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절벽의 바이콘
"도움이 필요하다, 카슬."
[갑자기? 혼자서 모든 걸 해먹을 생각 아니었어?]
수정구 너머의 괴물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자신을 얕보는 느낌의 시선. 거친 콧김이 절로 흘러 나왔다. 화는 나지만 여기서 불필요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불리한 상황에 처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바이콘이 양 팔을 벌리며 말했다.
"히히힝.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모든 것을 해먹다니? 가루다와 버니 그리고 파푸니르와 함께했던 작전이었어."
그리고 거하게 말아먹었다. 버니의 죽음이 치명타였다. 거기에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가루다의 배신까지. 녀석을 떠올리자마자 분노와 살의가 들끓었다.
"인간들의 시선을 끌어줘."
[내가 왜?]
"인간들을 상대로 싸우라는 게 아니야. 그냥 시선만 끌어주면 돼. 그러면 300만 크론 아니 350만 크론을 지불하도록 하지."
[오우….]
도르만의 황제 카슬의 목소리가 미미하게나마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350만 크론이면 9 등급의 던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허 마력이었다. 적은 양이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단순하게 인간들의 시선을 끌어주는 것뿐이다. 카슬 입장에서는 손해를 볼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대답은 바이콘의 예상을 깨는 말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이네.]
"뭐, 뭐라고?! 히힝?!"
[이봐, 바이콘. 내가 이 땅을 차지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나?]
애꾸눈을 한 검은색의 맹견이 인간처럼 주저앉으며 말했다. 바이콘이 몸을 떨며 카슬을 노려보았다.
[계속해서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며 인간들의 시선을 끌었던 너희와는 달리 우리 도르만은 중동이라 불리는 땅을 터전으로 삼아 둥지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 정복 전쟁 초창기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 350만 크론? 고작?]
카슬이 코웃음을 쳤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너무 푼돈이야, 바이콘.]
"……히힝."
바이은 새로운 제안을 하려다가 마음을 접었다.
자신이 어떤 제안을 해도 녀석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것이다. 눈앞의 녀석은 멍청한 개새끼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넓은 중앙아시아의 땅이 텅텅 비었다.
그 뿐인가?
메를린의 둥지가 있던 인도 여기 그 누구도 차지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까지. 공허의 어떤 세력도 그 드넓은 땅에 깃발을 꽂지 않은 것이다.
'만약 내가 인간들에게 패배한다면….'
주인이 없는 넓은 땅을 두고 공허 세력들끼리 각축적일 벌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승자는 지리적으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도르만의 카슬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있는 쉬다인과 플래스트가 진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카슬의 둥지를 지나쳐야 했다. 실버백? 놈이 아시아로 넘어오려면 필연적으로 리바이어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의 리바이어선은 독고다이에 가까운 녀석이었고, 파푸니르는 세력의 특성상 육지에 둥지를 펼칠 수 없었다.
라오스의 가루다가 있다지만 녀석의 세력은 재앙 중 최약체. 가루다가 밀고 들어오는 카슬의 강력한 군대를 막아낼 수 가능성은 제로였다.
"히히힝. 카슬, 놈들은 강하다. 예전의 전투를 생각하면 큰 코 다칠 거다."
바이콘이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세력은 끝이었다.
'인류의 군사력은 신경 쓸 가치가 없다.'
하지만 놈들에게는 재앙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날카로운 도구가 존재했다. 바로 GGW 공격대였다. 녀석의 손에 의해 무려 세 명의 재앙이 공허의 틈으로 사라졌다.
[인간들이 강하다고? 아아, 그 GGW라는 녀석 말이로군. 이번에는 버니까지 놈들에게 당했다지?]
카슬이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뭐, 위험한 놈들이라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나는 너희들과 달라, 바이콘.]
말과 함께 카슬이 뒤로 물러났고, 바이콘은 그의 뒤로 펼쳐진 넓은 공간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 도시. 그건 카슬이 이끄는 도르만 부족의 둥지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생명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도 안 돼."
