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 - 프롤로그 - 이세계다!
“아오 저 병신 같은 말 같으니!”
손에 쥐고 있던 마권을 찢으면서 욕을 내뱉었다. 살면서 처음 해본 경마이고 큰 돈을 건 것도 아니며, 딱히 즐기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돈을 건 말이 뒤에서 세는 게 빠른 등수로 들어오자 게임에서 트롤러를 만난 것 같은 깝깝함이 느껴졌다.
“에이 시벌 내가 그럼 그렇지…내 그지 같은 인생에 조그마한 거라도 풀릴 리가 있나”
이름 정세마. 한 해가 시작되는 1월, 만 29세, 즉, 올해부턴 30살인 무직 백수. 제법 춥긴 하지만 쾌청한 좋은 날씨인 주말에 할 일 없는 아재들처럼 경마장에 와본 백수다.
처음부터 백수였던 건 아니었다. 20대 초반 군대 가기 전까진 나름 대로 준수한 외모, 178cm의 적당한 키, 뛰어난 성적, 자신감 넘치던 성격, 갑부는 아니지만 은수저 이상은 되는 적당히 부유한 집안, 주변에 많은 인맥들 등의 조건을 고루 갖춘, 내입으로 말하긴 뭐해도 나름 잘나가는 편에 속했었다.
하지만 복학 이후 여자 하나 잘못 만나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리고, 트라우마가 생겨 모든 의욕을 잃고 백수생활을 한지 벌써 6년째. 그리고 그 6년은, 트라우마로 인해 현실 여성들을 혐오하면서 2차원 여자 및 오덕문화에 몰두한 시간이었다.
“하…속는 셈 치고 와봤더니 별 재미도 없구만…”
아무리 내가 6년째 폐인 오덕생활을 하고 있다곤 하지만, 만나는 친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새해랍시고 오랜만에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이는 술자리에 나갔고, 거기서 바람쐴 겸 경마장 이라도 한번 가보는 게 어떠냐고 경마장 알바 경험이 있는 친구가 말했었다. 처음엔 별 생각 없었지만, 갑자기 오늘 아침 문득 기억이 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와본 경마장 이였다.
“…씨발 계집년이 왜 경마장에 쳐오고 지랄이야”
눈 앞에서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지나가자 무심코 입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트라우마가 생기면서 가장 심각해진 건 바로 이 여성혐오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성을 보는 시선이 변한 것이었는데, 트라우마가 생기기 이전까진 이차원 여자 같은건 관심도 없었으며 평범한 남자답게 현실의 예쁜 여자들에게 관심 있었다. 동시에 여자는 조신해야 하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배려해줘야 한다는 약간 구시대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생긴 이후론, 조신한 것 같은 여자는 언제든 남자를 배신하고 등쳐먹으려 하는 쌍년들이고, 올바른 여자는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19금 만화의 여자들 같이 창녀처럼 입고 복종하면서 다리나 벌리는 노예가 되는 것이 여자의 올바른 본분이라는, 완전히 미쳐버린 시선으로 현실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머리로는 미친 소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눈과 머리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6년간 내 성욕을 달래준 2차원 여자들의 이미지와 합쳐져 나의 여성관을 바꿔버렸다. 자신에게 절대복종하는, 창녀 노예 같은 변태녀. 올바른 여자란 그런 것이라고 머릿속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티기 힘든 6년 이였다.
“기분전환이 되긴 개뿔… 시간만 아깝네. 집에 가서 말아가씨나 돌려야지 씁….”
다년간 방에 박혀 그 이전까진 인연도 없던 게임과 오덕 문화만 즐긴 백수가 갑작스레 혼자 경마장에 와봤자 기분전환이 될 리가 없겠지. 사실 당연한 거였다. 30살이 되고 답답한 마음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나와봤지만, 밝은 햇살과 넓은 공원, 경마에 열이 올라있는 아저씨들과 군데군데 가족으로 보이는 무리들을 바라보는 건 트라우마 걸린 방구석 백수에겐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말아가씨 OST를 폰에 넣어 놨었나? ...엉?”
귀에 이어폰을 꽂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려는데, 누가 봐도 노숙자스러운 차림새의, 아저씨인지 할아버진지 모를 나이든 중년이 소주를 마시며 비틀대는 것이 보였다. 뭐지? 여긴 음주불가 아니었나? 싶었지만 주변에서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 괜히 건들지 말고 집에나 가야겠다 하고 생각할 때쯤…
“허잌쿠!”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딪쳐 노숙자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고꾸라진 혀로 묘한 신음을 내며 나이든 사람이 쓰러지는 꼴을 보는 것은 누구든 썩 기분 좋을 리가 없지. 거하게 쓰러진 노숙자는 일어나질 못했고, 부딪친 사람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노숙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나도 그냥 지나가려 했지만, 이미 봐 버린걸 어쩌나.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동하여 노숙자에게 발이 옮겨졌다.
