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 공포와 부정한 뱀
* * *
“자, 잡은 건가…?”
민국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그런 걸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전장은 치열했던 전투로 엉망이었다. 마력과 공허의 힘이 쉴 새 없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아무튼 운 좋게 첫 번째 트라이로 녀석을 잡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 조금은 당황스러웠던 그리고 찝찝했던 전투였다.
‘그래도 놈을 잡는 데는 성공했으니….’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찬드라니암의 던전이 브레이크까지 얼마 남지 않았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공략 실패가 하루하루 이어질 때 마다 인도 장군들의 살이 쪽쪽 빠지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 공략의 성공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 것 같았다.
십이 재앙끼리의 충돌도 골치가 아픈 상황에 인도에 찬드라니암의 던전이 브레이크 된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무튼 한숨 돌린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찬드라니암의 목에 여전히 대검을 겨눈 채, 김소정이 물었다.
평소라면 민국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바로 베어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찬드라니암이 십이 재앙인 무플런의 심복이라는 점, 그리고 가루다라는 선례가 있는 까닭에 소정은 놈의 움직임만 제압했을 뿐, 마음대로 녀석의 처분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녀의 물음에 민국이 눈을 돌렸다.
“…….”
숨을 헐떡이면서 거친 콧김만 내쉬고 있는 괴물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민국이 찬드라니암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발자국 움직였을 때, 오현아가 말했다.
“위험해.”
“괜찮아. 어차피 부활석도 있는데다가 놈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것 같으면….”
김소정의 대검과 신나연의 마력구가 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터였다.
그리고 민국의 예상대로 놈의 눈앞까지 민국이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찬드라니암은 눈동자만을 굴렸을 뿐, 그 외의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한다…?’
선택지는 간단했다. 살리거나 혹은 죽이거나.
일단 후자의 선택은 크게 생각할 게 없었다. 먼저 놈을 이 자리에서 죽인 후, 던전을 반복 공략해서 무너뜨리면 모든 게 끝이었다.
이미 이십 여일 가까이 던전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던전의 마력으로 되살아난 네임드들을 계속 쓸어버렸던 터라 던전 자체가 보유한 공허 마력은 얼마 남지 않는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여기서 찬드라니암을 죽이고 던전 공략을 몇 번 더 성공적으로 끝내면 던전을 무너뜨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하지만 놈을 살리게 되면….’
순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가루다라는 양날의 검이 존재했다. 지금은 자신의 심복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가루다의 진정한 정체는 어둠의 괴물. 언제 인간을 배신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설령 가루다가 그럴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조심은 해야 했다. 때문에 찬드라니암을 이용해 정보를 교차하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게다가 그냥 바로 놈을 죽이자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너무나도 뒤바뀐 찬드라니암의 모습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놈은 엄청난 생존 욕구를 드러내며 자신들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패배자 같단 말이지.’
하룻밤 사이에 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뭐, 거기까지 자신이 알아야 되나 싶기는 했지만, 가루다처럼 녀석을 우리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 점을 살살 건드리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리 쉬운 일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굳이 필사적으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말을 꺼냈다가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하게 돌아가면 바로 녀석을 죽여 버리면 되었다.
민국이 찬드라니암의 노란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지 않아도 돼. 네가 일반적인 몬스터와 달리 인간들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괴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죽여라.]
“아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민국이 손 사레를 치며 다시 녀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너희 어둠 괴물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하는 말과는 달리 생존의 욕구가 굉장히 강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여기서 죽게 되면 공허의 어둠에게 영혼이 사로잡혀서 억겁의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한다지?”
[그, 그걸 네 놈이 어떻게…!?]
찬드라니암이 흠칫 몸을 떨었다. 커다란 뱀의 눈동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네 놈들과 전쟁을 벌인 기간이 얼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렇군.]
물론, 다른 이들은 전혀 모르는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민국도 뿌우와 큐우♡ 그리고 가루다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뱀을 놀리기에는 아주 충분한 정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민국은 한 마디를 더 꺼냈다.
“그리고 너희들 중 우리와 손을 잡은 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 그럴 리가?! 큿!!]
충격적인 민국의 말에 찬드라니암이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다가 살갗을 깊숙이 파고드는 날카로운 대검의 존재를 느끼고는 다시 목을 수그렸다. 그리고는 한참 뒤,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렇군. 인간계를 공격하기로 한 공허 종족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닐 테니…. 게다가 인간들 중에서도 우리와 손을 잡은 디반쉬와 같은 인간도 있으니 그 반대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겠지.]
“…어?”
잠깐 뭔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는데? 민국의 고개가 바로 뒤로 돌아갔다.
“디반쉬? 아는 사람 있어?”
“어…. 글쎄요?”
“어, 어둠 괴물과 손을 잡았다고?! 이거 완전 미친년 아니야?!”
“이름 꼭 기억해둬.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바로 누군지 찾아보고 뭐하는 년인지 확인해.”
무능한 아군은 유능한 적군보다도 훨씬 무서운 존재. 운 좋게 얻어 걸린 이 정보는 그냥 넘어갈 정보가 아니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민국은 찬드라니암의 반응을 계속해서 살폈다.
지금도 아무런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놈은 인간들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녀석을 향해 민국이 물었다.
“보아하니 무플런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모양이야?”
[…….]
민국의 물음에 찬드라니암은 대답 대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축 가라앉은 놈의 눈동자를 보며 민국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점만 잘 파고들면….
