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공포와 부정한 뱀
* * *
퍼어억!
장비를 뒤덮은 흙먼지 때문에 꾀죄죄하게 변한 미녀가 괴물의 몸통박치기를 얻어맞고 뒤로 날아갔다. 물수제비처럼 비스듬하게 지면에서 몇 번이나 튕긴 여성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사망이었다.
“…미친.”
이어서 괴물이 만들어낸 검은 바람의 폭풍이 자신을 노리기 시작하자 민국은 주위를 확인했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현아 사망, 부 탱커인 타냐는 진즉에 죽었고….’
그 전에 딜러 넷과 켄달도 사망했다.
그러니까 남은 멤버는 지젤과 자신을 포함해 어떻게든 놈의 급소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는 최유나 뿐이었다. 괴물의 남은 생명력을 생각하면 이건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캬아아아악!]
승리를 직감한 듯 괴물의 포효가 사방을 흔들었다. 분명 괜찮게 진행이 되던 레이드였는데….
“쯧, 마음대로 안 되네.”
역시 십이 재앙의 심복은 결코 우습게 볼 놈들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패턴이 정석처럼 이어지는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찬드라니암은 공격대의 약점을 정확히 노리고, 패턴을 뒤바꿔서 공격해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점을 이용해서 녀석에게 함정을 팠는데….
“시발, 심리전을 걸어오네?”
자신에게 날아오는 부정의 폭풍을 보며 민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어서 엄청난 고통이 민국을 휘감았다. 즉사였다.
“아…. 이거 금방 안 끝나겠는데?”
부활석의 힘을 이용해 되살아난 민국은 가만히 조금 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놈은 분명 자신이 공격대를 지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자신을 노렸었고, 그 점을 이용해서 몇 번이나 치명타를 넣은 것 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놈이 바로 패턴을 바꿨다는 점이었다.
자신을 노리는 척 달려들었다가 몸을 틀며 부 탱커 타냐 루스를 향해 그대로 몸통 박치기를 먹였던 것이다.
전투가 거의 끝나간다는 타이밍에 숨을 돌리고 있던 타냐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의 공격에 포탄처럼 뒤로 튕겨져 나갔고, 바로 사망했다.
놈의 공격을 받아내 줄 탱커가 한 명 사망했으니 그 뒤는 안 봐도 뻔했다. 그렇다고 오현아가 버티는 동안 놈을 쓰러뜨릴 수 있는 화력이 나온 것도 아니고 말이다.
“던전 속에서 마주치는 일반적인 네임드와는 전투 방법이 아예 달라요. 평소의 네임드들은 자신의 능력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지만 찬드라니암은 마치….”
“그 강한 힘으로 심리전을 걸면서 우리를 위협한다는 거지."
소정의 말에 민국은 살포시 눈살을 찡그렸다.
“녀석의 노림수만 파훼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더러운 싸움이 되겠어.”
하지만 그 뿐이었다. 민국은 이러한 싸움에서 져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바일 가상현실게임인 ‘우주 소녀 전쟁’을 플레이할 때도 월퍼킬만 못했을 뿐, 모든 네임드를 공략하는데 성공했던 게이머가 바로 그였다.
이번에도 그 결과는 다르지 않을 터였다.
“저희들도 열심히 할게요.”
“반드시 잡고야 말겠어.”
민국의 말을 들은 현아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리고 아깝게 놈의 목숨을 끊어내지 못했던 다른 영웅들도 전의를 불태웠다.
* * *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듭니다, 무플런님.”
찬드라니암이 말했다.
인간들의 공세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셌고, 정교했다. 공허의 마력이 모일 때 마다 내보냈던 자신의 외부 세력은 인간들의 손에 몰살당한지 오래였고 자신의 상황 또한 좋지 않았다.
최정예 인간 영웅이 분명해 보이는 GGW 공격대와의 전투에서 몇 번이나 승리를 거뒀던 찬드라니암이지만 카오스의 힘이 담긴 부활석은 해결하지 못했다.
