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 27화 - 나랑 술마시자!
“아아... 어, 어찌 이런 흉악한... 에, 에센티아를 돌봐주시는 여신이시여. 부디 이 어린양을 굽어 살펴 주소서...”
날 보곤 새파래진 채 기겁을 하며 쓰러진 아름답던 수녀는, 오들오들 떨면서 쓰러진 채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요즘 라디아에선 내가 익숙한 모양인지 무서워하던 표정들이 신기한 걸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었는데... 이제 와서 여태까지 겪은 반응 중에 역대급이라 할만한 반응을 만나게 될 줄이야...
“티, 티 없이 맑은 여신이시여. 이 어린양에게 어, 어둠을 극복할 힘을 주시고...”
“클레아, 클레아! 진정해. 저 분은 이전에 얘기 들었던 라디아에 온 신수인 분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네, 네? 바, 바울. 저 흉악한 기운이 신수라구요...?”
아... 이거 진짜 표정이 상처받을 것 같은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수녀님. 제가 워낙 흉악하게 생겼다 보니 수녀님을 놀래 켜 드린 것 같네요.” “마, 말을...!? 지, 진짜 신수인가요...?” “네. 신수 맞습니다. 인간화는 아직 못하지만...”
바울이 클레아 라고 부른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데, 어째 일어나면서도 계속 못 믿는 얼굴이다. 여전히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째 나도 슬퍼진다.
“아무래도 저희는 이쯤에서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네,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클레아. 일단 진정하고 들어가 있도록 해.” “아... 알았어요 바울...”
그렇게 바울과 함께 응접실 같은 곳이 있는 건물을 빠져 나왔다. 건물을 나오자 바울은 병동 쪽으로 걸어가며 한숨을 쉰 후 말했다.
“이거... 죄송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제가 사과 드리겠습니다.” “아뇨 뭐... 사실 많이 겪어서 익숙합니다.” “어쩐지 너무 놀라시는 것처럼 보이던데요.”
그녀를 보고 같이 놀라던 리즈벳이 바울에게 묻자, 바울은 한번 더 한숨을 쉰 후 말했다.
“그게... 그녀는 눈이 안보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이긴 하는데 거의 안 보이는 수준으로 시력이 나빠서 눈앞에 건물이 있는지 아닌지 정도만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이죠.”
어쩐지 눈을 감고 있던 게 안보이니 그냥 감고 있는 거였나.
“그런데 문제는 그녀는 교회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자랐고, 거기에 뛰어난 신앙의 재능을 가진 수녀입니다. 눈이 안 보이는데 교회에서 자라다 보니 그 재능이 신앙 스킬과 에세르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어쩐지 안타깝단 목소리로 얘기를 계속했다.
“감지능력이 워낙 민감해져서, 현재 여신교 전체를 둘러봐도 에세르와 테세르를 느끼는 능력은 가장 뛰어난 수녀이지요. 거기에 신앙 스킬도 상당한 수준이지만, 눈이 안 보인다는 건 큰 단점이라 아무래도 활동에 영향이...”
음... 하긴 눈의 장애는 장애 중에서도 상당히 불편한 장애니까...
“아마 그 민감한 감지 능력 때문에 신수분의 기운을 보고 많이 놀란 듯 합니다. 다시 사과 드리겠습니다.”
사실 좀 마음이 착잡하긴 했지만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바울은 어쩐지 안타깝단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하아, 눈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 여자를 제치고 성녀로 지목을 받았을 텐데... 아, 이건 상관없는 이야기군요. 죄송합니다.”
와우 성녀라니, 이거 생각보다 대단한 수녀였나. 그리 생각하며 어느새 도착한 병동으로 들어가 알스의 상태를 한번 확인한 후, 입구의 수녀에게 리즈벳의 주소를 적어주고 교회의 정문 앞으로 나왔다.
