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4 국민 영웅
어둠 괴물의 종족 중 하나인 붉은 오크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종족이었다.
던전 브레이크를 통해 인류의 땅을 침범했던 어둠 괴물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녀석 중 하나인 것도 모자라….
“인류를 구성하는 성별 중 남자의 씨를 말린 장본인이 바로 붉은 오크거든요.”
소정의 말을 들으며 민국은 붉은 오크의 특성을 떠올렸다.
남자 레이더라도 달린 것인지 고추를 가진 성별은 어떻게든 잡아 죽이는 괴상한 생명체. 때문에 붉은 오크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 근방은 군대가 아니라 공격대가 출동해 붉은 오크를 씨를 말리곤 했다.
아무튼 그 숫자가 워낙 많은 놈들답게 게이트를 통해 오갈 수 있는 던전 역시 붉은 오크라는 코드 명이 붙은 네임드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 중 ‘붉은 오크 대장 – 칸발라’는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개체 중 한 녀석으로 【S】 난이도의 던전에 있을 거라 추정하고 있는 붉은 오크 킹을 제외하면 붉은 오크 종족 중 가장 강력한 어둠 괴물이라고 손꼽는 녀석이었다.
“아무튼 이 ‘칸발라’라는 놈은 레이드 시작부터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난다고 해.”
브리핑을 시작하면서 민국이 손으로 칸발라를 가리켰다.
자신을 향한 남자 영웅의 손짓에 칸발라가 히죽 웃었다. 어서 빨리 자신과 붙어보자는 도발적인 얼굴이었다.
“지금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뻔뻔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사방에서 붉은 오크 무리들이 나타날 거야.”
당연하지만 이 붉은 오크 무리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게 초반 공략의 핵심이었다.
부하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칸발라의 생명력이 계속해서 회복되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영웅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은 한계가 있는 만큼 전투가 길어지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일단 최유나.”
“네!”
자신을 지목하는 민국의 말에 유나가 손을 기합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아빠의 원수나 다름없는 칸발라를 앞에 둔 그녀는 전의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민국은 이번 칸발라 레이드에 있어 유나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생각이었다. 일명 특임조였다.
“너는 ‘칸발라’ 레이드의 모든 페이즈에서 붉은 오크 마법사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을 거야.”
“…네? 오크 마법사요?”
“그래. 공략 영상을 통해 본 적 있지?”
유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민국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모든 딜러들은 나타나는 부하들을 처리할 겁니다. 아시다시피 전투는 시작부터 난전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리고 민국은 난전에 관해서는 개개인의 기량과 센스에 맡길 생각이었다.
레이드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년 가까이 손발을 맞춰온 사이. 거기까지는 굳이 자신이 설명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민국의 별다른 설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앉은 영웅들 역시 알아들었다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본진이 오크 부하들을 상대하기 시작하면 유나 너는 나타나는 붉은 오크 괴물 중 하나인 붉은 오크 마법사를 찾아야 해.”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나타나는 건가요?”
“그건 확실히 알 수 없어. 일단 나도 도와주기는 할 거야.”
영상에는 전투 시작 후 1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부터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트라이를 경험해 보지 못한 레이드인 만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민국의 시선이 유나에게 향했다.
“아무튼 붉은 오크 마법사가 나타나면 그 녀석이 사용하는 광폭화 스킬을 방해해야 돼.”
“그…. 눈이 붉게 빛나면서 만세를 부르는 주문이요?”
“맞아. 그것을 무조건 차단하는 거야.”
민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일단 광폭화 스킬이 발동되면 붉은 오크들의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대폭 상승하게 된다. 한 마디로 김소정이 사용하는 ‘파괴의 교향곡’과 비슷한 능력을 붉은 오크가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당연하지만 네임드인 칸발라 역시 붉은 오크.
결국 마법사가 광폭화가 발동에 성공하면 트라이를 진행하는 공격대는 일단 전멸이라고 보면 되었다.
“가능하겠어?”
“최,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민국의 물음에 유나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실수하면 공격대가 전멸이라는 것 때문에 부담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전 속에서 오크 마법사를 견제할 수 있는 영웅은 유나밖에 없었다.
