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6화 〉 그 남자의 정력
* * *
‘……후, 좋았다.’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는 아이돌이 자신에게 박혀서 앙앙대는 모습이란…. 처음은 아니었지만 매번 새롭고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랑과 뜨거운 시간을 보낸 민국은 촬영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며 촬영장으로 향했다.
흘러가는 이야기로 방송계에 종사하는 남자들이 제법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때문일까? 평소보다도 눈에 들어오는 남자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자가 세 배는 더욱 많아 보였지만….
그 중에는 무거운 촬영 장비를 나르면서 마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더러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마력은 각성했지만 영웅 라이센스를 따지 못한 이들로 보였다. 성급으로 굳이 나누자면 1성도 미달인 이들이겠지.
‘이럴 때 지니 스카우트가 있으면 저런 이들 중 포텐이 높은 사람을 발견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
그러다가 포텐 200짜리 유망주를 발견하면 맛있게 키워보는 건데. 아쉽게도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 그런 능력을 재현할 수 있어?’
카오스의 도우미들이라면 뭔가를 알고있을 지 몰랐다.
《어…. 처음 듣는 개념이기는 한데…. 인간의 잠재력을 파악하는 건가요?》
‘그와 비슷하다고 해야겠지?’
《인간의 경험과 의지에 따른 불확실성이 너무 높기는 하지만…. 얼추 때려맞추는 수준이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당연히 퀘스트가 필요하겠지?’
의외로 긍정적으로 나오는 대답.
하지만 그런 능력을 그냥 주지는 않을 터였다. 이 녀석들은 공짜로 무언가를 주는 법이 거의 없었다.
《네, 하지만 저희들도 민국님께서 말씀하신 능력에 대해 알아봐야하는 터라…. 얼마나 많은 카르마가 필요한지는 체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혀가 길어지는 것을 보니 어째 획득 난이도가 쉬울 것 같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있어도 그만 없어 그만이기는 하지만….’
있으면 뭔가 재미있을 것 같기는 했다.
아무튼 몽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지나가는 촬영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까닥이면서 대기하던 도중이었다.
자신에게 전담으로 붙어 있던 작가 한 명이 들어가도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이미 오늘 방송에 출연하는 다른 게스트들은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 주인공답게 마지막으로 등장을 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민국은 요란한 환호와 함께 세트장으로 들어섰다.
‘대충 모니터링을 해 본 결과….’
골드 피싱은 네 명의 출연진이 이번 회에 출연하는 게스트에게 질문을 던져가며 근황을 체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식의 토크쇼였다.
그리고 출연진 중 두 명은 민국이 아는 이였다.
한 명은 자신의 카르텔 멤버이자 조금 전 대기실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던 김아랑. 그리고 또 한 명은 영웅 엔터테이너라 불리며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화 클랜의 한다미였다.
“한민국! 한민국! 한민국!”
‘금쪽같은 내 새끼’ 이후 처음 보는 한다미의 호들갑.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민국은 아무 생각없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성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어머! 두 분 원래 알고 계시던 사이였어요?”
곧바로 들려오는 탄성. 한다미의 옆에 있던 김아랑도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었다.
“저희 둘 예전에 프로그램 하나 함께했잖아요. 금쪽같은 내 새끼라고.”
그리고 다미는 이 정도 쯤이라는 것 마냥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콧대가 살짝 올린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아…! 에이, 얼굴만 아는 사이였네. 나는 또 엄청 친하다고….”
“우리 서로 친한대요? 그렇죠? 한민국 영웅님?”
“…….”
다미의 말에 민국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렇게 친했던가? 사실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한 번이기는 했지만, 던전 내에서 뜨거운 시간을 가지기는 했으니까.
그러나 친하다고 말하기에는 서로 아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했고, 그 이후로 함께했던 접점 또한 없었다. 그렇게 민국이 고민을 하는 동안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머리를 핑크색으로 물든 진행자가 말했다.
“전혀 안 친해보이시는데? 우리 한민국 영웅님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거 봐.”
“아, 아니…!”
이어서 충격을 받은 듯 과도하게 오버하는 한다미.
하지만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잘 어울렸다. 역시 영웅 엔터테이너다운 반응이었다. 아무튼 네 명의 남성 영웅이 모인 자리라 그런지 촬영장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특히 게스트로 나온 남자 네 명이 전부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는 영웅인 까닭이었다.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었고, 민국은 진행자의 물음에 대답을 하며 자신의 좌우로 앉은 남자 게스트들을 확인했다.