“저… 어르신 괜찮으세요?” “…….?”
어지럽게 풀풀 날리는 술 냄새를 참으며, 노숙자에게 다가가 부축하자 노숙자는 마치 이게 뭐냐는 듯한 얼굴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게 보면 부담스럽잖아…
“……클클클, 괜찮아졌다네 젊은이.”
괜찮으면 괜찮은 거지 괜찮아 진 것은 뭐야. 말투도 이상하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크게 다친 곳도 없어 보이고 하니 빠르게 빠져야겠다.
“괜찮으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이보게 젊은이. 잠깐 얘기 좀 하지 않겠나?” “…네?”
얘기라니, 이 노숙자 잠깐 신경 써줬다고 왜 이러는 건가. 역시 괜히 나섰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채우려 하는데 이어진 노숙자의 말이 생각을 날려버렸다.
“자네에게 꼭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자네 군대 복학한 이후로 여자 때문에 마음고생 하는 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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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어르신이… 신 이라고요?” “껄껄, 생각과는 다르겠지만 그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지.”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고풍스러운 말투를 하면서 노숙자는 자신이 신이라고 소개를 했다. 분명 미친 인간 취급을 해야 정상인데, 생전 처음 본 사람이 내 이름과 나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줄줄이 늘어놓는걸 보곤 자리에 앉아 얘기를 들어 볼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긴가민가 한 것 같으니 이런 것도 보여줄 수 있지… 엇차”
손에 든 소주잔을 앞에 있던 경마 중인 아저씨에게 쏟아붓는 걸 보곤, 뭐 하는 거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나가기 전에 사라져버렸다. 술을 쏟아 부었는데도 경마중인 아저씨는 돌아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젖었던 옷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전혀 젖지 않은 상태로 돌아와있었다.
설마 이 노숙자 신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단 말인가? 음주불가인 곳에 술을 들고 어슬렁거리는 노숙자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게 좀 이상하긴 했는데…
“하, 하하… 설마 주변에서 할아버질 보지 못하는 것도 그런 겁니까?” “뭐, 그런 셈이지.”
세상에. 신이니 뭐니 그런 건 모두 사기라고 생각했었는데... 10대 시절까진 혹시 하였지만 20대 이후론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었던 나에게, 눈앞에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노숙자 신의 존재는 할말을 잃게 만드는 존재였다.
“세상에… 저, 그럼 할아, 아니 신께서 저에게 무슨 얘기를…?” “편하게 부르게나. 뭐……별건 아니고, 혹시 새로운 삶을 제안하고 싶어서 말이야.” “새로운 삶…이요?”
새로운 삶. 내 인생에서 무척이나 바라던 것을 콕 집어 말하는 눈앞의 신에게 감탄과 의심이 생겨났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바라던걸 여태까지 쌩깐 주제에 이제 와서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 제안을 한 단 말인가?
“클클, 자네 이세계 같은 거 잘 알지 않는가. 그런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볼 생각 없냐는 얘기일세”
맙소사. 이세계. 이거 말로만 듣던 이세계 전생인가? 신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세계로 전생시켜준다고?
“지금 자네에겐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순 없다네. 여러 가지 조건이나 제약… 그런 게 있거든. 헌데 말해줄 수 있는 것만 말해주자면 그곳은 신이 사라진 세상일세. 멸망해가는 우주지.” “멸망해가는 세상에서 살아볼 생각 없냐니, 제안하신 게 좀 겁나는 제안 같습니다만…”
아니 그럼 그렇지. 이거 제안한 곳이 해피라이프 이세계물이 아니라 아포칼립스물 이었던 모양이다. 멸망해가는 세상에 가볼 생각 없냐니 이건 좀…
“걱정하지 말게나. 그런 혼돈스런 우주는 아니고 나름 잘 살고 있는 세상이니까. 거기다 자넨 지금 삶에 후회와 고통밖에 없지 않은가? 멸망이라곤 했지만 잘 굴러가던 우주에 수백 년 후 갑자기 나타나는 멸망이라네. 지금 자네라면 좀 솔깃하지 않은가?” “……”
잘 굴러가던 세상에서 수백 년 후에 갑자기 나타나는 멸망... 이런 조건이면 좀 솔깃하긴 하다. 나름 잘나가던 인생이 여자 때문에 꼬인 뒤론,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충동이 일어나는 삶을 살고 있는 답답한 인생이다. 부모님이 조금 걸리지만, 서로 얼굴 안본지도 수년째... 이런 자식은 이미 잊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확실히 혹하긴 하네요. 몇 가지만 더 답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갑자기 이런 좋은 조건을 거는 거라면 사기가 아닌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이고깽 같은건줄 알고 갔다가 거지같은 세상이라면 되돌리지도 못하니까.