근접 딜러들은 난전 속에서 마법사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 테고, 정예린과 신나연은 유나의 슈팅스타 모드에 비해 공격 사거리가 많이 짧은 편이었다.
그렇게 유나에게 특수 임무를 맡긴 민국을 계속해서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A – 2】 난이도에서 등장하는 8 등급 네임드답게 ‘붉은 오크 대장 – 칸발라’는 다양한 능력으로 영웅들을 압박했다.
때문에 붉은 오크 무리를 상대하면서 탱커는 디버프 상황에 따라 탱킹을 인계해야 했고, 딜러와 힐러들은 전투 내내 생겨나는 붉은 바닥을 피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붉은 오크가 아닌 오우거가 나타나게 되면 모든 딜러들이 화력을 집중해서 오우거를 쓰러뜨려야 했다.
당연하지만 이때도 붉은 오크 마법사의 견제는 필수였다.
“여기에 자신에게 붉은 저주가 걸리면 바로 본진에서 이탈, 전장의 외곽에 저주가 풀릴 때 생겨나는 피의 땅을 유도하듯 깔고 와야 합니다. 당연히 그 위치는 난전이 벌어지는 반대쪽이어야겠죠?”
계속되는 민국의 설명에 GGW 공격대의 영웅들은 자신이 들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열심히 중얼거리면서 외우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모든 설명이 끝나고 트라이가 시작되었다.
“11시 방향에 오크 마법사!”
“하앗!!!”
민국의 지시와 함께 유나의 화살이 번개처럼 쏘아졌다.
이 녀석만큼은 꼭 쓰러뜨리고 싶다는 의지의 반영일까?
오크 마법사를 견제하는 유나의 활약은 민국의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오크 무리를 상대하는 전투 또한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붉은 저주! 정예린!”
“핫?!”
전투에 정신이 팔린 까닭에 자신의 디버프 상태를 체크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민국의 지적에 정예린이 빠르게 본진에서 이탈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황. 본진 근처에 피의 땅에 생겨났다.
“피의 땅 반대쪽으로 본진 이동!”
만약 영웅들이 피의 땅을 밟게 되면 본인의 생명력을 뺏기는 것과 동시에 칸발라의 생명력을 채워주기 때문에 민국은 어쩔 수 없이 본진을 외곽으로 옮겨야 했다.
당연히 저 위치에서는 붉은 오크 무리들도 상대할 수 없었다. 아무리 무기를 휘둘러도 생명력이 계속해서 회복되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해요…!”
자신의 크나큰 실수에 정예린이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초보 영웅과도 같은 실수였다.
하지만 민국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 트라이하는 전투인 만큼 모든 이들이 잘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첫 번째 트라이는 실패했다.
하지만 2 페이즈까지 진도를 뺀 것을 생각하면 성과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트라이를 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건 마법사의 광폭화 버프였는데, 의외로 유나의 견제 능력이 제법 괜찮았다.
“이야! 우리 유나, 완전히 백발백중인데?”
부활석으로 다시 되살아난 소정이 유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트라이 자체는 실패했지만, 유나의 활약은 그만큼 눈이 부셨다. 오크 마법사를 견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난전 속에서 아군이 밀릴 때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화살이 붉은 오크의 급소를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히히. 제가 이때를 위해서 궁술을 갈고 닦았죠.”
“역시 우리 막내 아주 듬직해.”
그런 두 여성의 대화를 들으며 민국도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유나가 이 정도의 집중력만을 보여주면 붉은 오크 마법사 문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처음 모습을 생각하면 진짜 많이 성장하기는 했네.’
어느새 베테랑 다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는 유나를 보며 민국은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GGW 공격대의 원년 멤버.
원래는 오현아와 함께 영웅 라이센스를 따기 위해 모였던 임시 멤버 중 하나였지만 그 이후에도 유나는 몇 년간 자신과 레이드를 함께했고, 그것을 발판으로 기량이 눈이 부시게 발전한 영웅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특수 임무의 성공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러면 피드백 후 다시 트라이 들어가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트라이였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한 점이 굉장히 많았다.
때문에 민국은 팀원들의 움직임에서 보충해야 할 것을 짧게 피드백을 하고는 다시 트라이에 들어갔다.
[어리석은 놈들…! 너희들에게 죽음을 선사해주마!]