“그럼, 알스씨의 상태가 바뀌는 대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대금은 그때 치르도록 하죠. 용사분 이시기도 하고, 아직 초보 모험가이신 여러분의 상황을 고려해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바울은 웃은 얼굴로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뭐... 비싸지만 우리가 가진 돈이면 낼 순 있겠지..?
돌아오는 길에는 어느새 해가 지고, 퇴근하는 듯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리즈벳이 풀이 죽은 듯한 모습이라, 위로도 할 겸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고 말하고 길드관리소에 들어가 내용을 보고한 후, 관리소의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중간에 리즈벳에게 한번 추가 성욕처리를 부탁해보려 했는데, 너무 풀 죽은 상태라서 말을 꺼내질 못했다. 씁...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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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주가 지났다. 3일째 되던 날, 알스의 몸 안에 침투한 테세르를 모두 정화했단 얘기를 듣고, 이제 곧 깨어나겠구나 생각했는데 어쩐지 알스는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제들과 수녀들, 그리고 바울도 알스의 상황을 살폈으나, 몸은 멀쩡한데 어쩐지 일어나지만 못하는 상황이었다. 뭐지? 혹시 식물인간 같은 상태라도 된 건가? 내 욕망을 자각한 후 알스는 뭐 이제 어찌되든 상관없다 라고 생각하던 나였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니 어쩐지 찝찝함을 느꼈다.
리즈벳은 이 상태가 지속되니 완전히 풀이 죽은 채 매일 알스의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성욕처리를 전혀 못 받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리즈벳에게 슬쩍 물었더니 그냥 얌전히 해주었다. 아니, 그렇다기 보단 기운 빠져 있던 그녀가 성욕처리만 시작하면 거기에 평소보다 더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걱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성욕처리를 하며 푸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알스 몰래 풀숲에 숨어서 하던 그 거칠고 걱정까지 되는 목구멍 페라를, 스스로 그렇게 집어넣고 거칠게 움직이는 것을 보곤 깜짝 놀랬었다.
어쩐지 알스가 일어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점점 더 거칠어지는 느낌이다. 나야 이 상황이 좋긴 했지만, 사실 나는 얼마 전부터 다른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인간화 스킬. 이제 슬슬 리즈벳에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다음 스텝은 이 말 몸뚱이로 넘어가기엔 꽤 문제가 많은 일이다. 겉으로 보이는 체격 차이만 두 배 이상에, 목에 그렇게 들어가는걸 보고 혹시 싶지만 그래도 이건 좀 무리다 싶은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말자지. 이런 상태로 다음 스텝을 넘어가는 건 좀 힘들게 느껴진다.
알스가 쓰러져 있는 동안 나도 조급해져서, 관리소에서 왠지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을 법한 마법사 같은 모험가들에게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저기 상점가의 책방 같은 곳 주인이나 지식인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물어봐도, 관련 지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영주성에 찾아가 공무원 같은 사람들에게 관련 정보가 없나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더라.
이렇게 되니 날이 갈수록 맘이 조급해진다. 설마 진짜 이대로 인간화 스킬을 수백 년 동안 못 얻는다고? 당장 수백 년 후엔 멸망한다고 했는데? 난 그럼 이 세계에서 평생 말 모습으로 살다 죽는 건가? 여자랑 섹스도 못해본 채로?
갑갑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설령 리즈벳과 뭔가 그럴듯한 분위기가 된다 하더라도, 아마 이 모습으론 리즈벳도 섹스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텐데. 거기다 억지로 한다 치더라도 이 말자지로 시도했다가 리즈벳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그런 걱정을 하며 창고에 누워 한숨을 쉬었다. 바깥의 구름이 흐릿흐릿한 게, 어쩐지 비가 올 것 같아 오늘은 그냥 창고에서 뒹굴고 있는 중이다. 리즈벳은 알스에게 다녀온 후에 성욕처리를 해 주러 오겠지. 아. 답답함에 짜증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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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벳 씨! 마침 잘 오셨어요! 알스 씨가 깨어나셨어요!”
