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0 대구 해방 작전
“쩝.”
유승철이라는 남자 영웅에게 딱히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회의 내내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없던 감정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물론, 이다은을 이용해 자신이 먼저 가볍게 놀렸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끝난 사이 아닌가?’
엄밀히 말해 저렇게까지 날을 세울 일은 아니었다.
그 이다은이 자신의 여자 친구처럼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들의 대접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건 뭐 자격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런 유승철의 무례한 태도 때문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민국의 눈치를 보며 쩔쩔 매는 건 오늘 회의에 나선 르네상스 클랜의 영웅들이었다. 심지어 이번 미팅은 르네상스 클랜의 던전 관리에 영향이 있는 미팅이었다.
GGW 공격대가 【A - 3】, 【A - 4】 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해주면 그 동안 클랜의 1군 공격대가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영웅의 정신력이 대단하고, 부활석이 있다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던전에서 싸우다 보면 금방 정신이 쉽게 피폐해지기 마련.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공격대의 휴식이 필수였다.
“유승철 지원 팀장?”
“네.”
“지원팀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난 것 같은데 이제 볼일을 보러 가시면 될 것 같네요.”
“네? 하지만 공대장님!”
“어서요.”
결국 보다 못한 차은비가 회의실에서 유승철을 쫓아내는 것으로 상황은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었다.
유승철 역시 지금의 상황에서 화를 해봤자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밖에 되지 않았기에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그와 이다은의 관계는 르네상스 클랜의 영웅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승철이 나가자 르네상스 클랜의 힐러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지원 팀장이 성격은 조금 더러워도 저렇게까지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닌데….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나요?”
“글쎄요?”
민국이 모른 척 어깨를 으쓱이며 르네상스 클랜이 준비한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 민국의 대답에 르네상스 클랜의 영웅들은 더욱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유승철의 여자 친구인 반설희는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민국의 시선이 힐끗 반설희에게 향했다. 회의를 하는 동안 민국은 그녀가 유승철과 특별한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을 세우던 유승철의 얼굴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순간 민국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지어졌다.
“딱히 그 남자분과 연이 있는 건 아닌데, 아무튼 기분은 좋지 않네요. 르네상스 클랜과는 ‘새벽의 성처녀’ 조합식으로 인해 좋은 인연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만의 착각이었나요?”
“아, 아니요!”
“…그건 제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민국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는 차은비 공대장.
그런 차은비를 잠시 보던 민국이 르네상스 클랜의 세 여인과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뭐, 그렇다면 회의 끝나면 우리끼리 밥 아니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서로 화해하는 기념으로 친목도 다질 겸 말이죠. 제가 사겠습니다.”
“정…말요?”
예상치 못한 민국의 제안에 르네상스 클랜의 힐러장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그런 자리라면 무조건 가야겠네요. 한민국 공대장님의 리딩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공대장 차은비 역시 민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쉽사리 답을 주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남자 친구의 눈치가 보이는 반설희였다.
“반설희 영웅님은요?”
“네, 네?”
민국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반설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선천적으로 얼빠 기질이 있는 그는 민국처럼 잘생긴 남자에게 굉장히 약했다. 그가 유승철을 만나고 있는 이유 역시 유승철이 클랜 내에서 가장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한민국은….
잘생긴 것도 잘생긴 것이지만 떠나 일단 분위기 자체가 다른 남자와는 조금 달랐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라는 게 있다고 해야 하나?
“같이 가시죠? 제가 예쁘게 한 잔 말아 드릴게요.”
“네, 네!”
눈웃음과 함께 다시 한 번 제안하는 민국의 모습에 반설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면서 그녀는 진동이 오는 핸드폰의 전원을 슬며시 꺼버렸다. 순간 남자친구의 이름인 유승철이 보이기는 했지만, 딱히 양심의 가책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파트 한 채에 힐러장님과도 잤으면서 뭐….’
그에 반해 클랜원들끼리 모여 술만 홀짝 할 예정인 자신은 어디까지나 사회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 * *
르네상스 클랜과의 던전 공략 허가와 관련된 미팅에서 민국은 손쉽게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다은의 자존감을 세워주며 유승철이라는 전 남친을 놀리려던 일이 살짝 커지면서 르네상스 클랜의 세 여인과 몸을 섞기는 했지만, 딱히 후회는 없었다.
차은비와 힐러장의 몸매는 발군이었고, 떡 감도 굉장히 좋았다. 게다가 둘 다 실력 있는 영웅들. 이렇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고….
“아흑! 억! 어흑! 제발…! 좋아! 너무 좋아!!! 아악! 악!!!”
