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 라비아 맥퀸
* * *
[또 왔군.]
던전의 마력이 흔들리며 요동을 쳤다. 누군가가 던전 내로 진입했다는 것을 깨달은 오발드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스르릉.
그리고는 셀 수도 없는 시간을 그와 함께한 검을 양손에 쥐었다.
[이번에는 꼭 한 년이라도 잡고야 말겠다.]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인간 무리 때문에 실비를 붙잡기 위해 나셨던 오발드는 자신의 세력을 잃고 임시 던전으로 후퇴를 해야 했다. 그리고 카오스의 힘을 빌려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나선 인간들을 여러 번이나 패퇴시켰다.
십이 재앙인 오발드는 인간들을 무너뜨리려면 그녀들을 죽이는 것이 아닌 마력의 오염시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그녀들에게 자신의 체액을 주입하는 것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크르르릉…!]
오발드의 중심에 있는 몽둥이가 크게 껄떡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암컷이 고프던 참이었다. 인간 여성들은 자신의 커다란 물건을 받아내지 못하지만 자지걸이 정도로는 삼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발드는 이번에 던전에 진입한 인간들을 상대로는 슬쩍 빈틈을 내주면서까지 한 명이라도 붙잡을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신의 노리개로 삼을 계획이었다.
[원래는 실비 년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오발드가 아쉬운 듯 혀를 쯧 찼다.
분명 무플런의 심복인 실비의 무리가 이곳에 출몰했다는 것을 느끼고 이곳을 습격한 오발드였다. 하지만 실비의 무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장소에는 어이없게도 인간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많지 않은 인간 무리들을 학살한 오발드는 주위에서 느껴지는 실비의 기운을 찾아 이 근방을 샅샅이 수색했다. 억지로 던전의 봉인을 깨면서까지 모습을 드러낸 까닭에 반드시 성과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오발드는 무플런의 심복인 실비를 찾을 수 없었고, 다수의 인간 군대에게 포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모두 공허로 돌려보내주마!]
물론, 인간들 따위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오발드와 그의 부하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쉴 새 없이 인간들을 죽여 나갔다. 하지만 놈들은 제대로 화력을 갖춘 군대였다.
그만큼 인간들이 내뿜는 화력은 만만치 않았고 공세 또한 끝이 없었다.
상위 등급의 괴물이라도 제 능력을 발휘했으면 별 거 아니었겠지만, 다들 억지로 던전을 열고 나온 까닭에 본신의 마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실비…!]
결국 오발드는 자신의 무리 대부분을 잃고, 근처의 임시 던전으로 숨어야만 했다.
마력의 대부분이 봉인된 외부에서는 수많은 인간들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던전 내에서는 달랐다. 공허의 힘이 넘치는 이 공간에서는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아무튼 던전으로 진입한 새로운 무리를 떠올리며 오발드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GGW 공격대는 지금까지 오발드가 상대했던 다른 인간들과는 많은 것들이 다른 공격대였다.
* * *
[쿠에에에엑!]
오발드가 커다란 비명과 함께 자리에서 쿵쿵 뛰었다. 인간들의 공격이 쉴 새 없이 자신의 피부를 꿰뚫을 때 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
[뭐, 뭐야, 이놈들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인간들은 며칠 전 자신이 상대했던 인간들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이들의 전투력은 카우킹의 심복인 자신을 위기로 몰아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 뿐인가? 회심의 일격이나 다름없는 공격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막아내고 있기까지 했다.
그렇게 날뛰는 오발드의 움직임을 살피던 민국이 주먹을 쥐었다가 손가락 두개를 펼쳤다.
“곧 충격파.”
민국의 말대로 양 손의 무기를 붕붕 휘두르던 오발드가 자신의 무기에 마력을 집중시키더니 그대로 땅바닥을 내리찍었다. 발을 디디고 있는 지면이 엉망으로 만들며 균형을 무너뜨리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민국의 지시에 따라 미리 대비를 하고 있던 GGW 멤버들은 그 누구도 균형이 무너지거나 하는 모습이 없었다.
“하아압! 표식 찍었어요!”