가루다처럼 어둠 괴물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지금 놈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디반쉬라는 이름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보를 캐내려면 놈과 어느 정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너 같은 놈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걸 알고 있다.”
[…우리들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군.]
“아아…. 까다로운 어둠 괴물들은 많이 상대해봐서 말이야. 아무튼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어때? 지금의 모습은 대화를 나누기에 너무 큰 것 같거든.”
[나보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라는 건가?]
“그게 싫으면 그냥 여기서 죽던가.”
너무나도 당당한 민국의 협박에 찬드라니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하지. 일단 내 목을 누르고 있는 무기나 좀 치워줬으면 좋겠군.]
“오케이.”
민국의 눈짓을 받은 김소정이 찬드라니암의 목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찬드라니암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주위에 있던 영웅들이 몸을 움찔했다. 잠시 후, 새카만 연기와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찬드라니암의 외형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오.”
그리고 가장 먼저 찬드라니암의 외형을 확인한 민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찬드라니암의 모습에 굉장히 충격적인 까닭이었다.
‘고스 로리?!’
고딕 앤 로리타의 줄임말.
찬드라니암의 인간형 모습은 자신의 비늘 색상만큼이나 까만 드레스를 입은 꼬마 숙녀의 모습이었다. 키는 155가 넘지 않는 것 같았고, 심지어 보랏빛의 머리에는 검은색의 헤드 드레스까지 쓰고 있었다.
생김새는 저렇다 하더라도 나이는 인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아무튼 굉장히 충격적인 검은색 일색의 외형이었다. 심지어 애꾸를 가린 오른쪽 눈의 안대도 검은색이었다.
“…….”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따먹었던 어둠 괴물인 라크스를 생각하면, 이런 찬드라니암의 모습은 충분히 자신의 수비 범위 안에 들어오는….
“가능.”
이었다.
* * *
‘…뭐지?’
인간들과 비슷한 외형으로 모습을 바꾼 찬드라니암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향하는 강렬한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남성체에서 나오는 아주 순수한 욕망이었다. 그 욕망의 정체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면서도 신기한 느낌이었다.
‘강력한 인간이라 그런지 겁이 없군.’
이제껏 자신과 마주했던 인간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죽었다.
그 숫자는 가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자신이 괜히 이 땅의 인간들에게서 공포의 악마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특별한 존재인 영웅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 모양 이 꼬라지 신세가 되었지만….’
어쨌든 다행인 것은 자신을 공격했던 인간의 지휘관이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일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언제 공허의 어둠에게 영혼이 붙잡힐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찬드나리암의 눈동자가 주위를 훑었다.
“…뭐야? 이거 완전 급식 아니야?”
“급식이요?”
“그래, 그럼 저 모습이 학식이겠어? 아무튼 취향이 대체 저게 뭐야?”
“일단 어둠의 괴물들이 인간들의 서브 컬쳐 문화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한 표 던질게. 그런데 방금 가능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설마 그거….”
“흐음….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데? 나연이와 비교해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이잖아? 게다가 나이로 치면 천 살은 훌쩍 넘었을 걸?”
“맞아요. 찬드라니암이 처음으로 등장했었던 기록이 2차 인도 전쟁인데, 그게 무려 60년 전의 일이예요.”
자신을 대상으로 수군수군 대화를 나누는 인간들을 뒤로한 채 찬드라니암은 조금 전의 민국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무플런님을 배신하는 행위가 되었겠군.’
그녀가 입에 올렸던 이 땅의 영웅 중 한 명인 디반쉬.
동족 몰래 무플런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인간 영웅의 이름을 말했던 것은 충성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연락을 받지 않은 무플런에 대한 사소한 원망 때문이었다.
그녀의 정체가 들킨다고 해서 딱히 무플런님에게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 이상으로 무플런님을 배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지만….
‘공허의 어둠에게 영혼이 붙잡히는 건 싫어.’
조금 전까지 인간 영웅들과 전투를 벌일 때만 하더라도 찬드라니암은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인간들은 자신을 바로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겁 없이 대화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이었다. 공허의 어둠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다시 들기 시작한 것은.
그 때 자신에게로 접근하는 인기척에 찬드라니암이 몸을 틀었다. 아니, 틀려다가 말았다. 괜히 인간들의 경계심을 높이는 짓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껴안듯 인간 김소정이 찬드라니암의 몸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짓이지?”
찬드라니암은 이상한 느낌에 당장이라도 인간 여성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인간들의 무기를 보니 저항할 의지가 빠르게 사라졌다.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니 참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김소정이 말했다.
“인간과 크게 다를 게 없네요. 심지어 루다처럼 뿔도 없고요.”
“어둠 괴물들의 원래 정체가 대체 뭐야? 어떻게 인간처럼 변신할 수 있는 거지?”
“잠깐만, 정말로 인간사회에 숨어둔 어둠 괴물도 있는 거 아니야?”
“어, 어어?!”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대화를 나누는 영웅들을 보며 찬드라니암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할 말도 없을 뿐더러 괜히 인간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찬드라니암의 눈에 다른 영웅들과 성별이 다른 민국이 보였다.
영웅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자신을 공격했었던 역전의 용사와도 같은 남자는 역시나 이 무리의 리더였던 모양이었다. 모든 대화가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킁킁.’
그리고 공허에서처럼 그는 힘 있는 수컷답게 여기 있는 여성들 대부분과 깊은 관계를 맺은 냄새가 났다. 그리고….
“?!?!?!?!?!?!?!?!”
그 냄새 속에는 자신과 같은 어둠 괴물의 체향도 진하게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