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4 그녀의 소원
민국에게 있어서 강채영은 없으면 못살 것 같은 수준의 존재감 있는 여성은 결코 아니었다.
그냥 이 세계의 여성들 중 GGW 공격대만큼이나 관심이 가는 정도로 조금 더 추가하자면 국내 랭킹 1위 딜러라는 타이틀 때문에 호기심이 있던 수준이었다.
게다가 강채영은 이제 어둠 괴물과의 전쟁에 은퇴를 하고 본인을 위한 미래를 보낼 예정에 있는 노장이었다.
다시 말해 어둠 괴물을 쓰러뜨려야 하는 자신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이었다. 기껏해야 풍부한 경험을 통한 팀원들의 멘토 정도나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막상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니 괜히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강채영의 간절한 부탁과 퀘스트 때문이라지만 그래도.
‘내 아이인데.’
…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음.”
민국은 다시 한 번 강채영이 보낸 문자와 사진을 떠올렸다. 여친도 없던 내가 이 세계에서는 애 아빠라니.
기분이 묘했다.
생각해 보면 인도 제국의 황제처럼 이 세계에서는 수백 명의 첩에 수천 명의 아이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지만.
‘무슨 쓸 데 없는 생각을.’
아무튼 고개를 휘휘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린 민국은 강채영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재정립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도 한 아이의 아빠와 엄마가 될 텐데, 지금처럼 카르텔에 소속된 일방적인 관계는 조금 그렇다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뭐라고 생각을 하겠는가?
아무리 이 세계가 그런 것들이 당연한 세계라 할지라도 자신은 이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빠와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약혼이라도 해야겠어.”
“그거 괜찮겠다. 결혼은 조금 부담스러우니까 약혼부터 하고 몇 년 살다가 괜찮다 싶으면 식장에도 가고 그러는 거지…. 뭐, 뭐어?!”
민국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현아가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누구랑?”
대답을 이미 들은 것 마냥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질투라는 감정이 잔뜩 담겼다. 그녀의 예쁜 입술이 조금씩 앞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그런 현아를 보며 민국은 현아와의 관계로 제대로 정립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카르텔이라는 섹스 파트너에 가까운 관계 말고 조금 더 진지한 만남을 가지고 싶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뜰 때부터 만나 벌써 3년 가까이 동거를 해온 사이.
별의별 꼴을 다 본 것은 물론이고, 현아와 몸을 섞은 횟수만 하더라도 수백 번이 넘었다.
당연하지만 민국은 그런 현아와 거리를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질투가 많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자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행위였으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일단 너.”
“나? 나…? 어어? 나아아아?!!!”
당연히 강채영이라고 생각했던 현아가 잠시 후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굉장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민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곧 환희로 변해갔다.
“지, 진짜?”
“농담 아니야.”
다시 이어지는 민국의 말에 현아가 풀석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진 까닭이었다.
단지 민국의 카르텔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약간의 애정의 관심만 받아도 괜찮다고 여겼는데…. 민국도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내가 앞으로 더 잘 할게.”
현아의 눈이 빠르게 촉촉해졌다.
괜히 뭉클한 생각에 현아가 강아지처럼 기어서 민국을 품에 안았다. 일어서서 가자니 아직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 굶지 않게 돈도 많이 벌어오고…. 어둠 괴물 녀석들도 더 많이 때려잡고….”
자신을 품에 안고 울먹이는 현아를 보며 민국이 멋적게 웃었다.
‘뭔가 내가 할 말 같기는 한데….’
게다가 공대장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돈도 현아보다는 자신이 더 많이 벌었다. 하지만 이 세계 여성들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아무튼 너랑 함께 강채영과도 약혼할거야. 그녀가 임신한 건 알지?”
“…응.”
조금 전까지 감동에 빠졌던 그녀의 얼굴이 불만족스럽게 변하려다가 민국을 보고는 미소로 변했다.
그래, 자신도 민국에게 사랑을 받는 약혼녀였다.
‘게다가 내가 지금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는….’
누군가와는 달리 민국이 자신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현아는 질투로 찬 마음이 싸악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내 아이인데 내가 책임을 져야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민국의 말을 듣던 현아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어? 설마 강채영 영웅이 임신해서 그녀랑 약혼하려는 거야?”
“응? 당연하지.”
“와……. 진짜 너어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여자를 책임지려는 남자라니. 현아의 눈동자가 다시 감동으로 물들었다. 당연히 이런 민국의 약혼 이야기는 바로 GGW 팀원들에게 퍼져 나갔다.
“정말이요?”
“풉! 켁! 케엑! 콜록콜록!”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정예린이 물을 뿜고는 기침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최유나도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었다. 일단 공대장이 약혼을 한다는 것이 놀람 포인트 중 하나였고, 그 이유가 두 번째였다.
“그래. 공대장님이 임신한 강채영 영웅 책임지려고 약혼한다고 하더라.”
“우와, 진짜 대단하다. 저렇게 완벽한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태어난 거지?”
이야기를 들은 두 여인의 눈이 부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호들갑을 떨며 한민국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단순히 능력이 있고 잘생긴 것을 떠나 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하려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뭉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들 역시 현아와 강채영처럼 민국의 카르텔에 소속된 여인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에서 한 명의 남자가 다수의 여성을 와이프로 삼는 것은 결코 흠이 아니었다.
* * *
예정대로 【A - 4】 난이도의 던전의 공략을 끝낸 민국은 바로 서울로 복귀했다.
그리고는 클랜 하우스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뒤 바로 집으로 복귀했다. 오늘부터 GGW 공격대는 이틀 가량 휴가였다. 현아는 오늘 언니와 시간을 보내고 내일 집으로 온다고 했다. 아마 자신이 강채영과 만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디보자.”
