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6화 〉 강한 남자 한민국
* * *
십이 재앙 메를린은 정신이 드는 순간 화들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수컷이 주는 쾌락을 이기지 못해 기절을 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수컷에게 안겨서 비명을 지르던 것을 마지막으로 끊겨 있었다.
인간 영웅들이 자신의 몸을 닦아낸 모양인지 몸을 뒤덮었던 수컷의 정액은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몸 위로는 그녀가 입고 있던 잘려진 옷이 걸쳐져 있었다.
“…놀랍네.”
적대 종족인 인간들이 자신의 몸을 떡 주무르듯 마구 주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공허의 대악마 중 하나인 버니가 왜 수컷, 수컷 노래를 부르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인간 영웅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네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메를린은 자신의 마력으로 만들어낸 잘려진 옷을 회수했다.
그리고 새롭게 몸을 걸칠 복장을 만들어 내었다가 의아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GGW 공격대와의 계속된 전투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공허 마력은 진즉에 말라 붙어있어야 정상인데….
신체의 컨디션이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마치 농축된 마력의 포션을 마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메를린은 조용히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이런 미친…?!’
십이 재앙답게 그녀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의 자궁이 품고 있는 강렬한 생명력이 빠르게 공허의 마력으로 전환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도는 어둠 괴물들이 만들어내는 마력의 결정체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그래, 어쩐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것 같더라니….’
괜히 자신이 수컷의 품에 안겨서 아양을 떨었던 게 아니었다.
대악마의 육체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생명의 기운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대략 20% 수준의 힘을 회복한 상황. 집중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인간 영웅들이 정신을 오염시키고 세뇌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저 남자를 데리고 멀리 도망을 치는 거다. 그 후 나의 세력을 만들게 되면 이 땅의 정복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계속해서 수컷의 정액을 받아들이고 공허의 마력으로 전환시키면 지금의 세력 이상의 규모를 키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메를린은 바로 자신의 욕심을 접었다. 애당초 던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지상을 통해 나간다 하더라도 자신을 반기는 것은 수많은 인간 병사들일 게 분명했다. 더군다나….
“일어났네?”
자신에게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인간의 여성 영웅들을 따돌릴 자신이 없었다.
한 번이야 가능하겠지만, 그 다음은?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의 정예 병사들은 카오스의 힘에 의해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살아가는 불멸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딴 생각 하지 말고 민국이가 부르니까 어서 가봐.”
“…….”
눈살을 찌푸리는 여성 영웅의 행동에 메를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여자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녀는 방패를 들고 자신의 공격을 막아서던 영웅이었다.
멀리 다른 암컷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수컷이 보였다.
자신의 몸과 정신을 정복했던 인간 남자. 메를린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어느 정도 힘은 되찾았지만, 던전에서 인간들을 몰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만약 반항을 하면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몇 번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던전의 마력으로 네임드들을 되살린다고 해도 끝은 매한가지일 것 같았다. 8,9 등급의 괴물들은 웬만한 인간들에게는 공포의 존재겠지만, 숙련된 전사인 이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했다. 결국 자신의 처분은 저 수컷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겨 민국에게 다가간 메를린은 조심스레 그의 근처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공허 그 자체도 아니고, 무플런의 군주이자 공허의 대 악마 중 하나인 자신이 이런 모습을 보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수컷에게 안겨서 아양을 떨던 자신의 모습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만큼 압도적인 쾌감이었다. 그리고 김소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민국이 메를린을 향해 말했다.
“공허와 연결을 끊는데 얼마나 걸리지?”
“…아, 어어?”
예상치 못한 물음에 메를린이 얼굴이 멍청하게 변했다가 곧 칙칙한 푸른색으로 변했다.
오판이었다. 눈앞의 수컷을 자신을 살려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메를린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몸에 들어간 힘을 풀어야 했다.
어느새 인간 여성의 활이, 마력구가, 대검이 자신의 몸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개는 보호막과 신체를 이용해서 막아낸다 하더라도 결국 온몸이 난도질 되는 결과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한 메를린의 반응에 민국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훤히 그려졌다.
“다시 묻지. 공허와 연결을 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열 두 시간.”
“연결을 끊고 본인의 신체를 자발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 마력은? 아, 단위는 크론으로 환산하면 되겠군.”
“18만 크론…?”
메를린은 자신의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며 민국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상함을 느꼈다.
눈앞의 수컷은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어둠 괴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공허 마력을 끊어도 어느 정도는 육체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심지어 자신들이 사용하는 공허 마력의 단위가 크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공허 마력이 아닌 다른 에너지를 통해 자신들의 육체를 유지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궁금한 게 뭔지는 알겠는데 당장 설명하는 건 귀찮고…. 아무튼 18만 크론이면 정액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 거지?”
“정액…?”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전투로 소모되었던 힘도 어느 정도 돌아왔을 거잖아?”
“?!”
메를린이 깜짝 놀라 얼굴로 민국을 바라봤다.
자궁에서부터 느껴졌던 강한 생명력. 눈앞의 수컷은 자신의 정액이 어둠 괴물의 힘을 채워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크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어둠의 괴물 중에 이 남자를 도와주는 이가 있다.’
메를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하지만 배신자의 윤곽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다들 하나같이 꿍꿍이가 넘치는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눈앞의 인간과 손을 잡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레포리더의 버니였다. 공허의 창녀라 불리는 그녀라면 저 자지를 맛보는 순간 바로 무릎을 꿇고 3초 만에 노예 선언을 할 게 틀림없었다.
저 수컷이 가지고 있는 물건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이상한 쪽으로 머리 굴리지 말고. 몇 번이면 되겠어?”