먼저 왼쪽에 앉은 친구는 메모리아 공격대의 김석일. 메모리아 클랜의 홍보팀에서 일하는 얼굴 마담이지만, 의외로 홍보팀으로 소속을 옮기기 전까지 【B】 난이도의 던전 공략에 몇 번 참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김석일에 대한 진행자들의 질문도 거의 그쪽으로 집중이 되어 있었다.
“【B】 난이도 던전을 공략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어요?”
핑챙 아니 핑크머리 여성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필리안느라는 아이돌이라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외모도 반반했지만 미드도 제법 훌륭했다. 아이돌답게 관리를 굉장히 많이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가슴이 부각되는 핑크머리 여성 때문일까?
김석일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어…. 먼저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어요. 부활석이 있다고 해도 까닥하면 죽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전투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음음.”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한다미. 그리고 민국 역시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초보 영웅들은 전투에 대한 두려움과 몬스터의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들은 바 있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오현아 역시 아픈 것이 싫어서 허접한 탱킹 실력을 보이지 않았던가?
물론, 죽도록 굴리고 굴리다 보니 쉽게 고쳐졌던 일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민국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김아랑이 슬쩍 끼어들며 물었다.
“우리 한민국 영웅님도 그런 경험이 있으셨어요?”
“…네?”
“그 막 몬스터가 두렵다거나 죽음이 무섭다거나 하는 거요. 한민국 영웅님도 초보 때가 있었잖아요.”
모두의 눈이 민국에게 향했다.
십이 재앙까지 쓰러뜨린 영웅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 지 다들 궁금한 모양이었다.
“음….”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던 민국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에 힘들다는 생각은 한 적 있지만 어둠 괴물들의 두렵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역시 크게 느낀 적이 없고요.”
부활석의 존재가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보다는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미래가 더욱 두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네. 우리가 눈앞에 있는 이 괴물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대한민국이 그리고 지구가 어둠 괴물들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게 더 무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앞에 어떤 괴물이 있어도 싸우는 겁니다. 그리고 던전을 공략하는 영웅들은 다들 그런 사명감을 지니고 있죠.”
이러한 민국의 대답에 여기저기서 나지막한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왠지 모르게 감동을 받은 얼굴이었다. 특히나 왼쪽에 앉는 김석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촉촉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어머, 우리 김석일 영웅 좀 봐. 막 엄청 감동받으신 거 같은데요?”
핑챙의 말에 김석일이 과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를 높였다.
“아, 네, 네! 한민국 영웅님만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요. 사실 한민국 영웅님은 제 우상이시거든요. 아니, 대한민국 영웅이라면 전부 한민국 영웅님을 존경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어서 공감하듯 고개를 주억이는 한다미.
민국이 해낸 업적에 대한 대단함은 일반인보다도 영웅들이 더욱 크게 느끼고 있었다. 이어서 김아랑이 큐 카드를 보며 물었다.
“한민국 영웅님과 메모리아 클랜은 여러 전투에서 함께 손발을 맞추며 어둠 괴물들을 쓰러뜨린 바 있습니다. 자, 여기서 질문. 이 방송에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메모리아 영웅들이 요구한 게 있다 없다?”
“…있습니다. 싸인 좀 잔뜩 받아달라고 하셨어요.”
“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영웅들의 영웅답게 한민국에 대한 인기는 국내의 랭커 클랜인 메모리아도 비껴날 수 없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김석일의 말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최대한 심기 불편하지 않게 옆에서 잘 모시라고….”
“아하!”
“맞네! 김석일 히어로, 조심해야겠어요? 이거 까닥 잘 못 하다가는 클랜 짤리는 거 아닌지 몰라?”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김석일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그도 그럴게 민국의 첫째 와이프는 메모리아의 레전드 히어로였던 강채영이었다. 게다가 둘째 와이프는 메모리아 클랜을 운영하는 라온 그룹의 회장 김태연. 김석일 입장에서는 하늘 위의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웃는 동안 김석일이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허리를 슬며시 꼿꼿하게 펴기 시작했다. 두 손 또한 주먹을 쥐고 앞으로 쭉 뻗은 차렷 자세를 하자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출연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촬영장을 폭소하게 만든 건 그 다음이었다.
“됐어, 편히 쉬어.”
마치 병사를 시찰하던 지휘관 마냥 민국이 김석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고, 그제야 석일이 자세를 푼 까닭이었다.
정말로 그럴듯한 상황극이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토크는 계속 이어졌다. 르네상스의 유승철과 이화의 최일현은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는 영웅들이었다. 때문에 둘은 【B】 난이도 이상의 던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둘의 대화는 홍보팀의 역할과 그에 대한 썰들로 진행이 되었다.
