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 - 54화 - 던전 준비! (3)
상쾌한 아침 햇살을 느끼며 일어난 후, 조금 공들여 몸을 씻고 갈기를 다듬었다.
그래도 높으신 분을 만나러 가는 거니 최대한 덜 험악하게 보이게 만들어 놔야겠지. 뭘 어떻게 만지든 험악해 보이는 건 똑같다는 게 문제지만.
갈기를 매만지다 리안나가 만들어 준 옷들 중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은 후, 위에는 자켓을 걸쳤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 봤는데... 으음. 아무리 옷이 멋져도 무섭게 생긴 말대가리가 얼굴로 달려있으니 영 꺼림칙하다.
그래도 고급스런 옷을 갖춰 입으니 약간은 흉악함이 줄어든 것 같기는 해 보이는데... 여기서 더 건들 수도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준비를 갖추고 리즈벳과 보기로 한 시간이 되어 1층으로 내려가니, 라운지에 리즈벳과 알스가 보였다.
그런데 날 먼저 발견한 리즈벳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이어서 날 쳐다본 알스의 표정이 굳었다.
“뭐야. 그렇게 안 어울려? 이거 좀 충격인데...” “아, 아냐. 세마 네 인상이 확 바뀐 것 같아서... 처음 인간 형태를 봤을 때보다 더 인상이 달라졌어.”
알스가 놀란 표정인 채로 말했다. 거울로 본 내 모습은 그냥 옷만 잘 빼입은 반인반수 말대가리였는데?
이어서 리즈벳의 반응이 궁금해져서 리즈벳을 쳐다보니,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굴을 붉히고 있다. 설마 모습이 멋져서 놀란 거야? 아니 내가 말하긴 뭐하긴 한데 이 말대가리가 멋지니?
“어... 세마... 그... 으, 응. 잘 어울리네!”
리즈벳이 홍조를 띄운 채 당황하며 미소를 지었다. 으음... 리즈벳의 미적 감각이 의심되는데.
그런 리즈벳의 미소를 보면서 이상한 곳은 없는지 두 사람에게 확인 받은 후, 그대로 영주성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니 예상은 했었지만, 사람들의 휘둥그레한 시선이 따갑다. 그 시선에 놀라움뿐만 아니라 뭔가 어맛 하는 감탄하는 시선이 섞여 있다는 게 참 이해가 안 되네.
리즈벳만 그런 게 아니라 에센티아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이상한 건가 이거?
그렇게 떨떠름하게 걷다가, 교회로 빠지는 길목에서 두 사람과 헤어졌다. 두 사람은 이대로 교회에서 바울에게 의뢰 보상을 받은 후 던전 준비물을 구입하러 갈 예정.
아마 영주성 볼 일이 오래 걸릴 거라 예상되어서, 두 사람과는 저녁에 다시 보기로 했다.
그렇게 두 사람과 떨어지고 귀족거리를 지나며 영주성에 향하는데... 귀족 거리답게 부유해 보이는 듯한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 따갑다.
이쪽은 또 색다른 시선이네. 언제쯤 이런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괴롭구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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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성에 도착해 초대장을 넘겨주자 마자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영주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생각과는 다르게 기다리거나 하는 일 없이 빠르게 처리가 되었다.
2~3시간 정도는 기다리거나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영주가 생각보다 시간이 널널한건가?
아무튼 그렇게 이동하며 둘러보는 영주성은, 마치 성이 아니라 그냥 사무실들이 모인 빌딩이 생각나는 구조였다.
안내해주는 공무원 같은 직원에게 물으니 영주성 1~2층은 입구 안쪽에 여러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실들이 있고, 지금 가고 있는 3층 이상은 고위급 인물들 및 영주의 업무 공간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인상은 고풍스러운 외관과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만 아니었으면 그냥 회사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이다.
더불어 성에 영주 일가의 생활공간도 붙어있지만, 사무실들이 모인 이쪽에서는 들어갈 순 없다고 한다. 하긴 사는 곳이랑 일하는 곳이 붙어있으면 좀 그렇긴 하지.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날 안내해준 공무원이 약간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해주었다.
