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화 〉 마하 강 방어전
* * *
“뭐야?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통신을 끊은 메를린은 조금 전의 대화를 되새겼다.
슈가빈의 여왕인 가루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공허 군단의 인간계 공략을 맡은 십이 재앙 중 하나였다. 비록 그녀의 세력은 잘못된 선택으로 거하게 망해버렸지만 말이다.
이는 순전히 가루다의 욕심 때문이었다.
공허의 군단이 이 세계를 침공한 직후, 가루다는 바이콘과 손을 잡고 유라시아라는 넓은 대륙의 동쪽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
그녀의 손에 죽은 인간들의 숫자만 해도 수천만에 달할 정도였고, 캄보디아라는 국가를 중심으로 그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과 중국이라는 나라가 문제였다. 특히나 중국.
‘우리들의 공격을 빈번히 막아내고 있는 인간들의 강국.’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극동에 자리 잡은 이 세 나라는 어둠 괴물과의 전쟁이 터진 이후, 과거의 악연을 뒤로 하고 굳건한 동맹관계를 맺으며 방어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는 어둠 괴물과의 싸움에서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영웅 전력 또한 강력했다. 그렇게 동아시아의 나라들은 수십 년이 넘게 이어지는 전쟁 내내 자신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고, 이는 결국 가루다의 조급함을 불러왔다.
바이콘과 함께 일으킨 던전 브레이크.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망하면서 가루다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 것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바이콘 또한 제법 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은 진즉에 입수한 바 있었다. 물론, 자신은 중국을 제외한 두 나라와는 직접적으로 부딪친 적이….
“아아…. 없지는 않네.”
메를린은 몇 주 전에 받았던 충격적인 보고를 떠올렸다.
찬드라니암과 훔바바라는 자신의 심복이 공허의 결계에 갇혔다는 믿을 수 없는 보고였다. 그리고 그들을 공허의 감옥으로 보내버린 인간 영웅들이 바로 한국의 공격대, GGW였다.
아무튼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자신에게 연락을 한 가루다는 친한 척 계속해서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했다. 큰 용무는 없다고 했지만 메를린은 그런 가루다의 행동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을 궁금해 하는 것이 크게 느껴지기는 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뻔하네. 나한테 붙으려는 게 틀림없어. 하기야 바이콘 녀석과 계속해서 손을 잡는 것도 곤란할 테니 말이야.”
메를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가루다 상황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무리해서 일으킨 던전 브레이크를 두 번이나 실패 하면서 지금까지 축적했던 힘의 대부분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공격에 새의 탑이 엉망이 되기까지 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전쟁 기간 동안 자신의 둥지가 직접 공격당한 십이 재앙은 가루다가 최초였다. 그리고 메를린은 그런 가루다의 상황에 일조를 한 존재가 바이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손을 잡는 척 가루다를 부추겼던 놈은 정작 가루다가 위험할 때 도움을 주지 않았다. 가루다를 위기로 빠뜨린 것이다.
“이래서 이각수 놈들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된다니까.”
그러니 가루다가 갑자기 친한 척 달라붙는 행동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각수? 바이콘의 부족 말씀이십니까? 그…. 선량하고 헌신적인 남편을 잡아먹고, 그의 아내를 탐하는 빌어먹을 괴물들이요?”
메를린의 혼잣말을 들은 심복 하나가 동공을 세로로 만들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미노스만큼은 아니지만 무플런 세력은 바이콘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수컷보다 암컷이 훨씬 많은 무플런의 상황에서 귀한 수컷을 잡아먹고 암컷을 탐하는 놈들은 찢어죽여도 시원찮았기 때문이었다.
“정 암컷을 범할 거면 임신이라도 시켜주던가?”
“맞아. 혼자서 신나게 즐기기만 하면 뭐해? 그게 전부인 걸?”
“이각수 녀석은 나도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지. 그 X발 녀석이 내가 키워서 남편으로 만들려던 수컷을 죽여 버리고 달려들었거든. 아주 기세 좋게 덤벼들기에 얼마나 잘하나 싶었는데…. 어휴.”
