깃든 커다란 부식 칼이 부딪칠 때 마다 현아의 방패에서는 타들어가는 연기가 치직 피었다.
“으아아아…!”
부식 칼을 막아낸 방패 부위가 빠르게 녹슬어가는 모습을 보며 현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보나마나 장비의 수리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나갈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어스코어가 높은 장비는 고칠 때 마다 엄청나게 많은 수리키트를 필요로 했다.
“더 좋은 방패로 바꾸던가 해야지…!”
“그러면 수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걸요?!”
옆에서 들려오는 타냐의 말에 이를 악 문 현아는 계속해서 방패를 내밀었다. 그리고 폭풍처럼 이어지는 도축자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콰앙! 쾅!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렇게 현아가 도축자의 시선을 끄는 사이 정예린을 위시한 원거리 딜러들은 도축자의 등을 향해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근접 딜러들도 현아의 움직임에 맞춰서 무기를 휘둘렀다.
[맛있는 고기!]
“모두 흩어져! 포식 대상자는 시계 방향으로 돌면…! 대상 김소정!”
종종 도축자가 자신의 배를 내밀며 달려들긴 했지만, 일찌감치 도축자의 패턴을 전부 파악한 민국은 정확하게 팀원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지시를 내렸다.
아무튼 이러한 민국과 7 성 영웅이 된 팀원들의 활약으로 인해 GGW 공격대의 던전 공략은 제법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난이도가 난이도인 만큼 던전을 완벽히 공략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등급 몬스터라…. 조금 이르지 않을까, 요?]
본격적인 공략에 들어가기 전, 조심스레 말을 꺼냈던 클랜장의 염려와는 다르게 GGW 공격대의 【A – 4】 난이도 던전 공략은 그래도 어떻게든 진도를 뽑아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결국 방패가 부셔졌어!”
단지 부활석보다 백 배 저렴한 수리 키트의 소모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렇게 GGW 공격대가 【A - 4】 난이도의 던전을 마지막까지 공략하는 데 성공한 것은 던전 공략에 들어간 지 무려 이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였다.
네임드의 개체 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8등급 특수 개체들은 하나하나가 굉장히 강력하고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다만….
“이제야 조금 할 만하네.”
고인물 중의 고인물인 민국은 이제야 쉬움과 보통 난이도를 벗어나 적당한 수준의 트라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네임드의 공격에 대응이 까다로운 랜덤 패턴은 전혀 없어 어려움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퀘스트 드릴까요?》
“됐어. 지금 말고 나중에 폭발시켜라.”
때문에 민국은 뿌우의 퀘스트 제안도 거절했다. 지금 말고 정말 희귀한 네임드나 꼭 필요한 아이템을 얻을 때 쌓아뒀던 것을 폭발시킬 생각이었다.
* * *
“은퇴한다며?”
“…응. 클랜장에게 들었어?”
오랜 동료이자 친구였던 여인의 말에 강채영이 잠시 쭈뼛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웅의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약한 모습이었다.
그런 채영의 행동에 메모리아의 공대장을 맡고 있던 여인이 살며시 웃으며 강채영의 손을 붙잡았다.
“대답이 왜 그래? 설마 은퇴한다고 해서 내가 뭐라고 할 줄 알았던 거야?”
“아니, 미안해서 그렇지.”
“미안하기는. 그렇게 따지면 지금까지 열심히 싸우다가 은퇴한 영웅들은 전부 나쁜 년들인가? 물론 어둠 괴물과의 전쟁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여인이 포근한 눈빛으로 강채영을 바라봤다.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싸웠잖아? 고생 많이 했어.”
“하기야 우리 채영 언니도 슬슬 물러날 때가 됐죠.”
“야! 돈 걷어! 채영 선배 올해 은퇴하신 단다!”
“아!!! 왜 올해 해요?! 일 년만 더하시지!”
옆에서 듣고 있던 메모리아의 팀원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채영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아났다. 보아하니 선배의 은퇴를 걸고 돈내기까지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언니 장비는 누가 가지는 거예요?”
“…채영 언니 전부 각인 장비 아니야?”
“뭐야? 일반 장비 한 부위도 없어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영웅은 은퇴하며 장비를 남긴다고 하던데…. 우리 선배님은 남길 게 하나도 없으신가 보네?”
