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 자유의 나라, 아메리카
* * *
인도에서 헤어진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까?
“……전처럼 편하게 말을 해도 괜찮죠?”
오랜만에 보는 라비아 맥퀸은 의아하게도 자신의 등장에 조금 어려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낯을 가리는 느낌이었다.
“물론이죠, 라비아. 당신이 제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제가 싫어할 리도 또 우리 사이가 달라질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민국은 어째서 라비아가 낯을 가렸는지 그 이유를 바로 들을 수 있었다.
“휴우…. 나는 당신이 제가 임신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민국은 점잔을 빼며 말했다.
애당초 라비아의 임신 자체가 의도된 것인데 그럴 리 있겠는가?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민국은 임신과 관련해서 라비아에게 연락을 듣기만 했을 뿐, 그와 관련해서 적극적으로 물어보거나 한 적은 없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나?’
왠지 모르게 그 점이 라비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세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말이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이라는 엄청난 거리의 차이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번 미국 방문은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멋진 여성들도 많이 볼 수 있고 말이다.
“괜히 남자가 임신 관련해서 난리를 치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게 여겨질까 싶었죠. 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라비아.”
“…알겠어요.”
뭔가 어색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라비아를 향해 민국은 미소를 살짝 지어주었다.
아무튼 병원에서 만난 라비아는 여러 검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나마나 아이와 관련된 검사겠지만….
“아이는 잘 자라고 있나요?”
슬그머니 아이와 관련해서 질문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 답이 흘러 나왔다.
“네, 큰 문제없이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아요. 임신 사실을 너무 늦게 발견해서 조금 불안했었는데, 다행이죠.”
“성별은 나왔어요?”
“판단은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정확한 검사는 받지 못했어요.”
“왜요?”
“그, 그게…….”
말을 얼버무리는 라비아를 보며 민국은 고개를 갸웃했다.
알고 보니 친자확인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성별 확인도 남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뭔가 이래저래 남자의 동의가 굉장히 많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면 이왕 병원에 온 김에 성별 확인도 그리고 친자 확인 검사도 전부 하고 갈까요?”
“…네?”
라비아 맥퀸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검사를 하고 나면 나중에 병원에 또 올 필요는 없잖아요?”
“어, 그건 그렇지만….”
민국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탁을 하려던 것이기는 했지만, 민감한 사안이니 만큼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먼저 얘기를 해준다면야….
‘잘 못 생각했네.’
라비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남자가 일반적인 남성이 아니라는 걸 못 보던 사이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검사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남성의 동의가 없다면 검사가 불가능하다면서 그렇게나 철벽을 치던 의사는 민국이 모습을 드러내자 본인이 직접 검사실로 안내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친자 검사는 이삼일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아이의 성별은 바로 확인이 가능했다.
“축하드립니다, 남자 아이예요.”
“오…….”
“와! 축하해요! 라비아!!!”
결과가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서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의사와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박수가 터져 나왔다.
민국과 함께 미국을 따라온 팀원들도 다들 라비아를 향해 부러움을 보냈다. 임신한 것도 부러울지언데 남자 아이라니. 이어서 GGW 공격대의 세인트루이스 방문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미리암 로스가 부러움을 담아 툴툴거리며 말했다.
“인생 성공했네, 라비아.”
“히……. 너도 언젠가는 예쁜 아이 가질 수 있을 거야.”
“아이 좀 가질 수 있게 공격대 일정을 좀 줄여주는 건 어때? 이번 주만 벌써 던전 두 곳을 공략했다고.”
“에이, 그래봤자 【A】 난이도 던전인데. 미리암 수준으로는 간단한 일이잖아?”
“그게 무슨…! 그리고 아무리 【A】 난이도라고 해도 공대장 없이 던전을 공략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아?”
라비아의 말에 미리암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발끈했다.
그렇게 오랜 친구와 티격태격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던 미리암은 대기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민국을 발견하고는 슬쩍 인사를 건넸다.
“세인트루이스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히어로.”
“그냥 편하게 한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니면….”
“인도에서처럼 달링으로?”
“그것도 나쁘지 않죠.”