유승철의 애인이라는 반설희는 몇 번이나 보내버리면서 그녀의 정신과 몸에 자신의 존재를 완벽하게 새겨놓을 수 있었다.
남자 영웅의 스킬과 정력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면 유승철이라는 남자가 제법 고생을 할 게 분명했다.
아무튼 이건 회의 때 자신을 노려본 일에 대한 복수였다.
뭐, 잘 나가는 남자들끼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두고 싸운다고 하니 그런 케이스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오늘 일정은 전에 한 번 공략했던 도살자 던전 공략을 끝내고, 천안으로 이동. 천안의 【A - 3】 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할 예정입니다.”
“…드디어 【A - 3】 으로 가네요.”
“겁먹을 필요 없잖아? 어차피 똑같은 8 등급 녀석을 상대하는 것뿐이야.”
상위 난이도 던전의 공략 일정에도 불구하고 GGW 팀원들은 제법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공략해야 하는 몬스터의 등급은 지금까지 상대한 놈들과 비슷한 8 등급 개체.
거기에 쌍곡 던전에서 만났던 거신 사나스와 같은 삼대장 개체를 생각하면 정말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 놈들은 정말 같은 8 등급이라도 눈에 띄게 강한 놈들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추세라면 여름이 지나기 전에 【A - 2】 난이도의 던전 공략에도 성공하는 것 아닐까?”
“지금도 부활석을 때려대면 가능할 걸?”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평균 장비 레벨이 1140 정도는 되어야지. 무턱대고 덤벼드는 건 부활석 낭비 뿐 아니라 몸과 정신만 고생할 뿐이야.”
유나의 말에 지젤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A - 4】 에서 나오는 놈들과 【A - 2】 에서 나오는 놈들은 똑같은 8 등급이라도 어느 정도 강함의 차이를 보이곤 했다. 그리고 민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아. 준비는 철저히 해야지. 그래도 일단 가을이 오기 전에 【A - 2】 난이도의 던전 공략에 들어갈 생각이야.”
르네상스 클랜의 【A – 3】 던전의 공략 일정을 잡은 건 불꽃의 광채 퀘스트 때문만이 아니었다.
천안 던전에서는 공격대의 스펙 상승에 도움이 되는 장비 아이템들을 얻을 수 있었다. 민국은 그것을 목표로 던전을 뺑뺑이 돌 생각이었다.
그렇게 스펙을 올리면서 큐우♡의 퀘스트까지 끝내면 불꽃의 광채라는 클래스 스톤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 불꽃의 광채가 사용하는 파괴의 교향곡은 아군의 딜량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켜 줄 터. 그 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다는 【A - 2】 난이도의 던전 공략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었다.
“【A - 2】 난이도의 공략이면….”
유나가 힐끔 민국의 얼굴을 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예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대구 오염지대 해방. 슬슬 시작해야지.”
그리고 민국의 그녀의 조그마한 머리에 자신의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정말로 시작하나 보네.”
“거기 접근 금지 지역 아니야?”
“우리 실력이라면 허가도 쉽게 나오지 않을까요?”
“아…. 우리가 그 정도 실력이 되긴 하는구나. 괜히 기분이 이상하다.”
생각 이상으로 차분한 목소리들.
다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어투였다. 최유나나 신나연처럼 대구 해방에 사명감을 불태우는 이도 있었다. 유나의 경우는 복수심이라고 설명하는 게 더욱 옳은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런 팀원들을 보며 민국이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다시 바쁘게 움직일 예정이니, 다들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목표로 한 대구의 오염지대를 해방하려면 【A - 3】, 【A - 4】 난이도의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해 불꽃의 광채 퀘스트를 해결해야 했다.
이어서 일반인 한 명을 임신시키는 퀘스트도 성공시켜야 했다.
[저는 언제 데리고 갈 생각이에요? 나도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서른인데….]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이 첫 남자이자 마지막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성으로 할 생각이었다.
* * *
현정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시간까지는 이제 1분이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멀리 이화 클랜의 클랜장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영웅 시절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 약속은 정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현정의 앞으로 다가온 이화 클랜의 클랜장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로 그대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뜻 보면 무례해 보이는 행동이겠지만 그녀와 오현정은 영웅 시절 때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 때문에 현정은 그런 이화 클랜장의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웬일이야? 요즘 잘나가는 장미 방패단이 우리 같은 누추한 클랜에게 연락을 다하고?”
“말이 반대로 된 거 아니야? 잘 나가는 랭커 클랜은 우리가 아니라 이화지.”