인간 영웅이 던전에 진입했을 때 휘하의 괴물들이 공허의 마력으로 던전에 설치된 부활석을 파괴한 후, 자신이 놈들을 쓸어버리는 결과가 나오면 또 모르겠지만….
던전의 외부는 인간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통행이 제한되고 있었다.
[지원이라….]
뿔의 여성이 말했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우킹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당장 병력을 빼기는 곤란한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길어봤자 사흘일 것 같습니다.”
찬드라니암은 공허에 있을 때부터 무플런 휘하에서 여러 전장을 오갔던 전투의 베테랑이었다.
때문에 상대의 기량과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찬드라니암의 대답에 무플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주일. 그 때까지만 버틴다면 훔바바가 너를 도우러 갈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무플런은 냉정하게 통신을 끊었다.
그렇게 꺼진 수정구 앞에서 찬드라니암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찬드라니암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일주일을 버티라고?”
GGW 공격대라 불리는 인간 영웅들은 하루에도 열 번이 넘을 정도로 쉬지 않고 자신을 공격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들이었지만, 이제는 전투 한 번 한 번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어제의 전투 때는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찬드라니암이었다.
마침 운 좋게 맹독 항아리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영혼은 공허 속에서 울부짖고 있을 터였다. 영혼을 잃은 몸뚱아리는 본능만 남아 던전이 무너지기 전까지 발버둥을 쳤을 테고 말이다.
오랜 기간을 살아왔지만 자신은 아직 죽기에 일렀다.
“하지만 버텨야 돼…. 그래야만…….”
무플란님의 말씀하신 도움이 도착할 터였다.
그 상대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훔바바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훔바바의 전투력만큼은 그녀도 인정하는 바. 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인간들을 몰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렇게 찬드라니암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인간들의 공세를 이틀이나 더 버텨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한계였다. 그녀의 통신이 훔바바에게 향했다.
[뭐야?]
얼굴을 전부 뒤덮는 가면을 쓴 네 팔의 인간형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찬드라니암이 쏜살같이 말했다.
“인간들의 공격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나라도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 것 같군.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지원의 속도를 높여줬으면 좋겠다.”
[…어?]
이어서 들려오는 나사빠진 놈의 목소리. 그 순간 찬드라니암은 왠지 모를 불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찬드라니암이 인간들의 공격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거라고? 캬하하하! 이거 정말인가? 고작 그 정도로 무플런님의 오른팔이라고 자신하는 거야?]
“…놈들은 강하다.”
[놈? 누가? 인간들이?!]
찬드라니암이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을 자극하는 훔바바의 도발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아무리 떠들어봤자 놈은 자신을 도우러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든 찬드라니암은 강제로 통신을 종료했다.
입 아프게 놈과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체력만 낭비할 뿐이었다.
“…….”
짧은 고민과 함께 찬드라니암은 무플런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시도했던 통신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았다.
“어, 어째서?”
마치 자신을 외면하는 것 같은 무플런의 행동에 찬드라니암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홀로 있는 동공에 울려퍼졌다.
* * *
“오늘은 무조건 잡는다.”
현아가 의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앞으로 10분 정도만 더 가면 GGW 공격대는 찬드라니암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도 긴장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잘하면 오늘 끝낼 수 있겠네.’
민국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십이 재앙인 무플런의 심복답게 찬드라니암의 정말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무려 이십여일이 넘도록 트라이를 하고 나서야 클리어 각이 보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가루다도 이 정도로 공략이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아, 물론 가루다는 힘을 잃은 상태였지만. 아무튼 녀석은 그만큼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계속된 전투를 통해 GGW의 멤버들은 찬드라니암의 공격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깨진 부활석이 백 개를 훌쩍 넘겼지만, 놈만 잡을 수 있다면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드넓은 공동의 중앙에 찬드라니암이 몸을 똬리를 튼 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의 만났던 모습과는 달리 몸의 비늘 여기저기가 깨진 모습이었지만, 자신들을 바라보는 놈의 눈동자는 아직 생생한 빛이 느껴졌다.