눈 앞에 영주의 집무실답게 상당히 크고 화려한 문이 보인다. 오는 길에 보이던 사무실과는 달리 확실히 성답다는 느낌이 드는 제법 웅장한 문이다.
이걸 보니 이제야 뭔가 영주성다운 느낌이 나는 것 같다.
“혹시 영주님을 만나는데 기억해야 될 예절 같은 게 있을까요?” “너무 예의 없는 행동만 주의하시면 될 겁니다. 세마님이 아직 인간 문화를 잘 모르는 신수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계시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직원이 문을 열자... 입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처럼 보이는 두 명의 병사와, 안쪽에서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서류더미가 제법 쌓여있는 책상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던 중년 남성이 날 보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아아. 왔는가. 자네가 신수 세마군 이로군. 잘 왔네.”
그렇게 말하며 날 맞이하는 중년 남성의 표정에선, 정말 순수하게 날 반기는 듯한 감정만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모르는 사람이 건네는 순수한 인사를 받으니 이 아저씨에 대한 첫인상이 제법 좋게 느껴진다.
근데... 어째 이 아저씨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 하다. 푹 꺼진 다크써클과 주름에서 상당한 피로가 느껴진다. 제법 가린 티가 나는 데도 피곤함이 느껴질 정도라니, 아무래도 영주 자리가 꽤나 힘든 모양이다.
“꼭 한번 자네를 만나보고 싶었네. 이쪽으로 오게나.” “감사합니다.”
영주는 그렇게 말하며 응접용으로 보이는 소파 쪽 자리를 권했다. 감사인사를 하면서 자리에 앉자, 영주도 맞은 편에 눈을 문지르며 앉았다.
“후우... 먼저 자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네. 히어로 이터 토벌에서 큰 역할을 해줬다 하더군.” “하하... 여러모로 운이 좋았습니다. 다른 모험가분들이 안 계셨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자 영주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30살 이라고 했었나? 그래서 그런지 다른 신수들에게서 보이던 고압적인 자세가 없군. 다른 신수들 같았으면 상당히 피곤했을 텐데 말이야.” “다른 신수들이요?”
내가 되묻자 영주는 다른 신수들과 라인하르트 왕국이 신수를 어찌 대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다른 신수들은 기본적으로 수백 년을 산 몬스터들 이다 보니 끽해봐야 100년을 사는 인간들에게 차이는 있어도 어느정도 고압적인 자세를 보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인간이 통치하며 인간 중심적인 문화가 자리 잡힌 라인하르트 왕국과는 잘 맞지 않는 편이며, 여태까지 몇 번 교류했던 신수들과도 그리 가까운 관계는 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현재 왕국에 소속된 신수는 없으며, 끽해봐야 왕국 영토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신수 한두 명과 약간의 교류를 하는 정도. 여신 다음이 인간혈통의 왕실이라 여기는 왕국과는 영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신수는 신성하게 여겨지는데다, 각 신수마다 힘과 거느리는 집단이 있어서 왕국에서 배척할 수도 없는 존재라네. 그런데 자네가 나타나 모험가가 될 생각이니 시민으로 받아달라며 찾아온 거지.”
이거 꽤 재밌는 얘긴데. 왕국 특성상 보기 힘든 신수가 제 발로 찾아왔단 얘긴가.
“사실 자네가 왔을 때 영주성에 초대해 정식으로 환영할 예정이었네만... 자네도 알다시피 이상규모 던전과 히어로 이터라는 녀석이 나타나서 도저히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네.”
그렇게 말하면서 영주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왕실에서도 상황 파악한다고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아무튼 인사가 늦어진 점.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정착금이니 뭐니 하면서 신경 써주신 것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말하자 영주는 미소를 지으며 버튼 같은 게 달린 마도구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 작은 장사를 들고 비서처럼 보이는 직원이 나타나 내 앞에 상자를 내려두었다.
“이건 자네가 히어로 이터 토벌에 힘써준 데에 대한 보상이라네. 더 챙겨주고 싶었지만 참여하는 길드마다 동일하게 금화 50닢씩 지불하기로 계약된 터라... 그 이상을 넣진 못했네만, 받아줬으면 좋겠네.” “감사합니다.”