당황하게 만들 겸 장난 식으로 던진 말을 부드럽게 받아내는 민국의 모습에 미리암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리고는 슬쩍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얇은 티와 짙은 청바지. 흔하게 볼 수 있는 패션이지만 옷의 주인공이 한민국이기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굉장히 유혹적이고 야릇하게 보였다.
“으음….”
그와 함께 인도에서 가졌던 뜨거운 시간이 머릿속으로 떠오르자 미리암은 저도 모르게 다리가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몸에 새겨진 잊지 못 할 광란의 감각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세인트루이스에 며칠 머무르고 가신다고 했으니….’
잘하면 이번에도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예전의 일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적신 미리암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캡틴, 미국을 방문한 목적이 따로 있나요? 라비아를 제외하고요. 아니면 따로 하고 싶으신 일이라던가?”
“으음…. 글쎄요.”
미리암의 물음에 민국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생각에 잠겼다.
미국을 방문하기 전 일정과 관련해서 몇몇 제안들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직접 확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시 말해 이번 방문은 정말 평범하게 라비아를 만나러 온 것에 불과했다.
함께 온 팀원들 역시 미국 여행을 위해 따라온 것에 불과했고 말이다. 그 증거로 뷘드셴 자매는 병원에 오던 도중 세인트루이스 근방을 구경하고 온다며 헤어지기까지 했다.
“예정된 것은 없는데. 정말로 순수하게 라비아를 만나러 온 것이라서 당장 기억나는 건 없네요.”
“너를 보기 위해 이런 미남이 태평양을 건너 왔다니…. 오우. 이건 정말로 부럽네, 라비아.”
과장된 몸짓으로 라비아를 놀리는 미리암의 모습.
그리고 라비아와 시선이 마주친 민국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라비아를 보러 미국에 온 것은 맞았지만 오직 그녀만을 위해 미국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겸사겸사 당신도 보러 왔다고 하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날아든 민국의 말에 미리암은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팬티가 축축하게 젖은 것이 왈칵 무언가를 싼 게 틀림 없었다.
* * *
[한민국과 GGW 멤버들, 미국에 도착하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인들의 시선은 전부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덴버 국제 공항에 내린 한민국 일행이 바로 기차를 타고 세인트루이스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찍힌 몇몇 사진들은 많은 이들의 미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노점에서 핫도그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한민국과 일행들(사진)]
[진지하게 소세지를 고르는 한민국의 모습(사진)]
[인터넷으로 발권한 티켓을 들고 기차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는 한민국과 김소정.(사진)]
[케첩을 흘린 최유나와 그것을 닦아주는 한민국의 따뜻한 손길(사진)]
평범한 관광객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모습은 둘째치더라도 의외로 소탈한 모습으로 세인트루이스까지 향하는 이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민국의 빼어난 외모가 담긴 사진 몇 장으로는 도저히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민국 영웅과 관련된 사진 또 없나요?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다고? 남자 영웅?
●우리 나라에도 남자 영웅은 몇 명 있지 않아? 하지만 한민국과 비교하자면…. 그들은 뭔가 많은 것이 빠진 것처럼 보여.
●오늘부터 GGW 공격대의 팬이 되기로 했어요. GGW 만세!
이렇게 우연히 흘러나온 몇 장의 사진은 곧바로 한민국에 대한 큰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불길이 미 전역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발빠른 방송 관계자들은 바로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한민국이 미국을 방문한 천금과도 같은 기회에 어떻게든 그를 자신들의 방송에 출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민국이 미국을 방문하고 하루 뒤,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작된 하나의 소식이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라비아 맥퀸의 아이, 남자 아이로 밝혀져.]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한 한민국 영웅, 바로 라비아 맥퀸의 친자 검사에 응해.]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친자 검사. 99.121%의 확률로 영웅 한민국의 친자가 맞아.]
발 빠르게 이어진 검사와 순식간에 나온 결과.
그렇게 여러 논란으로 이어졌던 라비아 맥퀸의 친부는 한민국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 남아있는 몇몇 문제들이 있었지만….
“라비아가 임신한 아이의 국적은 당연히 미국이 될 겁니다.”
