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7 본인도 몰랐던 과거
“아, 아무튼 우리 약혼식도 이제 삼주 가량 남았네.”
“그렇네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리는 채영의 귀여운 행동에 민국은 웃으며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약혼식보다는 상견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다. 양가 가족도 그 때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어머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미리 인사를 좀 드려야 하는데….”
GGW 공격대를 이끌고 르네상스 클랜의 【A - 4】난이도의 던전 공략에 이어서 조합식 때문에 쌍곡 던전까지 연속으로 공략을 하느라 약혼식 준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강채영과 함께 했던 전화 통화를 제외하면 얼굴도 뵙지 못한 미래의 장모님이 약혼식 준비의 대부분에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그리고 현아의 경우에는 언니이자 클랜장인 오현정과 그녀의 비서가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나도 무언가를 하긴 해야 할 텐데….’
일단 가족 문제도 해결을 해야 하는데다가 던전 공략 때문에 진행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대구의 오염된 대지 공략을 시작하려면 지젤을 포함해서 적어도 두 명, 아니 세 명의 팀원들을 레전드리 클래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민국을 채영은 사랑이 듬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쩜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예쁠까?’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엄마를 챙기려는 민국의 행동 때문이었다.
다른 남자들은 이런 것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민국을 만나기 전 결혼을 생각했던 남자 친구가 그랬다.
“괜찮아. 우리 엄마도 그런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크게 걱정 하지 마. 그리고 우리 일도 중요하지만 자기는 공인에 가까운 사람이잖아?”
마지막 한 마디가 유독 깊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비록 은퇴는 했지만 한국의 어둠 괴물 방위 문제와 여전히 계속 되고 있는 전쟁이 신경이 쓰이긴 할 터였다.
실제로 어둠 괴물과의 전면전이 일어나게 되면 강채영은 소집 1순위 영웅이기도 했다. 민국이 살던 대한민국의 예비군처럼 말이다.
“그래도 내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야 할 텐데….”
“그것보다는 우리 약혼식 때 자기가 사인을 좀 많이 해줘야 할 것 같아. 우리 엄마가 친구 분들에게 사위 자랑을 잔뜩 했나 보더라고.”
“그 정도야 뭐.”
충분히 해드릴 수 있었다.
어쨌든 약혼식 전까지 ‘새벽의 성처녀’ 클래스를 완성시키는 게 민국의 목표였다. 거기에 또 다른 일도 해결해야 했다. 바로 자신의 누나인 한세정과의 일이었다.
‘아, 엄밀히 말해 누나는 아니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했던 민국에게 있어 한세정은 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나중에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귀찮았다.
* * *
“외곽으로! 거리유지 해! 핵 공격 올 거야!”
“어?! 오, 온다! 모두 피해!”
“나! 나야! 나한테 붙지 마!!!”
짧은 휴식이 끝나고 다시 쌍곡 던전의 트라이가 시작되었다.
쉽게 1, 2 네임드를 처리하는 데 성공한 민국과 GGW 공격대는 3 네임드 거신 사나스를 상대로도 무난하게 트라이를 이어나갔다.
아직 트라이 경험이 많지 않은 까닭에 원 트로 사나스를 때려잡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4트로 사나스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고, 쌍곡 던전의 또 다른 수문장급 괴물인 에프락시스를 상대로는 3트 만에 공략을 끝낼 수 있었다.
‘생각 외로 금방 익숙해지네.’
민국이 뿌듯한 표정으로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자신의 정확한 지시가 없어도 알아서 척척 대처를 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임기응변은 조금 떨어지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활약만 하더라도 장족의 발전이 따로 없었다.
처음 이 세계 영웅들의 막무가내식의 전술적 움직임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이 흘러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트라이 경험을 쌓는 동안 팀원들의 기량도 차츰차츰 늘어가는 모습이었다.
거신 사나스를 트라이할 때만 하더라도 힘겹게 거신의 공격을 막아냈던 현아와 타냐는 조금씩 방패를 다루는 기술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3, 4 초가량 회복의 능력을 받지 않아도 공격을 버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딜러들도 마찬가지였다.
네임드를 향한 공격의 적중률이 큰 폭으로 높아졌고, 연계 플레이들이 자유자재로 이어지면서 공략 시간이 기존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힐러들 역시 편하게 마력 관리를 할 수 있었다.