전투 시작되자마자 송곳니가 코 근처까지 삐죽 솟아오른 거대한 오크가 민국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오현아가 던진 방패가 칸발라의 얼굴을 때렸다.
[감히!]
그렇게 메인 탱커가 칸발라의 어그로를 쌓는 동안 부 탱커인 타냐와 딜러들은 오크 무리들을 향해 전투를 시작했다.
민국 역시 부상을 입은 팀원들에게 회복 능력을 사용하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오크들의 무기를 지팡이로 쳐내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숫자가 굉장히 많았기에 난전 속에서는 힐러들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기본적인 전투 능력은 가지고 있어야 딜러들이 달려드는 오크들을 처리할 수 있을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네 년들의 생명력…! 내가 맛있게 먹어주마!]
그렇게 전투가 진행되는 사이 칸발라가 무언가를 흩뿌리듯 던졌다.
“……!”
그리고 칸발라의 손에서 던져지는 무언가의 궤적을 민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확인했다. 이어서 그 궤적이 정예린에게 닿는 순간.
“정예린!”
그녀가 빠르게 본진에서 이탈, 전장의 외곽으로 향했다. 그리고 외곽에서 피의 땅을 생성시키고는 다시 본진으로 복귀했다.
“유나야! 12시 쪽에 마법사!”
“저 엄호해주세요! 슈팅스타로 처리할게요!!!”
“마이! 여기 이 두 놈 좀 처리해줘!”
“하잇!”
GGW 공격대가 칸발라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두 번에 불과했다.
그러나 GGW 공격대의 팀원들이 합을 맞춘 횟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 더욱이 민국의 카르텔에 속한 그녀들 사이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친자매들처럼 손발이 척척 맞는 영웅들의 활약에 그녀들에게 달려들었던 붉은 오크들이 비명과 녹색 피를 뿌리며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김소정!”
그렇게 모든 오크들이 쓰러지자 민국의 지시와 함께 김소정이 자신의 궁극기라 할 수 있는 파괴의 교향곡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소정의 손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움직일수록 그녀의 몸에서 붉은색의 마력이 폭발하듯 요동쳤다. 이어서 그녀를 중심으로 마력의 충격파가 터져 나와 영웅들을 감쌌다.
“극딜!!!”
“이야아아아아앗!”
여러 고함 소리와 함께 딜러들이 칸발라를 향해 들려 들었다.
교향곡의 효과 때문에 온 몸의 마력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눈앞에 칸발라가 아닌 십이 재앙이 있어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유나! 8시!”
“넵!”
그런 와중에도 민국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오크 마법사의 위치를 빠르게 체크해 유나에게 알려주었다. 이미 슈팅스타 모드에 들어가 있던 유나의 커다란 화살이 붉은 오크 마법사의 몸을 꿰뚫기 시작했다.
* * *
어둠 괴물 중 하나인 붉은 오크에 대한 한국 영웅들의 적대감은 대단히 높았다.
간단한 이유였는데, 유나의 경우처럼 던전 브레이크 때 국민들을 가장 많이 살해한 어둠 괴물이기 붉은 오크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일까?
두 번째 레이드에서 탱커의 인계 실수로 다시 전멸하기는 했지만, GGW 공격대는 정확히 다섯 번의 트라이 끝에 칸발라를 공략하는 게 성공했다.
비슷한 난이도의 괴물을 상대로 수십 번 트라이를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랄 만한 성과였다. 생각 이상의 성과에 민국도 깜짝 놀랐다.
‘칸발라라는 놈이 딱히 쉬운 네임드에 속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지금까지 팀원들이 힘을 숨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좋았던 트라이였다.
민국의 시선이 칸발라의 시체를 두고 기뻐하는 팀원들에게 향했다. 물론 전투 자체가 깔끔하게 끝난 건 아니었다.
칸발라를 쓰러뜨리기 직전까지 치열하게 진행되었던 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처절한 수준. 때문에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이는 공대장인 민국을 포함해 단 네 명에 불과했다.
탱커와 근접 딜러는 전부 사망했고, 원거리 딜러인 신나연과 최유나 그리고 힐러 중에서는 지젤이 그나마 마지막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어거지로 잡은 셈이지만 아무튼 이것도 클리어는 클리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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