“제대로 된 씨받이도 못하는 놈들이 자지만 크면 뭐해? 알멩이가 없는데?”
이각수와 마주친 경험이 있는 부하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높였다.
그녀들의 말대로 이각수 놈들의 허약한 씨는 그들의 동족을 제외한 다른 종족의 자궁을 뚫지 못했다. 특히나 무플런이라는 세력을 이끄는 메를린의 순혈 종족은 종족 특유의 단단한 자궁으로 인해 임신이 쉽지 않았다.
아무튼 가루다의 슈가빈과 손을 잡는 것은 메를린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미노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후방을 탄탄히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루다의 세력 자체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손을 잡아도 뒤통수를 얻어맞을 염려도 없었다.
거기에 바이콘이라는 녀석을 견제할 수 있는 무기도 되었다.
슈가빈의 세력은 전부 무너졌지만, 그들의 여왕인 가루다는 아무리 바이콘이라도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신중한 메를린은 바로 가루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뻔한 의도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지만, 정확한 꿍꿍이는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처럼 메를린은 가루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파악한 후에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카우킹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바이콘의 세력과 티격태격할 여유도 없었다.
‘우리들의 함정에 넘어간 멍청한 카우킹들을 상대로 인간들이 생각 이상으로 잘 버텨주고는 있지만….’
카우킹의 지휘관급 개체는 건재했다.
때문에 찬드라니암과 훔바바를 잃은 자신들은 메를린은 미노스를 상대로 전면적인 군사 도발을 걸기 힘들었다.
이는 바이콘과 비교해도 마찬가지. 자지는 형편없지만, 놈들의 기동력과 군사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흘 뒤, 가루다가 보낸 선물이 메를린에게 도착했다.
“뭐야? 요 예쁜 년. 우리와 진심으로 손을 잡을 생각인가 보네.”
히말라야를 순찰하던 괴물이 가루다의 마력을 느껴지는 괴물과 만난 것이다. 보아하니 바이콘의 눈을 피해 험난한 히말라야로 돌아서 오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황금색으로 빛나는 마력의 결정 네 개를 바라보는 메를린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 * *
[가루다 : 그, 그러니까….]
[가루다 : 화, 황금색…. 골드급…. 마력의 결정이….]
[가루다 : 아아….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가루다 : 결코 제 의지가 아니었어요. 잘못했습니다.]
[가루다 :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 이제까지 말 잘 들었잖아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새의 탑에 있는 가루다와 연락이 가능한 특별한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다
“…뭐야, 이건?”
지금도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는 가루다. 민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큐우♡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뭐지? 전에 무플런의 동태를 살펴보라고 했던 것 때문인가?”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큐우♡의 말대로 무언가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한 민국은 가루다가 보낸 내용을 쫙 읽어보려다가 포기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일단은 저 녀석의 횡설수설을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한민국 : 세 줄로 요약해라. 무슨 일이지?]
[가루다 : 골드급 마력의 결정을 메를린에게 빼앗겼습니다.]
잠시 후, 도착한 메시지.
“씨발.”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쾅 내리친 책상이 두 동강이 나며 부서졌다.
“아니, 메를린과 파푸니르의 세력권을 멀리 돌아서 마력의 결정을 보낸다고 하지 않았나? 이거 설마….”
배신이라는 생각이 바로 민국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쩐지 메시지를 수십 개나 넘게 보내더니만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였다. 이어서 민국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배신일까?”
《확인을 해 볼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그러고 싶기는 한데…. 아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아. 젠장할, 그래서 골드급 마력의 결정이 필요했던 건데.”
마하 강 전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인도군이 계속 방어에 성공하면서 놈들의 공세가 한 풀 꺾이기는 했지만, 임시 던전에 숨어든 카우킹의 지휘관급 개체는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현재 마하 강 전투에 모습을 드러낸 지휘관급 개체는 총 둘.