열심히 화살을 날리던 유나가 궁극기 쿨이 돌아왔는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모두의 눈으로 오발드의 이마에 번개 자국이 새겨진 것이 들어왔다. 김소정의 시선이 민국에게 향했고, 민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괴의 교향곡 사용하고 극딜 넣습니다.”
그렇게 요동치는 마나와 함께 GGW 공격대의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와아악! 크왁!]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강력한 공격.
오발드는 기합과 함께 인간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상대했던 인간 영웅들과는 달리 이들의 공격은 한 방 한 방이 뼈가 시릴 정도로 아팠다. 자신의 강력한 항마력을 뚫고 제대로 된 타격을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목숨이 위험했다.
“마이에게 어둠의 저주. 켄달이 커버해.”
“저주 끝. 오케이. 조금 더 공격적으로. 부 탱커는 곧 어그로 인계 준비.”
인간들에게 포위당한 채 무기를 휘두르는 오발드를 보며 민국은 차분하게 지시를 내렸다.
카우킹의 심복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전투가 어려울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상대가 까다롭지 않은 녀석이었다. 찬드라니암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랬다.
‘카우킹보다 무플런의 세력이 조금 더 강한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원 트에 놈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철십자나 리히트가 경고했던 대로 오발드의 공격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잠깐 방심을 한 사이 메인 탱커인 현아가 사망하는 일이 몇 번이나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GW 공격대가 오발드의 공략에 성공하기까지는 정확히 21트. 시간으로 따지면 사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상대가 십이 재앙의 심복이자 10등급 네임드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진입하겠습니다.”
화이트 하우스가 던전에 고립된 지 일주일.
오발드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한 민국과 GGW 공격대는 빠른 속도로 던전의 네임드를 박살내며 계속해서 던전의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던전의 네임드를 전부 쓰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하우스의 멤버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발드가 숨어들어서 그런가?
민국이 경험했던 일반적인 임시 던전과는 달리 이 던전은 일반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S】 난이도 던전처럼 크기가 굉장히 컸다.
* * *
“으…….”
던전에 고립된 화이트 하우스는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겉모습이 꾀죄죄한 것은 아니었다. 힐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중에는 몸을 깨끗하게 해주는 클린이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식량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던전의 괴물들은 교활했다. 놈들은 그녀들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전투 끝에 어둠 괴물들은 영웅들이 소중하게 보관해 오던 그녀들의 식량을 오염시켰고, 결국 먹을 수 없게 만들었다.
섭취는 가능하지만 먹는다면 마력이 타락한 미리암 로스의 꼴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식량이 오염된 시기가 그녀들이 고립된 지 이틀 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화이트 하우스의 멤버들은 심한 굶주림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제대로 마력을 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 점을 노리고 괴물들이 몇 번이나 공격을 가해왔지만, 쉴더급 영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화이트 하우스는 라비아 맥퀸을 중심으로 몇 번이나 괴물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까아악! 까악! 깍!]
그래서일까?
어둠 괴물들은 그녀들을 공격할 듯 말듯 신경을 건드리면서 일정 거리 이상은 접근해오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이트 하우스의 영웅들이 먼저 놈들을 쓸어버릴 수도 없었다. 잘못했다가는 경계의 선을 넘어 네임드와 마주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망이었다.
아무튼 굶주림과 괴물들의 습격에 화이트 하우스의 영웅들은 점점 지쳐갔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아, 좀 조용히 안 할래? 여기서 배고픈 사람이 너 혼자야?”
“그냥 말만 한 거예요, 말만. 왜 화를 내요? 배고픈데 배고프다고 말도 못해요?”
“둘 다 조용!”
갑자기 날카로워지는 분위기에 라비아가 버럭 화를 냈다.
평소라면 웃으며 넘어갔을 일이지만 다들 정신적으로 몰려있는 까닭에 반응 하나하나가 과하게 민감했다. 그렇게 몸을 벌떡 일으킨 라비아와 멤버들 사이로 묘한 분위기가 서렸다.
잠시 후, 세계 유망주 랭킹 1위인 카밀라 벨이 라비아를 향해 물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예요?”
“……후.”
그녀의 물음에 라비아는 한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라면 자신들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했다. 계속된 굶주림으로 인해 다들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오염된 식량을 먹을 수도 없었다.