오현정의 말에 이화 클랜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랭커 클랜은 지난 성과를 밑바탕으로 얻어낸 타이틀에 불과했다. 그리고 R’s는 내년에 당연하게 랭커 클랜 타이틀을 따낼 거라 여겨지는 클랜이었다.
R’s 에는 그 한민국과 요즘 미친 듯이 상위 던전을 공략하는데 성공하면서 명성이 하늘을 뚫고 있는 GGW 공격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3년차 주제에….’
국내에서는 난이도로만 따지면 한손에 꼽히는 【A - 3】 난이도 던전까지 공략에 성공한 공격대였다. 까놓고 말해 지금 R’s 의 1군보다도 전투 능력이 더 뛰어나지 않을까?
아무튼 강채영의 은퇴 이후 마음고생으로 늙어가던 이시연 영웅 협회장이 한민국과 GGW 공격대의 활약으로 본래의 외모를 되찾았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러면 내년에도 랭커 클랜은 우리가 할 테니까 한민국이란 GGW 친구들 좀 우리에게 지원해 주지 않을래? 이적료는 클랜 하우스 팔아서라도 어떻게든 마련해 줄게.”
“너 지금 나보고 제부를 팔라고 하는 거야?”
“…아, 씁. 그랬지.”
친구의 말에 이화 클랜장은 싸르르 아파오는 자신의 배를 움켜쥐었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와 같은 클랜인 것도 배가 아픈데 심지어 둘은 가족이기도 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오현아가 먼저 가고 나중에 오현정도 함께….
“설마…. 그 헛소문 진짜는 아니지?”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야?”
“…오씨 자매가 쌍으로 한민국한테 간다는 그런 소문.”
이어지는 이화 클랜장의 말에 오현정의 눈동자에 당황이 깃들었다. 하지만 곧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야야, 언니도 시집 좀 가보자. 물론, 지금은 헛소문이니까 전혀 신경 안 써도 돼.”
“나중에는 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거네? 이런 씨발…. 아무튼 너랑은 아무것도 안 해. 던전 허가도 내줄 수 없어.”
“용건도 안 꺼냈는데?”
“꺼내지마. 그냥 안 들을 거야. 아무튼 배알 꼴려서 다 싫어.”
갑자기 땡깡을 부리는 전우의 행동에 오현정은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콧등을 매만졌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이화 클랜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화 1군 친구들. 현재 일정 어때? 요즘 여유 있지?”
“……그렇기는 한데, 왜?”
의외의 질문에 이화 클랜장이 자신의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1군 수준의 영웅이라면 함부로 스케줄을 짤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돌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지금은 잠잠해 졌다지만 올해 초만 하더라도 던전 브레이크에 대한 위기감과 어둠 괴물과의 전면전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영웅 관리에 대해 클랜 내부적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유를 묻는 이화 클랜장의 말에 현정은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차들과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서울을 지키는 수많은 영웅들과 군인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거나 방어선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사람들은 어둠의 괴물 및 오염된 대지의 공포에 휩싸여야 했다. 그리고 민국은 이 대한민국에서 그런 공포를 없앨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강채영도 생각은 했지만 실천은 하지 못했던 바로 그런 계획이었다.
오현정의 눈이 다시 이화 클랜장에게 향했다. 그녀의 입에서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GGW 친구들. 보름 뒤에 대구로 내려갈 거야.”
“…대구?”
“응. 대구에서 【A - 2】 난이도 공략을 진행하면서 대구 던전들을 하나씩 무너뜨리는 일정이야. 우리 뿐 아니라 이미 메모리아 클랜 1군이 순차적으로 돕기로 협의했고, 우리 1군도 짬을 내서 대구 던전을 시작할 거야.”
“…뭐, 어?!”
“너랑 대화가 끝나면 바로 강한 여자들과 미팅을 하러 갈 생각이야, 르네상스 알지? 걔네들과도 협의가 끝난 내용이야.”
계속해서 이어지는 현정의 말에 이화 클랜장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건 단순한 던전 공략이 아니었다. 대구는 기껏해야 십여 년 전에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장소로 이 땅의 국민들에게는 많은 설움과 한이 담겨 있는 지역이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땅이 바로 대구였다.
만약 GGW 공격대가 그곳의 던전을 모두 무너뜨리고 오염된 대지를 걷어내는데 성공한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한민국은 베트남 던전 브레이크 때 가루다의 심복인 가라이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 공대장이었다.
“꿀꺽.”
그리고 한민국을 비롯한 영웅들의 활약으로 대구 해방에 성공했을 때를 떠올리는 순간 이화 클랜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랭커 클랜이라 불리는 자신들이라면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제안이었다.ㅁ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참. 그러면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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