이 또한 민국이 아이의 국적은 미국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논란은 가볍게 종료되었다.
그렇게 라비아 맥퀸의 임신에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축복을 보내고 있을 무렵.
미국을 방문해서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낸 민국은 앞으로 미국에서 무엇을 일 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단은 화이트 하우스와 연합해 【S】 난이도 하위 혹은 【A】 난이도 최상위 던전을 돌 생각이었다.
‘미국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일단 라비아 맥퀸과 미리암 루스가 자신의 여자라는 증표를 남겨놓을 생각이었다.
그 방법은 역시나 마력의 결정으로 제작한 악세사리를 선물하는 것. 둘 다 특급 영웅답게 블루급 마력의 결정으로 제작한 악세사리는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은 그 윗 단계로 그녀들에게 선물을 해줄 생각이었다.
정말 희귀한 블랙급 마력의 결정도 있기는 했지만, 그건 악세사리로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골드급 마력의 결정을 계속해서 흡수해 현재의 능력이 한계에 다다르면 그 한계를 뛰어넘어 11등급의 영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폭제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블랙급 마력의 결정은 아주 중요한 곳에 보관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끝낸 민국은 바로 미리암을 찾았다. 랜덤 화상 채팅을 하고 있던 그녀가 민국의 방문에 깜짝 놀라며 핸드폰을 덮고는 물었다.
“…던전 공략이요?”
“네. 마력의 결정이 급하게 필요해서요. 그리고 이왕이면 공격대 인원 지원도 했으면 좋겠는데요.”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젯밤 한민국의 품에 안겨 아양을 떨어대었던 미리암의 음색이 살짝 바뀌었다.
다른 영웅도 아니고 한민국이 직접 GGW 공격대를 이끌고 세인트루이스에서 레이드를 한다는 것은 그냥 웃으면서 넘길 일이 아니었다.
공격대 전부가 온 것은 아니었지만 김소정, 최유나, 정예린으로 이루어진 딜러진은 십이 재앙을 두 개체나 쓰러뜨린 이들이었고 특히나 힐러진은 한민국을 포함해 완전체가 방문한 상황이었다. 잠시 후, 미리암이 조심스레 물었다.
“【A】 난이도?”
“【S】 난이도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S】 난이도라…….”
미국 전역에서도 세 개 공격대 아니 명색만 쉴더급에 불과한 한 팀을 빼면 두 개 공격대밖에 공략이 불가능한 위험 던전을 요구하는 민국의 행동에 미리암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S】 난이도를 넘어 인류 최후의 적이라 불리는 십이 재앙을 쓰러뜨린 영웅이었다.
“저 혼자는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 같고…. 자세히 알아보도록 할게요.”
미리암은 클랜 하우스에 연락을 취했다. 아무래도 이건 자신 혼자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화이트하우스에서 회의가 바로 열렸다.
의외로 GGW 공격대의 임시 활동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는데 땅이 넓은 나라답게 미국의 던전 관리가 굉장히 빡빡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게다가 최근 화이트하우스의 골머리를 썩고 있는 【S】 난이도 던전이 하나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 던전을 한민국 영웅에게 맡기자고요?”
“……그래요.”
라비아가 쉰 목소리를 내는 클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클랜장이 말하는 던전은 옐로스톤 국립공원 근처에 있는 코디 그리즐리 던전으로 무려 【S – 7】 난이도를 자랑하는 던전이었다. 현재 화이트하우스가 공략을 시도 중인 이 던전은 던전이 브레이크 되기까지 3년이 채 남지 않은 던전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은 공략이 중단된 상황이었는데 라비아 맥퀸이 임신 때문에 공격대에서 이탈한 것이 그 이유였다.
“너무 양심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S】 난이도 던전을 원한 것을 보면 따로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일단 얘기라도 꺼내보는 것이….”
아무튼 클랜 입장에서는 최대한 빠르게 이 던전의 타이머를 초기화시켜야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라비아가 출산을 하고 다시 복귀하기까지는 적어도 1년 이상의 이상이 걸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떨어진 실전 감각을 되찾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십이 재앙을 쓰러뜨린 한민국의 등장은 한 줄기의 빛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