아니, 오염된 식량이라도 먹어야 하나 싶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팀원들의 기운이 남아 있을 때 목숨을 걸고 네임드를 상대로 길을 뚫어나가는 것이 옳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봤자 늦은 상황이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네임드를 상대하기는커녕 일반 몬스터가 대규모로 몰려와도 목숨을 부지하기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들을 포위한 어둠 괴물들이 전의 전투에서 겁을 먹고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둠 괴물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모두 무기 들어!”
라비아 맥퀸의 지시와 함께 쓰러지듯 누워있던 영웅들이 하나 둘씩 몸을 일으켰다. 피로와 배고픔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괴물들에게 목숨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괴물들의 비명과 마력이 터지는 소리가 모두의 귀로 들려왔다.
“어…?!”
“설마!”
모두의 눈에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직접 상황을 살펴볼 수는 없었다. 그녀들의 주변으로 어둠 괴물들의 다수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퀴이익! 퀴익!!!]
[쿠케케케켁!]
화이트 하우스를 포위하고 있던 어둠 괴물 무리들이 한 곳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퍼퍼퍽! 퍽!!!
그리고 오십 미터 쯤 떨어진 어두컴컴한 통로 속에서 괴물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있는 힘을 쥐어짜내서 무기를 들고 서 있던 화이트 하우스의 멤버들의 눈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찾았다.”
민국이었다.
그리고 화이트 하우스의 영웅을 발견한 민국은 자신의 귀를 살짝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화이트 하우스 멤버들을 찾았다. 인원은 총 열 명. 다들 무사해 보인다. 유나는 바로 나가서 그렇게 보고하도록 하고. 오현아와 지젤은 조금 전에 헤어졌던 곳에서 우측으로 들어오도록 해.”
그렇게 통신을 보낸 민국은 빠르게 화이트 하우스의 영웅들을 살폈다. 그리고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랫동안 고립이 된 까닭에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다.
거기에 한 명은….
‘묶여 있는데?’
어째 차림새를 보아하니 마력이 타락하는 사고가 난 것 같았다. 아무튼 주저앉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민국이 말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GGW 공격대 한민국입니다. 구출하러 왔습니다.”
민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환호가 들려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환호에 가까운 힘겨운 신음이었다. 그녀들의 손이 민국이 내린 가방으로 향했다.
가방에는 식량과 물이 그리고 의약품이 들어 있었다.
영웅에게 의약품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그래도 마력석으로 만든 의약품은 영웅의 몸에 난 상처도 어느 정도 치료해 줄 수 있었다.
물론, 민국에게는 의약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이 있었지만….
‘빌어먹을 던전.’
오발드가 던전으로 숨어들면서 변화가 생긴 것일까?
일직선으로 네임드만 처리하면 될 줄 알았던 GGW 공격대는 던전의 네임드를 전부 쓰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하우스의 멤버들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주 통로가 아닌 개미굴처럼 나뉜 세부 통로까지 전부 수색을 해야 했고, 최대한 넓은 범위를 수색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팀원들이 찢어지게 되면서 민국 또한 홀로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악의 칼날로 클래스를 변경해야 했다.
간단히 말해 지금의 민국은 회복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았어, 살았다고!”
“예스! 예스!!!”
아무튼 민국은 빠르게 가방의 음식들을 해치우는 화이트 하우스의 멤버들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음식을 해치우는 이들의 모습은 최소 일주일 이상은 굶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식량이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민국의 눈에 보랏빛으로 물든 빵들이 눈에 들어왔다.
“식량이 오염됐었군.”
“교활한 놈들이었어요.”
민국의 혼잣말에 대답을 한 것은 시라누이 마이 이상으로 풍만한 가슴을 지닌 금발의 미녀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화이트 하우스의 라비아 맥퀸이예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민국 영웅님. 당신 때문에 우리가 살았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얼굴 가득 고마움이 드러나는 라비아를 보며 민국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악의 칼날로 전투를 한 부작용 때문일까? 고마우면 한 번 대주기라도 하던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민국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켜 넘겼다.
그래도 때와 장소를 가릴 수 있는 이성은 유지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