바이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간들이 심복급 이라 부르는 10 등급의 네임드가 열 개체 가량이나 바이콘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우라그에는 토라스크를 포함해 두 개체밖에 존재하지 않는 커맨더들이었다. 자신들이 인간들의 군사 강국과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일찌감치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잠잠하고 있던 세력들은 이런 수준의 성장을 이뤄냈던 것이다.
"……푸르릉."
자신과의 둥지와 비교하니 절로 분노가 끓어올랐다.
재앙들의 회의가 열릴 때 마다 인류에 대한 재공격과 관련해서 몇몇 재앙들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이유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카슬도 그 중 하나. 놈은 지금고 같은 때를 대비해 자신의 세력과 군사력을 키워나갔던 게 틀림없었다.
쿠웅!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바이콘이 앞발로 땅을 내리 찍었다.
[행운을 비네 친구. 이왕이면 나 대신에 많은 인간들을 죽여주면 더 좋고.]
그 모습을 보며 이죽이며 웃던 카슬이 한 마디를 더하며 통신을 끊었다.
"히히히히힝!!!"
끊겨버린 통신에 바이콘이 악을 쓰듯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 감히…!!!"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것 같은 상황에 참지 못할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카슬이 아닌 재앙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게 틀림없었다. 다른 공허 세력들은 인간들의 공격을 받는 자신과 우라그를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인간들을 전부 죽이고 나면, 다음은 카슬 네 놈이다."
입가를 일그러뜨린 바이콘이 분노를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조금씩 인간들의 전력이 자신의 둥지로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토라스크가 있는 방향에서 오는 인간 세력들이었다.
분명 GGW 공격대가 포함된 인간들의 전력일 게 틀림없었다. 그 증거로 토라스크와의 연결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든 놈들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히히힝."
바이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우라그의 세력이 보유한 크론은 500만 단위. 한 세력이 보유한 것 치고는 상당히 적은 양이었다. 인간들과의 계속된 전투로 소모되고, 던전 브레이크 또한 연달아 실패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자원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최근 자신들의 둥지로 가까워지는 중국군을 몰아내느라 상당한 수준의 마력을 사용했다.
'게다가…….'
인간들의 공격이 이어지면 이 500만 단위의 크론 또한 순식간에 증발할 게 틀림없었다.
인류의 공격대가 던전의 어둠 괴물을 쓰러뜨릴 때 마다 던전이 보유하고 있던 공허 마력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강력한 개체일수록 소모되는 크론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에 반해 인간들은 부활석이라는 것을 이용해 어둠 괴물들을 상대로 소모전을 펼칠 수 있었다.
"히히히힝."
왠지 모를 허탈감이 피어올랐다.
10 등급은커녕 9 등급 어둠 괴물조차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던 인간들이 자신을 상대로 소모전을 펼칠 생각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나는 결코 그냥 무너지지 않는다, 히히힝."
바이콘은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가 서늘해질 정도로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인간들을 몰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인간의 영웅들이 던전의 공략을 진행하려면 부활석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만약 놈들이 부활석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소모전이 아닌 어둠 괴물의 일방적인 살육전이 될 게 분명했다.
"놈들을 던전 내에 묶어 두거나, 던전을 공략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바이콘은 소중하게 보관해놓고 있던 크론의 결정체를 바깥으로 꺼냈다.
물방울처럼 생긴 코어는 엄청난 힘을 담고 있었다.
무려 500만 크론. 이 정도 양의 공허 마력이면 8 등급 중에서도 정예 괴물을 던전의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커맨더를 내보내고 싶었지만, 그 정도의 양은 되지 못했다.
"가라, 바크라. 나가서 인간들을 몰아내고 이 둥지를 지켜라!"
바이콘의 시선을 받은 괴물을 향해 보랏빛의 마력이 살아 있는 생명체 마냥 흘러갔다. 이어서 괴물이 있던 공간이 흔들리면서 왜곡되기 시작했다.
* * *
"여기가 정말로 바이콘의 둥지일까?"
현아의 물음에 민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허의 틈으로 끌려간 토라스크가 자신들을 속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첫 전투가 끝나자마자 민국은 이곳이 바이콘의 둥지라고 확신했다.