“일단... 왜 저를 보내주시려는 겁니까? 굳이 저를 보내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클클. 뭐 그래. 불안하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거긴 신이 사라진 우주라네.” “그것도 이후에 여쭤보려 했는데... 신이 사라졌다니요? 무슨 의미신지...” “말 그대로. 그 우주의 신이 찾아올 멸망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다 실패하고 사라져버렸네.”
뭐... 신이 멸망을 못 막았다고? 그래서 사라져?
“본래 우주란 것은 수없이 많은 종류의 우주가 있고, 각각의 우주를 유지하려는 신이 있기 마련이지. 이 신들은 생명체가 가진 종교의 신이 아니라, 개념적인 존재들이다... 이해가 안 돼도 이 정도만 알고 있게나.”
무슨 얘긴진 몰라도 여러 우주가 있고 담당 신이 있다는 거겠지.
“신이 사라진 우주는 유지력이 점점 사라지다 어느 순간 완전히 무(無)가 되어 버리는데, 그렇다고 다른 우주의 신이 맡을 수도 없다네. 그래서 그냥 멸망하길 기다리는 곳인데... 자네를 보내면 그 우주가 조금이라도 더 유지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 정도로 자네를 보내려 하는 걸세.” “저를 보내는 게 약간의 희망? 어째섭니까?” “그건 말해줄 수 없다네. 가서 살아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걸세.”
으음, 어쩐지 불안감이…
“흠...... 그 우주는 이곳과는 물리법칙이랄까... 세상의 법칙이 다르지. 쉽게 말하면 자네가 생각하는 마법 쓰고 몬스터 잡고 하는 그런 판타지 이세계일세. 어떤가?”
의심이 생기자 마자 오덕으로선 피할 수 없는 판타지 이세계란 조건을 말하다니. 이게 신인가 하고 감탄해버렸다. 이거 너무 땡기는 조건이다.
“클클클... 제약 때문에 말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미안하구만. 어찌됐건 가면 꽤 재밌게 지낼 순 있을걸세. 적어도 트라우마에 잡혀 있는 이곳보단 말이야. 가면 자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거란건 보장해 주지.” “......좋네요.”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니 눈앞의 노숙자의 이미지가 완전히 변해버렸다. 술 냄새 풍기는 노숙자에서 전지전능한 진짜 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흥분감이 올라오며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결정된 것 같구만. 그럼 가서 잘 살게나.” “네!? 어!? 자, 잠깐만요! 아직 여러가지...!” “가서 살다보면 알게될걸세. 살다보면. 클클...”
네!? 아직 뭘로 전생할지도 말 안 했는데!? 전생특전 고르는 그런 건 없습니까!? 말을 채 꺼내지도 못한 채 나는 어두운 공간에서 끝없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 이거 설마 밑장빼기 당한 건가? 눈뜨면 혼파망 이세계? 그런 건가?
...............
(…뭐야 어쩐지 가는 시간이 길다? 로딩인가?)
허둥지둥 대며 눈을 감고 신을 의심하다, 어쩐지 긴 시간을 느끼곤 눈을 떠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만이 느껴진다. 지금 보내지고 있는 건가? 이게 한참 지속되니 놀란 가슴이 진정되고 잡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하...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을 주고나서 보내주지... 그리고 원래 전생 특전 같은 건 고르게 해주는 거 아냐?”
툴툴대면서 알고 있던 이세계 상식을 말해보지만, 이미 이리 된걸 어쩌랴, 마음을 다잡고 희망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세계는 어떤 곳 일까... 가면 외모는 바뀌려나? 요즘은 똥배 좀 나오고 머리관리도 안 해서 개판이긴 하지만 그래도 군대가기 전까진 나름 먹혀주는 얼굴에 인싸였는데... 더 못생겨지진 않겠지? 이세계로 가면 앞으론 다시 옛날 마인드로 여자를 대해야겠어. 새로운 삶을 사는데 계속 그런 미친 여성관을 가지고 사는 건 좀 그렇지. 아, 이세계 여자는 지구 여자랑은 달랐으면 좋겠다. 하은진 고년 같은 개년들을 만나면 또 자살충동 일어날 거야. 아, 혹시 다른 몸으로 전생한다면 꼬추는 말꼬추처럼 존나게 컸음 좋겠다. 아주 그냥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게. 거기 말 같은 동물은 있을까? 경마장 말들은 그래도 제법 귀여웠는데. 그리고 또....”
이런 저런 희망사항들이나 잡생각을 늘어놓으며, 어느새 나는 빛을 느끼곤 눈을 떴다.
그렇게 나는, 눈 앞에 넓은 초원이 펼쳐진 이세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