하지만 여러 방송들을 통해 대부분 알려진 내용들이었기에 출연진 입장에서는 그리 재미는 화제는 아니었다.
물론, 민국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터라 나름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짧은 리액션까지 하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는 민국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고 있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토크가 물이 오르기 시작하자 화제는 개인 근황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민국에게 향해 있었다.
“자, 이거 민감한 질문인데…. 한민국 영웅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한다미가 능글맞은 얼굴로 물었다.
괜찮지 않더라도 질문을 던지겠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담겨 있는 표정이었다.
민국은 그런 다미가 무슨 질문을 할 지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모니터링을 한 결과 프로그램의 구성상 슬슬 수위가 높은 질문이 나올 때 타이밍이었다.
애당초 골드 피싱은 17세 토크쇼였지만, 국내 방송의 수위가 워낙 널럴했던 터라 종종 성인 방송도 저리가라 할 정도의 수위 높은 대화가 나오기도 했다.
“네? 뭐죠?”
보아하니 짓궂은 질문으로 자신을 당황한 모습을 노린 것 같지만 민국은 한다미다 할 질문들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어서 미리 촬영했던 예고 방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Q : 그…. 한민국 영웅께서 방송에 나오게 된 이유가…….
A : 저희가 나가라고 했어요. 좀 쉬고 싶어서요…. 얼마나 붙어서 떨어지지 않던지….
B : 아, 아아…. 후우……. 조금 자도 될까요? 결혼식 끝나고 지금까지 거의 쉬지 않고 함께 있었던 터라……. 엄청 피곤하네요. 인도에서 삐를 잡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
그렇게 예고 방송이 지나가자 모두의 시선이 민국에게 향했다.
이화의 최일현이라고 했던가? 그 친구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 모양인지 얼굴이 빨갛게 변해있기까지 했다.
“자, 우리 한민국 영웅님께서는 불과 일주일 전 오현정, 오현아 자매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는데요.”
“네.”
“결혼식을 올리고 도대체! 무엇을 하셨기에 이렇게 와이프 분들이 저희 골드 피싱 촬영장으로 새 신랑을 내보내셨나요? 저라면 정말 품에 끼고 놓지 않았을 텐데요?”
“……?”
민국이 눈을 껌벅였다.
그 대답은 방송에 나오지 않았던가? 쉬지 않고 함께 있었다고? 하지만 이들은 그 말을 자신의 입으로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
일단 민국은 쑥스러운 것처럼 헛기침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원래는 신혼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신혼여행이요?”
뜬금없는 단어에 모두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고, 민국은 자신의 실책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는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신혼여행을 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여행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네, 그런데 현정이가 클랜장 일 때문에 바빠서 집에서 푹 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이후는…….”
잠시 고민을 하던 민국은 한 손으로는 동그라미를 만들고 그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하는 동작을 몇 번 반복했다.
그리고 촬영장이 난리가 났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그것도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물꼬를 열자 질문의 수위가 순식간에 높아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방송에서 떠들어대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물음도 있었다.
“모두 테이블 위로 손 올려! 여기서 괜한 오해사면 우리 방송 끝장이야!!!”
그 중에는 이런 수위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선을 넘은 질문도 있는 것 같았지만 어째서일까?
스탭들 중 그 누구도 전혀 제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PD가 가장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썰을 풀고 나자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들이 하나 둘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달아오른 분위기도 진정시킬 겸 출연진의 질문이 르네상스 클랜의 유승철에게 향했다.
“우리 유승철 영웅님도 굉장히 인기가 많으시죠?”
“아, 하하. 아닙니다. 그냥…. 몇몇 분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을 뿐이죠.”
“듣기로는 카르텔 여성들에게 문신을 새기는 취미가 있다고 하시던데….”
“아, 제가 남자답지 않게 제 여성분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서요. 검은색 클로버에 U 자를 새기는 것으로 이 여성분이 제 카르텔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남자들이 눈독들이지 못하게?”
“네, 그렇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하는 유승철.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국이 흠칫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검은색 클로버에 U 자 문신. 열녀처럼 전 남친을 잊지 못하던 한세정의 친구 이다은이 가지고 있던 문신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유승철이라는 이 친구. 얼굴이 살짝 익숙하기도 했다.
오래 전, 이다은과 함께 르네상스 클랜 건물의 로비에서 만났던 친구였다. 그리고 묘하게 바뀌는 민국의 표정 변화를 핑크 머리 여성이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