병동에 도착한 리즈벳에게 알스가 깨어났단 소리는 리즈벳은 우울하던 기분이 날아가고 기쁨에 벅차 오르게 만들었다.
알스가 쓰러진 2주간, 왜 알스를 더 말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리즈벳은 자신을 계속 자책했다. 어떻게든 알스를 말렸어야 했는데,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는 알스의 표정을 보니 리즈벳은 도저히 알스를 말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알스는 2주가 넘도록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그 2주간, 자신의 가슴을 옥죄는 안타까운 감정이 리즈벳의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 리즈벳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 괴로운 감정을 벗어나고 싶어서, 리즈벳은 평소 어쩔 수 없이 해준다며 자신을 납득시키던 세마의 성욕처리에 빠져들었다. 세마의 말자지에서 느껴지는 코를 찌르는 수컷과 짐승에 냄새에 마약이라도 한 듯 정신이 몽롱해지고, 손과 입으로 그 말자지에 봉사하면서 달아오르는 몸과 봉사한 후 느껴지는 피곤함이 기분 좋았다. 거기에 마지막에 배출되는 정액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수컷의 맛. 그 정액이 목과 입안에 들러붙으며 느끼는 기분 좋은 호흡곤란.
성욕처리를 해 주면서 느끼는 그 모든 것은 리즈벳에게 잠시나마 걱정과 슬픔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치료는 끝났다고 하는데도 깨어나지 않는 알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지 못하는 사제들을 보고 있으니, 날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더 늘어났었다. 하지만 알스가 깨어났으니 이제 걱정할 일은 없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알스가 있을 병동의 문을 열렸다.
“알스!!!!”
알스가 누워있는 방 안에 뛰쳐들어가 알스의 이름을 부른다. 일어나긴 했지만, 몸이 피곤한 듯 눈 밑에 살짝 다크써클이 내려앉은 알스의 얼굴이 보인다. 그 얼굴을 보자 리즈벳은 감격으로 눈을 글썽이며 알스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알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리즈...”
어쩐지 알스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오래 누워있었던 터라 목이 잠긴 걸까? 리즈벳은 그렇게 생각하며 알스를 껴안은 채 물었다.
“알스... 몸은 괜찮아? 2주 넘게 누워있었어. 알스가 의식을 못 찾으면 어쩌지 하고 난...” “내가... 2주 넘게...?”
알스를 껴안은 채 기쁨에 글썽이는 리즈벳. 그러나 알스의 얼굴엔 충격이 감돌고, 하반신을 덮은 이불을 잡은 손은, 그 이불을 구기며 감정이 느껴지는 주름을 만들었다.
“아, 알스...? 왜 그래...?”
알스의 감정을 느낀 것인지 다시 걱정이 서린 얼굴로 묻는 리즈벳. 어쩐지, 알스의 얼굴이 그늘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미안... 리즈...” “뭐, 뭐가? 알스가 사과할 일은... 히어로 이터가 그런걸 쏠 줄은 몰랐으니까...”
알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리즈벳은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알스에겐 그 위로가, 자신의 약함과 무모함을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내가 그렇게 고집 부려서 히어로 이터에게 덤빈 건데...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어... 아니... 상대하기도 전에 그런 어이없는 실수로... 기껏 단련한 용사투기도 써보지 못하고...” “아, 아냐 알스! 그렇게 되는 건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니까! 알스가 자책할 일이 아냐!”
자신의 고집으로 진행한 일을, 자신이 실수해서 망쳐버렸다는 이 상황이, 알스를 너무나 부끄럽고 자신에게 화가 나게 만들었다. 만약 검을 조금이라도 휘둘러 봤었더라면 이런 감정을 느끼진 않았을 텐데. 검을 휘두르긴커녕 세마와 리즈벳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상황을 떠올리자, 알스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해 봐! 우리가 히어로 이터한테 도전한 건 세마가 있기도 했기 때문이잖아? 그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전한 거니까! 아쉽긴 하겠지만 그리 자책할 것 까진...!”