책상에 앉은 민국은 앞으로 할 일을 떠올렸다.
일단 이번 약혼은 강채영과 함께 오랫동안 함께했던 현아와도 할 예정이었다. 대충 검색해 본 결과 거창하게 호텔이나 장소를 예약해서 하는 방법도 있다지만….
“그냥 간단하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아니지.”
생각해보니 독불장군도 아니고 자신이 혼자서 모든 결정을 내릴 게 아니었다. 이건 상대방과 의논을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강채영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괜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진짜로 그런 생각이었다.
[한민국 : 할 말 있는데, 지금 만날 수 있죠?]
[강채영 : 지금? 알았어! 바로 준비할게.]
[한민국 : 나올 필요 없어요. 집으로 갈 테니까.]
집에서 나온 민국은 바로 택시를 타고 강채영의 집으로 향했다.
얼굴을 가려도 잘생긴 티가 나는 남자의 모습에 택시 기사가 짓궂게 말을 걸었지만 슬쩍 기어 스코어 장비를 보여주자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내릴 때는 택시비 대신 싸인을 해줘야 했다.
“왔어?”
초인종을 누르자 강채영이 반갑게 민국을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기쁨이 흘러 내렸다.
“풉! 아, 아니 저게 뭐예요?”
거실로 들어서자 자연스레 보이는 태블릿의 화면을 슬쩍 바라본 민국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던 모양인데, 전부 아이 옷들과 장난감들이었다.
“그렇게나 좋아요?”
“…당연하지.”
민국의 물음에 강채영이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사흘 전부터 트라이에서 제외됐어. 어둠 괴물들과 싸우면서 격렬하게 움직이다 보면 아이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고. 이제는 욕도 하지 않을 생각이야. 착하고 고운 말만 써야지.”
“그걸 클랜에서 허락했어요?”
민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강채영은 메모리아 클랜의 핵심 멤버였다. 그녀에게 들어가는 돈을 생각하면 그렇게나 쉽게 결정이 내려지는 일인가 싶었다. 예전의 세계는 임신을 하더라도 출산 전까지 일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강채영은 오히려 의아한 얼굴로 민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다른 것도 아니고 임신인데?”
“아아, 당연한 거였구나.”
“하기야 남자들은 그런 거 잘 모르겠다.”
어처구니가 없는 민국의 얼굴에 강채영이 임산부에 대한 혜택을 하나, 둘씩 이야기해 나가기 시작했다.
“와아….”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국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임산부 뿐 아니라 아이 아빠인 남자에 대한 지원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만큼 최악이나 다름없는 출산율에 대한 이 세계의 정부 대책은 정말 눈물이 겨울 정도였다. 하기야 이대로라면 어둠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게 생겼으니….
아무튼 덕분에 강채영은 앞으로 열 달간의 장기 휴가를 받았다고 했다. 출산을 하고 나서도 2년 가까이 쉴 예정이었다.
“그래서 이참에 은퇴식을 함께 진행할까 생각 중이야. 그래도 메모리아를 사랑하고 좋아해주는 팬들에게 인사는 하고 떠나야지.”
“아직도 현역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그래도 이제는 영웅이 아니라 엄마로 살고 싶어.”
상상한 해도 행복한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깃들었다. 그런 강채영의 모습에 민국은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으, 응?”
혹시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이 싫은 것일까? 갑작스러운 민국의 말에 강채영의 눈동자가 뒤룩 움직였다.
“하지만 좋은 아빠가 되고 싶기는 해요.”
“그, 그래?”
“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아이의 정서에 가장 중요한 것이 아빠와 엄마의 존재거든요?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아이라니…. 그래서 말인데요.”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일까? 이어지는 민국의 말에 강채영의 눈이 끔벅였다.
“당장 결혼을 하기는 준비할 것들이 많으니까 우리 약혼부터 먼저 했으면 하는데. 누나 생각은 어때요?”
“……!”
민국의 말에 강채영은 깜짝 놀랐다.
그가 다른 남자와는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정도라니….
“으, 으응. 나는 좋아. 무조건 좋아….”
속이 깊은 민국의 말에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이 그런 강채영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의 체온을 느끼다가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약혼이나 결혼 같은 걸 준비해 본 적이 없어서요. 보통 호텔이나 홀을 잡고 한다고 하던데….”
강채영의 무릎을 베고 누운 민국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아무래도 이런 건 자신보다는 그녀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었다.
“네 생각은 어때? 복잡한 건 싫지 않아?”
“사실 그래요. 또 공격대 일도 있고 하니, 서로의 친인척에게 우리 관계를 설명하는 자리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나도 그래.”
민국의 말에 강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민국이 자신을 생각해서 약혼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배를 어루만졌다. 정말 천사가 자신에게 찾아온 느낌이었다.
“어차피 나야 엄마랑 그 쪽 가족들만 모시고 오면 되거든? 복잡하면 엄마만 봐도 되고. 그런데 너는?”
“어…?”
자신에게 향하는 강채영의 시선에 민국은 갑자기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자신의 부모님들을 소개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당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분들이시니까.
그렇다면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 할 텐데….
생각해보니 이 몸의 부모님들과 연락을 했던 게 몇 년 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세계에 넘어온 이후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던 것 같았다. 내 부모님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자연스레 나왔던 행동이었다.
게다가 공격대 일로 워낙에 바쁘다 보니 부모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까먹은 까닭이었다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서로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기는 했다. 부모님이 문제가 아니라 원 주인 놈이 문제였다. 심지어 누나도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이번 일 때문에 생판 만난적 없는 누나랑 부모님이 생기겠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아무 연락이 없던 것을 생각하면 이 몸의 부모님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TV를 틀 다 보면 자연스레 아들의 모습이 나올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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