나는 상자는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영주 정도 되는 사람이 금액 가지고 사기 치진 않겠지.
한번에 금화 50닢이라. 한방에 복권 당첨이네. 입 꼬리 올라간 건 아니겠지?
“자네는 계속 라디아에서 지낼 예정인가?” “모험가 생활을 하다 보면 밖을 돌아다닐 일이 많겠지만, 사는 건 한동안 계속 라디아에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꼭 그래 줬으면 좋겠군. 신수가 왔단 것 만으로도 라디아에 축복이 찾아온 거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야.”
아직 다른 신수들을 만나보지 못한 내 머릿속에선 신수는 그냥 인간 둔갑이 가능한 몬스터인데 축복이라고 까지 말할 정도라니. 체감은 안되지만 신수가 대단하긴 한가보다.
그렇게 영주와 얘기를 주고받다, 오늘 영주성에 찾아온 또 다른 목적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히어로 이터에 대한 정보 공유. 이번에 나타난 녀석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비슷한 녀석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며, 그 녀석들을 퇴치하기 위해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영주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자넨... 혹시 그 마물들을 쓰러트리기 위해 모험가가 된 건가?” “모험가를 해보고 싶단 것도 있긴 하지만, 일단 그렇습니다.”
사실 전혀 상관 없었지만 그렇다 치지 뭐.
“...자네가 온건 정말 축복일지도 모르겠군. 국민들의 방패인 용사를 노리는 마물을 잡기 위해 모험가가 되었다라...”
많은 용사들과 원수나 다름없게 될 예정이지만, 일단은 그렇다 치자.
잠시 생각하던 영주는, 이전에 나타났던 히어로 이터와 비슷한 마물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여태까지 몇 차례 이상규모 던전과 함께 테세르같은 기운을 내뿜지만 오염은 발생하지 않는 마물들이 발견되었었고, 그 마물들을 토벌하기 위해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었다고 한다.
그 마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실종되거나 소식이 끊긴 용사들이 몇 명인가 나왔었는데, 이번 히어로 이터의 일을 생각하면 베테랑 용사처럼 그 마물들에게 희생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고 한다.
이 추측 때문에 현재 왕실도 골치 아픈 상황이라고 말하며 영주는 머리를 짚었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더니 내가 말한 얘기를 왕실에 전달할 것이며, 관련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공유해 주겠다고 말했다.
신수라서 뭔가 있는 게 아닐까 기대하는 것 같은데 나야 잘됐지 뭐.
얘기가 끝나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영주와 인사를 나눈 후, 영주의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멸망을 부르는 자에 대한 정보 공유도 약속 받았고... 무엇보다 이 상자. 금화가 50닢 이라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흐흐흐...... 엇.”
기분 좋게 집무실 밖으로 나왔는데, 복도 쪽에서 서류봉투 같은 걸 들고 있는 한 귀부인이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머리를 올려 값비싸 보이는 비녀를 꽃은, 투명함이 느껴지는 하늘색 머리카락, 귀족답다 라는 말이 나오는 화려한 드레스.
결혼한 듯한 중년인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얼굴은 얼핏 보면 20대로도 착각할만한 상당한 미모의 귀부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거기다 저 여자 가슴이... 이거 내가 여태까지 만난 가슴 중 길드관리소의 관리소장과 클레아가 투톱 이였는데, 이쪽도 그 두 사람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아니 이쪽이 더 큰가...?
그 놀라운 가슴과 미모를 바라보던 중... 무표정하던 귀부인의 표정이, 날 발견하자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더러운 몬스터가...”
...뭐시여? 내가 잘못 들었나? 작게 중얼거렸지만 지금 나 욕한 거지?
그 귀부인은 날 흘겨보다 그대로 시선을 돌리곤 영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모습을 보고 예상했지만 귀족인가? 아니 그보다 다짜고짜 욕부터 박다니. 거 아줌마 성깔 더럽네.
간만에 만난 적대적인 시선 덕분에 기분이 확 다운되네. 얼굴이랑 몸매가 아깝다 에이.
나는 꿀꿀해진 기분을 풀기 위해 금화가 들어있는 상자를 쓰다듬으며, 영주성을 빠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