“여섯 번. 그 정도면 나의 신체를 유지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같다? 말이 짧다?”
수컷이 피식 웃으며 바라보자 메를린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늑대 앞의 양이라도 된 것 마냥 고개를 움츠렸다. 상대는 수많은 인간들을 학살했던 공허의 대악마를 자신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깔아보고 있었다.
“가, 같습니다.”
“좋아. 여섯 번. 그러면 바로 공허와의 연결을 끊으면 되겠군.”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키는 수컷의 모습에 메를린은 꿀꺽 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의 몸을 품던 수컷의 물건은 어느새 힘이 돌아왔는지 빳빳하게 발기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공허의 마력을 끊어내면 바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으로 보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군.’
메를린은 냉정하게 자신의 상황을 체크했다.
남자의 말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줄을 손에 쥐고 있었다.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눈을 질끈 감은 메를린은 자신과 연결된 공허와의 마력을 강제로 끊었다.
“흐그그긋?!”
그 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메를린의 안으로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아!!!”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에 메를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민국의 육체가 메를린을 뒤덮었고, 메를린은 자신의 존재의의를 눈앞의 수컷에게서 찾으려는 듯 격렬하게 그의 이름을 외치면서 민국의 물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 *
“…이게 가능한 일이었네.”
메를린은 뒤로 몸을 틀어서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그리고는 팔을 쭈욱 뻗었다. 우두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현재 자신의 신체는 공허의 마력이 아닌 다른 것으로 유지가 되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힘인 터라 뭐라고 정의하기는 힘들었지만, 일단은 생명의 힘이라고 정의했다.
‘카오스 휘하의 하위 신인가?’
메를린의 눈동자가 민국에게 향했다. 하지만 신격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와의 연결을 끊은 공허의 악마를 자신의 힘만으로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튼 덕분에 자신은 공허와 연결을 끊고 나서도 지금처럼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반대급부로 공허의 마력으로 쌓아 올렸던 지닌 힘의 대부분을 잃어야 했지만, 어차피 한 번 걸어가 본 길인 터라 힘을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그래, 오히려 좋은 일이야.’
공허와의 연결을 끊으면서 공허의 벽에 갇힐 일도 사라졌다.
영혼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 끔직한 곳은 공허의 대 악마였던 그녀조차도 두려워하는 곳. 하지만 이제 자신과 공허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부터는 공허가 아닌 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인간 수컷을 섬겨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암컷 중 하나로써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쁘지는 않네.’
그만큼 수컷과의 관계는 메를린을 흠뻑 빠져들게 만들 정도로 좋았다.
종족 자체가 다른 터라 직접적인 애정을 갈구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암컷이라는 신경과 관심은 정도는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들었다.
공허 속의 괴물을 불러낼 수는 없지만, 생명의 기운을 이용하면 자신의 세력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를 이용해서 인간 수컷의 일에 도움을 준다면? 그 역시 자신을 돌아봐 줄 게 분명했다. 지금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메를린의 눈이 주위를 훑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던전이 조금씩 흐물흐물하게 변하고 있었다.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그 형태를 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메를린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민국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나갈 생각인데….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숨길 수 있나?”
“완벽하게 숨는 것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존재감을 감출 수는 있어요.”
“오케이. 김소정, 정예린. 둘이 책임지고 내 숙소에 데려다 놔.”
“넵!”
“네, 공대장님.”
두 명의 여성이 경례를 하며 메를린의 양 옆에 섰다.
인간들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메를린은 던전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던전 앞으로 몰려든 엄청난 숫자의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GGW 만세!!! 한민국 만세!!!”
자신들의 유일신이 강림하기라도 한 것일까?
민국을 발견한 순간 인간들은 광신도 마냥 남자의 이름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어서 남자가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이자 지진이라도 낼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공기를 일그러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인간들의 감정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이러한 것들은 공허의 악마들의 원하는 맛있는 먹잇감이었겠지만, 생명의 힘 때문일까? 메를린은 그런 인간들을 보고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민국에게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 틈을 타서 메를린은 민국이 지목했던 두 여성을 따라 그의 숙소로 향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 동안 메를린은 자신의 양 옆에 있는 두 여성을 힐끔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두 여성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김소정과 정예린. 대검과 얼음 마법을 사용하는 인간 영웅이었지.’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메를린의 기준으로는 김소정이라는 영웅이 조금 더 위협적이었다.
근접거리에서 대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공격은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특히나 자신의 약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타이밍이 너무나도 절묘했다. 그녀와 호흡을 맞추던 말총 머리의 거유녀도 인상 깊기는 했다.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거죠?”
숙소로 향하면서 메를린이 두 여성을 향해 물었다.
공허의 마력을 끊어내면서 자신의 신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암컷이나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신세였다. 다시 공허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건 곧 공허의 벽으로 끌려가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건 공대장님께서 결정할….”
몇 초 뒤, 정예린이라는 여성이 대답했다.
“거기까지.”
하지만 그녀의 말은 김소정이라는 여성에 의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아직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면 그러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이들이 공허 생명체 및 악마들에 대한 생리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한민국은 뭔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니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자신을 살려둔 것을 보아하면 분명 무언가 시킬 일이 있을 건 틀림없어 보였다.
그리고 한참 뒤에 숙소로 돌아온 민국이 메를린을 향해 물었다.
“너 한 달에 몇 개까지 생산할 수 있어?”
“…네? 뭐, 뭐를요?”
“골드급 마력의 결정체. 그리고 거래 가능한 기어 스코어 장비.”
“…아?”
메를린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나를 설득해서 어둠 괴물의 약점을 알아내거나 힘을 되찾게 만들고는 다른 대 악마들과 싸우려고 하려는 게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