영웅 패드는 바이콘의 둥지를 가리켜 토라스크의 둥지였던 【S - 6】 난이도의 던전과 동급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던전 내에서 등장하는 일반 괴물들이 토라스크의 던전보다 미세하게 강했다.
그 차이를 팀원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수많은 레이드 경험으로 단련된 자신의 감각은 속일 수 없었다.
'그리고 토라스크보다 강한 우라그 소유의 던전이라면….'
우라그들을 이끄는 바이콘의 둥지밖에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바로 공략?"
"음……."
민국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 녀석을 공략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바이콘을 쓰러뜨려야 전쟁이 끝나는 건 분명하지만, 외부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아직 오염된 대지로부터 생겨나는 괴물 무리들을 몰아내지 못했어.'
자신들을 대신해서 71 집단군과 한국군이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PLA를 포함한 공격대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쉴 새 없는 전투로 인해 병사들의 피로가 점점 누적되고 있는 상황. 그와 더불어 보급에도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리 때문이겠지.'
토라스크에 이어서 바이콘의 던전까지.
우라그의 세력권을 관통하다시피 이동했다. 당연히 어둠 괴물과의 충돌도 많았고, 그에 따른 화력의 소모도 엄청났다.
더 큰 문제는 속도전에 가까운 진격으로 인해 보급로를 안전하게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연합군 내부 정확히 말하면 중국 내부의 갈등으로 제대로 된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공략은 중단이야. 일단은 안전하게 바이콘의 둥지를 공략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해."
"둥지 밖을 청소한다는 거지?"
"응. 어차피 바이콘이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러니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팀원들은 민국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
민국의 말대로 괜히 위험을 무릅쓰고 공략에 나섰다가 화이트 하우스처럼 둥지 안에 갇히는 상황이 생기면 곤란했다.
'두 개의 군단급 전력이 있다지만….'
대형급 어둠 괴물의 숫자와 강력함을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전력도 아니었다.
실제로 어둠 괴물과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절에는 집단군 단위의 병력이 일주일 마다 증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현재는 그 공허의 세력들이 제각각 둥지를 만들며 찢어져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카오스가 자신을 이 세계로 보내기 전에 이미 멸망했을 게 분명했다.
아무튼 바이콘의 우라그가 71 집단군과 7 군단의 병력을 몰아낼 정도의 병력을 외부로 보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8, 9 등급의 이상의 개체가 나타난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보급조차 부족한 아군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적습!!!"
"모두 위치로!"
아니나 다를까 공격대가 던전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어둠 괴물 무리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딱 맞는 타이밍이었다.
"어…?"
"케, 켄타우로스?! 설마 저 놈 바이콘이야?!"
심지어 어둠 괴물 무리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녀석까지 보이고 있었다.
바이콘과 비슷한 생김새를 한 괴물. 놈이 창을 휘두를 때 마다 공허 마력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놈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중국 영웅이 민국을 향해 말했다.
"저 놈은 바크라입니다."
"바크라?"
"네, 【A - 1】 던전에서 발견된 놈으로 8 등급 특수로 평가 받는 괴물입니다."
영웅의 말을 들으며 민국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생각보다 강한 녀석이었다. 만약 자신들이 던전 안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저 놈 때문에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나왔을 게 불을 보듯 뻔했다.
"8 등급…?"
"쉽지는 않은 상대지만…. 뭐, 할만 하겠네."
던전이 아닌 현실에서 어둠 괴물을 상대하는 건 영웅 입장에서는 굉장한 페널티를 지고 싸움에 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활석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GGW 공격대는 현실에서 상위 어둠 괴물과의 싸움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인도 전쟁에서 몇 번이나 상위 괴물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던전이 아닌 현실에서는 영웅만 어둠 괴물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콰아앙!
속도를 내어 보병들을 공격하려던 바크라가 폴짝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 놈이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민국이 재빨리 무전기를 들었다.
"녀석의 이름은 바크라. 우측 능선으로 놈을 유도해 전투를 시작하겠습니다. 보호막이 깨지면 따끔하게 한 방 부탁드립니다."
[라져 댓.]
K - 5A1 흑범.
한국군의 6 세대 전차들의 포구가 놈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