“3 트. 그 안에 끝낸다.”
짧게 심호흡을 한 민국이 마력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트라이가 길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서로의 패는 전부 알고 있는 만큼 이제부터는 집중력 싸움이었다.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콰아아앙!
마력과 공허의 힘이 부딪치며 쉴 새 없이 폭발을 일으켰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독 항아리!”
펑하는 소리와 함께 깨진 항아리에서 녹빛의 연기가 회오리치듯 퍼졌다.
지젤이 빠르게 중독된 이들에게 정화를 사용했고, 켄달의 회복 능력이 독에 중독된 이들의 생명력을 회복시켰다.
찬드라니암은 공포와 부정의 힘을 사용하며 GGW 공격대를 공격했다.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공격이었지만, 열 명의 영웅들은 환상적인 호흡을 보이며 찬드라니암의 공세를 무력화시켰다.
그렇게 전투를 이어나가던 도중이었다. 민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찬드라니암을 바라봤다.
‘뭐지?’
놈의 공격은 분명 위협적이었다.
아군의 움직임을 제한시키고, 공포와 부정의 힘을 사용하는 패턴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녀석의 의도가 너무나도 뻔히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나사가 빠진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어둠의 괴물들처럼 말이다.
‘뭔가 이상한데….’
순간적으로 함정이라는 생각이 민국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만큼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은 교활한 괴물이었다. 하지만 놈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으니 함정인 것 같으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전투를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차피 문제가 생기면…….’
다음 트라이 때 조심하면 되었다.
찝찝함 속에서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마력과 마력이 충돌하면서 폭발을 일으켰고, 주변의 지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
찬드라니암은 자신의 모든 힘을 이용해서 인간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파훼하며 계속해서 마력이 섞인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인간들의 공격은 자신의 단단한 비늘에 계속해서 상처를 내고 있었다. 이제는 한계였다.
‘어째서….’
무플런의 얼굴이 찬드라니암의 눈앞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공허에서부터 충성을 맹세하고, 차원의 통로를 넘어 이곳까지 함께했건만. 이렇게나 쉽게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무플런님의 곁이 아닌 남부로 갔을 때부터가 문제였던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자신의 목숨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꺄하하하하하하!!!]
찬드라니암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전투에 집중해!”
갑작스러운 찬드라니암의 행동에 멈칫하는 이들을 향해 민국이 외쳤다. 저런 상황에서 찬드라니암의 몸통 박치기가 근접 거리의 영웅들을 휩쓸고 나면?
바로 리트라이였다.
[꺄하하하!]
찬드라니암은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닌 모든 공허와 부정의 마력을 밖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민국의 지시도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연달아 날아오는 놈의 공격 패턴을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씨발, 공격 패턴도 적당히 스킬 쿨에 맞춰서 나와야지…! 밸런스가 안 맞잖아!”
계속되는 찬드라니암의 공격에 궁극기가 전부 소모되는 것도 모자라 힐러들의 힐 업도 점차 밀리고 있었다.
“큿…!”
결국 체력이 가장 뒤떨어지는 정예린이 먼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어서 최유나도 자리에서 쓰러졌다.
콰왕! 쾅!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의 회오리는 여전히 사방을 뒤덮었다. 그리고 시라누이 마이와 켄달 마저 쓰러졌을 때. 찬드라니암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계속된 전투로 엉망이 된 찬드라니암의 고개가 쿵하고 떨어졌다. 마치 자신의 목을 잘라달라는 듯 목을 길게 뺀 모양새였다. 실제로 김소정이 대검을 들고 놈의 목을 겨눴을 때 찬드라니암은 눈을 깜빡이면서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