리즈벳이 어떻게든 자신의 위로해주려 한다는 건 알겠지만, 지금 알스의 몸을 휘감은 분노와 치욕은 그것이 위로가 아닌 비난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일단 히어로 이터는 길드 관리소에 정보가 들어가서 라디아 주변 전체를 탐색하기 시작했어. 숨기고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 우린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우린 이제 히어로 이터 말고 다른 일을...”
알스 자신이 그렇게 꼴사납게 망쳐버린 일을, 다른 길드들이 처리하려 하고 있다고 한다. 리즈벳의 말이 알스에겐 마치, 약한 너는 이제 그만 빠지라는 것처럼 들린다.
몸을 휘감은 치욕과 분노, 2주간 의식을 잃고 있다 깨어난 답답한 머리의 사고력은, 점점 더 알스가 이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 그러니까 당분간 알스는 몸 회복만 신경 써도 돼! 회복되면 다시 상시 퀘스트 같은 거라도 하러 가자? 세마도 함께 갈 테니까 걱정할 일은...”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해!!!!!”
순간, 알스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리즈벳에게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그 외침을 들은 리즈벳은,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버려 움직이질 못했다.
“...일단 혼자 있게 해줘...”
그렇게 말하자, 리즈벳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곧,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윽.....”
자신의 한심함과 그런 한심함에 대한 분노로 리즈벳에게 소리질러 버린 알스는, 몸에 밀려드는 격렬한 자기혐오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 시발......”
평소에는 일부러라도 하지 않던 욕설을 입에 담는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그 자리에서 토할 것 같은 혐오감에 지배될 것 같으니까. 알스는 태어난 후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연인에게 소리지르게 만든 이 짜증나는 감정을 잊기 위해, 침대에 쓰러져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리즈...... 미안해...”
하지만 그 사과는, 리즈벳에겐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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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발 벌써 비가 오네 미친”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에 가까운 비를 맞으며 길을 조심조심 달려나갔다. 아무래도 날씨가 찝찝한 게 신경 쓰여서, 우산을 가져간 건지 아닌지 모르는 리즈벳을 태워 비가 오기 전에 빠르게 돌아올 생각이었다. 헌데 내 예상을 비웃듯이 나와서 조금 걷자마자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난 지구에서도 날씨에게 자주 엿을 먹는 편이였는데, 설마 이세계 날씨까지 날 엿 먹이는 녀석일 줄이야.
“하 씨, 이렇게 갔는데 리즈벳이랑 엇갈리면 그게 또 제대로 뒤통수인데.”
우산도 못 드는 몸이라 바로 젖어버려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설령 리즈벳이 우산이 있더라도 일단 만나고 가야겠다 하고 교회 쪽으로 달렸다. 헌데 교회의 정문 앞에, 누군가 사람 같은 형체가 보인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나 보네. 아이고 반가워라... 엉?”
어쩐지 묘한 동지애가 느껴지는 형체를 바라보며 달려가니, 그 형체의 주인은 리즈벳이였다. 아무래도 우산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교회에 들어가 있지 왜 나와 있는 거지?
“리즈벳! 왜 나와있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즈벳에게 다가가, 최대한 몸을 기울여 몸을 가려 주었다. 비가 제법 많이 와서 의미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구에서 나름 매너 있는 남자의 삶을 살아왔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리즈벳의 몸을 가리려 했다.
“비 오는 거 봤으면 그냥 안에 있지... 알스는 보고 나온거야? 난 날씨보고 너 태우러 나왔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세마.”
리즈벳이 고개를 숙인 그대로, 말을 끊고 내 이름을 부른다. 뭐야 뭔 일이야. 하고 조금 물러나 리즈벳의 표정을 살피려 하자, 리즈벳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나랑 같이 술 마시자.”
그렇게 말하는 리즈벳의 눈 아래로, 어쩐지 쏟아지는 비가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