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 - 클레아의 비밀 1-1
“...후우...”
아침 햇살을 느끼며 일어나 여신님께 기도를 올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기분 좋은 휴일. 히어로 이터 토벌에 참여한 모험가들의 치료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되자 바울은 사제와 수녀들에게 돌아가며 휴일을 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휴일에도 크게 일상이 변하진 않지만, 그래도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이란 건 마음이 편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까요. 편해야 할 휴일인데 제 기분은 몇 일 전부터 이상하게 진정되지 않는 이상한 기분입니다.
아마도 그건 히어로 이터 토벌에서 돌아온 날 밤, 바울이 저를 불러 한 말 때문이겠죠.
그날 밤, 남들 몰래 교회 뒤편으로 절 부른 바울은, 제게 무척이나 놀라운 말을 꺼냈습니다.
쭉 사랑해 왔다고. 성녀 선출이 끝나고 나면, 결과가 어찌 됐든 자신과 결혼해 평생 함께해 달라고.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절 부를 때 바울의 에세르는, 여태까지 봐왔던 에세르 중에서 가장 크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요.
바울과 알고 지낸 지 어느새 10년. 바울이 제게 보내는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 이겠죠.
‘내가... 결혼을...’
결혼할 나이가 조금 지났음에도, 저는 아직 사랑하는 남성과 함께 한다는 것이 잘 상상되지가 않습니다.
저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에세르는 대부분 참기 힘든 역겨움이 느껴졌었고, 그 감각 때문에 저는 남성들을 대하기가 껄끄러워 피해왔으니까요.
하지만 10년 전. 제가 살던 작은 마을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도중 만났던 바울에게서 느낀 에세르는... 어쩐지 다른 남자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얼마 안가 자연스럽게 바울과 친해졌고, 그 바울이 주교가 되었을 때, 평생 살 것 같았던 마을을 벗어나 바울을 따라 라디아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0년 가량을 함께한 바울이 고백해 주었을 땐 기쁜 감정이 솟아올랐고, 그 기쁨에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그 고백을 받아들이는 말이 나왔습니다.
마음속에선 저도 모르게, 바울과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이 이런 걸까요...’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서 자랐던 저는, 사랑이란 감정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느껴지는 에세르와 목소리만 알 뿐, 눈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의 생김새도 모르고, 비슷한 또래의 수녀들이 멋진 남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요.
물론 바울이라면 믿을 수 있고, 저 역시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와 평생을 함께하는 저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분명 바울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안정된 기분이 되긴 하지만... 그런데 어쩐지 그 기분은 사랑 이라기엔 미지근한 것 같이 느껴져서... 이게 사랑이란 감정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확신도 없는 제가, 바울 같은 자상한 남자와 함께해도 되는 걸까요?
점자 책으로, 그리고 또래 수녀들과의 대화로 제가 인식한 사랑이란 건... 뭔가 설레고... 뜨겁고... 그리고 강렬해야만 하는 것인데. 어째서 바울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어쩐지 그런 상상하던 감정들과 비슷한... 강렬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라디아에 찾아온 신수. 세마씨... 그리고 바울의 권유로 그 세마씨와 함께 히어로 이터 토벌에 참여했던 날.
제게 화가 난 세마씨가 제 수녀복의 치마를 뜯어내 엉덩이를 그 커다란 손으로 마구 때렸을 때.
엉덩이로 느껴지는 거친 고통과 함께... 어쩐지... 제가 상상하던 그 감정과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째서 일까요? 세마씨에게서 느껴지는 에세르는 제가 보았던 그 어떤 남성보다 흉악하고 두려운 에세르였는데.
몇몇 남성들에게 느끼던, 당장이라도 제 몸을 덮칠 것 같은... 그런 불쾌한 느낌을 수십배로 농축해 저에게 끼얹는 듯한 그런 에세르를 가진 세마씨.
그 에세르 때문에 세마씨에 대해 제멋대로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엉덩이를 맞을 때 느낀 그 감각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오해였다고 해도 흉악한 기운 때문에 상당히 꺼려지는 분인데... 거기다 그런 부끄러운 체벌을 당했는데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요?
부족한 제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읏...’
그 때의 일을 생각하니, 어쩐지 몸이 뜨거워지고 아랫배가 저릿한 느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살면서 몇 번인가 느껴왔던 이상한 감각. 최근에는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세마씨에게 엉덩이를 맞은 일을 떠올릴 때마다 이 이상한 감각이 절 덮쳐옵니다.
‘티없이 맑은 여신이시여, 부디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1~2년에 한번씩 이런 알 수 없는 감각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이상해 지는 것 같아 늘 여신님께 기도를 드리며 버텼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이 기도를 몇 번이나 드리게 되었습니다.
뭔가 제 몸이 이상해 지기라도 한 걸까요?
“하아...”
한참을 기도하고 난 후, 어느 정도 몸이 진정되자 창문 근처로 다가가, 거의 보이지 않는 눈에 흐릿하게 들어오는 빛을 통해 시간을 가늠했습니다. 아마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모양입니다.
‘바울을 찾아서 함께 점심이라도 먹을까요...’
미래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란 걸 인식하고 만나다 보면 조금 다르게 느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울을 찾기 위해 방을 나왔습니다.
수녀들의 기숙사를 나와 몸의 감각을 집중하며 바울을 찾으려던 그 때...
어디선가 느껴본, 불쾌한 느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면서 온 몸에 오싹한 기운이 퍼졌습니다.
이 흉흉한 듯한 에세르의 느낌. 설마...
“안녕 클레아. 또 보네.” “어, 엇!? 세, 세마...씨?”
그곳에는, 피하고 싶었던 신수, 세마씨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지난 의뢰에 대한 보상을 받으러 온 알스씨와 리즈벳씨를 만나러 왔다가 엇갈려버렸다는 모양입니다.
세마씨의 꺼림칙한 기운 때문에 인사만 하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세마씨는 저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권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쩐지 세마씨에게서 느껴지는 에세르가 뭔가 오늘은 더 꺼림칙하게 느껴져서 최대한 거절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히어로 이터 토벌 당시의 일과 계속되는 세마씨의 권유를 거절하기 미안해져서, 결국 알겠다고 말해버렸습니다.
그 뒤, 세마씨를 따라 어쩐지 고급스러운 것 같은 식당에 들어가, 서로 얘기를 나누며 처음 먹어보는 고급스러운 요리에 감탄했습니다.
어느 샌가 술도 나온 것 같았지만, 교회에서 쓰이는 미사주도 한 모금씩 마시니 약간이라면 괜찮겠죠.
그러는 사이 어느 샌가 긴장이 풀리고 세마씨의 기운이 조금 익숙해져서, 저는 그 동안 세마씨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습니다.
“그... 죄송했어요. 세마씨.” “응? 뭐가?”
세마씨에게 느끼던 감각을 고백하며 사과하는 저에게, 세마씨는 괜찮다며 저를 다독였습니다.
정말... 이런 분을 그렇게나 꺼렸었다니.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감각이 여태까진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사람은 만나봐야 아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며 건배한 후 달콤한 술과 요리를 먹던 도중...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의식이 흐릿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제 의식은, 그 안개 속에서 잠들어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