짓궂게 장난을 치는 후배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채영이 은퇴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본인들의 성격에 따라 표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채영의 은퇴를 만류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대한민국을 대표해 이십 여 년이 넘게 어둠 괴물과 싸워온 영웅, 강채영에 대한 예의이자 존경의 표현이었다.
“그러면 언제 물러나는 거세요?”
“서너 달 후면 리바이벌 팀으로 내려갈 거야.”
“그 전에 크게 한 방 터뜨려야 하는데….”
“맞아. 이대로 평범하게 은퇴를 시킬 수야 없지. 마지막까지 시원하게 주먹 한 방 날리고 떠나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것 같은 팀원들의 모습에 채영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다리를 꼬며 후배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우리 대구 시청이나 무너뜨려볼까?”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자신의 은퇴 전에 대구 브레이크로 생겨난 공허의 대지 해방과 관련해서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냥 빨리 은퇴나 하세요.”
“거기 막내들 뭐하냐?! 채영 선배 가신다는데, 왜 가만히 앉아 있어? 쓸데없는 짓 안하고 곱게 떠나게 카펫이라도 깔아 드려!”
하지만 역시나 실현성이 없는 말이었다.
지금의 메모리아 클랜은 대구의 【A - 2】 난이도 던전인 대구 시청 관리를 하는 것도 벅찼다.
메모리아 1군의 기량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좁디좁은 땅덩이에 던전 브레이크가 두 번이나 터지면서 타이머를 관리해야 하는 상위 던전이 많아서일 뿐.
다른 랭커 클랜들도 있기는 하지만 【A - 2】 난이도 이상의 던전을 무탈하게 관리할 수 있는 기량의 공격대는 국내에서는 메모리아 1군이 유일했다.
“역시 스케줄 때문에 힘들겠네.”
채영은 그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아무래도 자신이 대구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런 채영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공대장이 경직된 표정으로 되물었다.
채영이 입에 올렸던 대구 시청 던전은 【A - 2】 난이도의 던전으로 국내의 던전 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까다롭기로는 한 손에 들어가는 던전이었다.
때문에 메모리아 1군으로 이적하거나 승격해서 올라오는 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트라이 역시 대구 시청 던전이었다.
“뭐, 그냥 은퇴 전에 대구의 오염된 대지나 해방시켜볼까 했지.”
채영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은퇴 전, 달성하고 싶었던 목표이긴 했지만 팀원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던전이 무너지는 확률이 높으면 모를까…. 막무가내로 던전이 무너질 걸 기대하고 반복해서 공략하는 건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공대장의 말에 강채영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왠지 머릿속으로 꽉 메우고 있던 고민이 더욱 짙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은퇴 전에 오염된 대지를 해방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잘 나가는 후배들이 자신을 대신해 한국의 땅을 해방시켜 줄 거라는 믿음이었다. 그 때였다.
“웁…!”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메슥거림에 채영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헛구역질을 했다. 식도에서부터 신물이 물씬 올라왔다.
“어, 언니?! 괜찮아요?”
이상행동을 보이는 강채영의 모습에 옆에 있던 공대장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체 뭐였을까?
잠시 후, 숨이 돌아온 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력을 각성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일단 어둠 괴물과 싸우는 게 아닌 이상 영웅이 아플 일은 거의 없었다. 심각한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마력을 각성한 순간 싸악 낫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은….
“언니, 괜찮아요?”
공대장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채영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지금은 괜찮아. 갑자기 속이 메슥거렸어.”
“혹시 아침 안 드셨어요? 굶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민트 초코가 조금 땡기기는 해.”
“…네? 언니 민초 싫어하지 않았어요?”
“어? 어?”
자신이 한 말을 떠올리며 채영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공대장의 말대로 자신은 남들이 좋아한다는 민트 초코를 굉장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메리카노가 입맛에 맞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갑자기 민트 초코의 묘한 향이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은퇴 때문에 센티해지신 거 아니야?”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어? 어? 잠깐, 잠깐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메모리아의 팀원들 사이에서 젊은 영웅이 설마설마하는 눈으로 채영을 바라봤다.
“서, 선배님…. 제가 요즘 아기 관련해서 책을 굉장히 많이 보는데요. 헛구역질에 갑자기 이상한 음식 땡기고 그런 건…. 아마도 임신 증상 같으신데…. 혹시 테스트 한 번 해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뭐어?!”
그리고 핵폭탄과도 같은 충격적인 발언에 메모리아 1군의 대기실이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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