“으아…! 잡았다!”
“전리품! 전리품! 어엇?! 딜러 방어구! 민첩 투구입니다!”
“앗! 저요! 저요! 저요!!!”
그렇게 9 네임드인 에프락시스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얻은 건 기어 스코어 1120의 민첩 딜러 투구.
그것을 본 유나가 눈에 띄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8성 영웅인데도 불구하고 경매장에서 아이템을 구입할 수가 없어서 아직까지도 기어 스코어가 1000이 넘지 않는 깡통 투구를 쓰고 있던 까닭이었다.
참고로 베트남의 던전 브레이크 때 획득한 장비로 그 때 이후로 민첩 딜러 투구는 전리품 상자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유나야 축하해!”
“이야…. 드디어 그 더듬이 달린 투구를 벗는 거야?”
현아와 지젤의 말에 이어서 팀원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기어 스코어가 높아질수록 장비 아이템을 드랍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졌다. 그렇기에 유나처럼 본인에게 꼭 필요한 장비를 획득하는 건 운이 좋은 경우였다.
오죽하면 던전 하나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는데도 불구하고 영웅 장비를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히려 퍼플급 마력의 결정을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
때문에 GGW 공격대에서도 유나처럼 8성 영웅인데도 불구하고 기어스코어가 1000을 넘지 못하는 7성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이 몇 있었다. 특히 얻기가 까다로운 장신구 쪽이 7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의외로 무기와 갑옷은 그렇지 않았는데, 전투력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두 부위만큼은 본인들의 성급에 맞는 물건으로 가장 먼저 구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얻게 된 아이템에 대해서는 딱히 경매를 할 필요가 없었다. 최저가 낙찰이었다.
“에이, 이럴 때 유나를 홀라당 벗겨 먹어야 하는데. 공대장님. 저희 예비 멤버로 민첩 계통 딜러 한 명 안 구하나요? 암살자 클래스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예린이 장난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다.
그도 그럴게 공격대 내에서 민첩 투구가 필요한 사람은 유나밖에 없었다.
김소정과 시라누이 마이는 힘 계통의 딜러 투구가 필요했고, 정예린과 신나연은 지력 계통의 투구를 착용하는 클래스였다.
“흐음…. 그러면 내가 낙찰을 해볼까?”
민국도 살짝 미소를 짓고는 웃으며 정예린의 농담을 받았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민국이 가끔씩 사용하는 딜러 클래스인 ‘악의 칼날’은 민첩 딜러였다.
“고, 공대장님?! 히끅?!”
그런 민국의 대답에 유나가 깜짝 놀라더니 소처럼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정말로 경매를 진행하게 되면 커다란 눈물이 뚝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농담이야, 농담.”
기어스코어 1000이 넘어가는 장비는 못해도 수백에서 수천 억.
시가의 30%를 내고 구입한다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오랫동안 트라이를 함께하면서 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정산금을 계속해서 모았던 유나라면 모를까 민국은 그 큰돈을 내고 부 클래스의 장비를 구입할 생각이 없었다.
강채영의 도움을 받는다면야 구입할 수 있겠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아, 이번 트라이에는 돈 좀 만질 수 있겠다.”
“200만 달러는 저축하고, 나머지는 옷 사는 데 좀 쓸까?”
“저는 에스랑떼에서 반지를 하나 하려고요.”
아이템의 등장에 공격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활발해졌다.
던전을 공략하면서 얻은 잡다한 물품들로 소소하게 정산금을 받기는 했지만, 장비 아이템의 정산금만큼은 아니었다. 많은 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투구를 얻은 유나도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8 등급 특수 개체에게서 얻은 장비라 그런지 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편하고 좋은 아이템이었던 모양인지 얼굴이 꽃이 활짝 핀 모습이었다.
“자, 그러면 마지막 네임드도 깔끔하게 잡고 이번 일정도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던전의 마지막 네임드인 심연의 추적자라는 악명을 보유하고 있는 오롤라스의 앞에서 민국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이미 한 번 공략에 성공한 적이 있었기에 민국은 오롤라스 공략에 꼭 필요한 중요한 포인트만을 짚어서 팀원들의 클리어 기억을 떠올려주었다.