그리고 민국은 이 두 녀석을 전부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략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임시 던전에 숨어든 놈은 이미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골드급 마력의 결정이 필요했는데, 이런 일이 터지다니. 최악이었다.
“이럴 때 저 녀석의 동태를 관찰할 수 있는 녀석이 한 놈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비장의 무기라 할 수 있는 찬드라니암은 이제 막 둥지를 펼치고 힘을 비축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큐우♡를 보낼 수도 없었다.
우우웅! 우우웅!
답장을 보내지 않은 까닭인지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하고 있었다. 가루다가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잠시 고민을 하던 민국이 핸드폰의 내용을 확인했다.
[가루다 :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메를린의 세력권이 히말라야까지 뻗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요….]
[가루다 : 나름 중급 개체를 보냈는데, 그 멍청한 놈이 중간에 잡히는 바람에….]
[가루다 : 메를린에게는 어쩔 수 없이 동맹을 맺기 위한 선물이라고 핑계를 댔어요. 최근 그 년에게 친한 척 말을 걸었는데, 그것이 동맹을 맺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을 했나 봐요. 그래도 골드급 마력의 결정 네 개는 조금 뼈아픈데…ㅠㅠ]
[가루다 : 민국님? 제 말 보고 계시죠?]
[가루다 : 충성충성. 혹시나 제가 배신을 했다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조용히 넣어주세요. 전 언제나 민국님만의 노예입니다.]
[가루다 : …….]
[가루다 : 불안하게 왜 대답이 없으실까?]
[가루다 : 야?]
[가루다 : 저기요?]
[가루다 : 아, 제발 살려주세요.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요ㅠㅠ 지금부터 열심히 골드급 마력의 결정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ㅠㅠ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ㅠㅠ]
쉴 새 없이 도착하는 녀석의 메시지.
“뭐야, 이 녀석?”
그리고 내용을 읽은 민국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내는 가루다의 모습을 떠올리니 어처구니가 없는 웃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일단은 진실이라고 생각해야지. 가루다 녀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야.”
당장은 사실 여부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을 뿐더러 가루다에게 철퇴를 내릴 수도 없었다.
십이 재앙 중 하나인 가루다는 만만한 괴물이 아니었고, 자신과 GGW는 마하 강 전선에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골드급 마력의 결정이 메를린이 가져갔다라….”
자신들은 마력의 결정을 흡수해 상위 등급으로 도약할 수 있다지만, 어둠 괴물들은 어떻게 마력의 결정을 사용하는지 궁금했다.
[한민국 : 메를린이 골드급 마력의 결정을 손에 넣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지?]
[가루다 : 골드급 마력의 결정 열 개로 10등급 어둠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뭐야? 고작 그거야?”
민국이 고개를 갸웃했다. 골드급 마력의 결정을 얻을 수 있는 괴물이 10 등급의 괴물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S 8】 난이도 이상에서 등장하는 이 강력한 어둠 괴물들은 성공적으로 잡았을 경우 반반의 확률로 실버 혹은 골드급 마력의 결정을 드랍했다.
그런데 이 녀석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려 열 개의 골드급 마력의 결정이 소모된다고?
“10성 영웅을 열 명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자원인데?”
가성비가 완전히 쓰레기였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한민국 :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가루다 :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10등급 괴물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그리고 운이 좋으면 특별한 능력을 지닌 녀석을 불러낼 수도 있고요.]
[한민국 : 특별한 놈?]
어둠 괴물도 가챠로 뽑는 건가?
[가루다 : 네. 간혹가다 특별한 지휘관급 개체를 키워낼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개체가 많아야 다른 십이 재앙을 누르고 자신의 세력을 넓힐 수 있고요.]
아무리 그래도 골드급 마력의 결정이 아깝다는 생각이었지만….
뭐, 어둠 괴물은 괴물들만의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가루다가 빼앗긴 마력의 결정을 되찾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캘커타에 있을 메를린을 찾아가서 그것이 내 것이라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