그리고 시작된 트라이.
오롤라스의 대표적인 특수 공격인 기억 게임에서 다시 한 번 실수가 나오면서 공격대 전부가 전멸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3트 만에 오롤라스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결국 던전을 공략하면서 사용한 부활석은 총 12개로 대부분 삼대장을 상대로 사용한 것들이었다.
그에 반해 획득한 아이템의 가치는 유나의 투구만 하더라도 수천억.
그리고 잡다한 전리품들도 수백억 수준으로 장비를 제외한 전리품은 가공이 되어 현대 문명을 유지하는 에너지 자원 및 자재들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으…. 꽝입니다.”
아쉽게도 오롤라스의 전리품 상자에서는 새벽의 기사 클래스 스톤을 얻을 수 없었다.
“뭐, 예상했어.”
“슬슬 우리 현아, 천호동 럭키 걸의 약빨이 떨어지는 것 같아?”
“무슨 섭섭한 말씀을? 유나의 투구 누가 뽑았습니까? 바로 접니다!”
“나였다면 장비 아이템 두 개는 뽑았을 것 같은데…. 다음에는 제가 전리품 상자를 열어 볼까요?”
하지만 다들 딱히 실망하거나 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제 두 번째 클리어에 성공했을 뿐이고, 클래스 스톤의 드랍률이 굉장히 낮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민국과 영웅들이 포탈에서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과 클랜 직원들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던전 타이머가 초기화되는 것을 보며 GGW 공격대가 클리어에 성공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자, 빨리빨리 옮겨!”
이어서 영웅들이 던전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을 클랜 직원들이 넘겨받아 차에 실었다.
동시에 팀장으로 보이는 직원 세 명이 GGW 공격대가 어떤 아이템을 획득했는지 꼼꼼히 종류와 수량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클래스 스톤은 없었나 보네요.”
수거팀의 과장으로 이런 자리에서 자주 본 적이 있는 여성이 슬그머니 민국에게 다가와 물었다.
30대 중반이라고 했던가? 나이에 비해 승진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능력이 있는 여성이었는데, 한국 여성답지 않게 굉장한 거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뭐, 이제 두 번째 공략에 성공했으니 길게 봐야죠.”
민국이 그녀의 가슴을 힐끔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과 GGW 공격대가 레전드리 클래스를 조합하기 위해 칠보산 쌍곡 던전을 공략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조합식을 얻기 위해 르네상스 클랜의 【A - 4】 난이도의 던전을 수많은 공격대들이 공략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백 날을 공략해 봐라. 조합식이 나오나….’
당연히 아직까지 조합식을 얻었다는 공격대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클랜의 1군 공격대가 칠보산 던전 공략을 진행할 생각인가 봐요.”
“…네? 메모리아 1군요?”
“아니요. 우리 R’s 1군.”
과장의 말에 민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들이 쌍곡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데 왜 굳이?
물론 서로의 공략에 방해되지 않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동일한 던전의 문을 열게 해주는 특수한 아이템인 ‘시간의 왜곡’이라는 아이템을 사용하면 되었다.
【A】 난이도 이상의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특수한 아이템이지만 1군과 GGW 공격대라는 【A】 난이도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두 개의 공격대를 보유한 R’s 클랜은 시간의 왜곡 아이템을 제법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1군 영웅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고 하더군요. 자신들도 쌍곡 던전을 공략해서 GGW 공격대가 클래스 스톤을 얻는데 도움이 되겠다나?”
민국의 고개가 다시 한 번 기울어졌다. 뭐, 도와준다면 나쁘지 않겠다만 ‘굳이?’라는 생각이었다.
“기존 던전들의 공략은요?”
“뭐. 올해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요. 저희 클랜이 랭커 클랜 타이틀을 다시 따낸 것도 아니고 의무적으로 공략해야 하는 던전도 몇 개 없으니까요.”
“아아….”
분명 그렇기는 했다.
하지만 지나가다가 몇 번 인사를 나눈 사이에 불과한 1군 소속 영웅들이 갑자기 GGW 를 돕기 위해 쌍곡 던전 트라이를 진행한다?
그 사실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리고 그런 민국을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수거팀 과장이 조심스레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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