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6 - 클레아의 비밀 2
세마 씨가 문을 열고 나간 후, 두 여자만 남은 방에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 정적 속에서 저는, 리즈벳에게 무엇부터 물어야 될지 고민하며 어지러운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세마 씨와 리즈벳 씨 사이에 말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성욕처리를 부탁하던 세마 씨가, 슬쩍 리즈벳 씨와도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얘기했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 리즈벳 씨는 알스 씨와 소꿉친구이자 연인이라고 했었는데?’
그것에 의문을 가졌었지만, 도저히 거기에 대해 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었습니다..
세마 씨와 리즈벳 씨 사이에 남녀간의 관계가 있다는 듯한 암시. 거기에 더해 날이 갈수록 알스 씨가 아니라 세마 씨와의 사이에서 뜨거운 감정이 느껴지는 리즈벳 씨.
그 두 가지 사실에서, 차마 떠올리기 민망하고 입에 담기 힘든 결론이 떠올랐었기 때문입니다..
리즈벳 씨가 연인인 알스 씨 몰래 세마 씨와 바람을 피우고 있고... 점점, 알스 씨가 아니라 세마 씨를 사랑하는 감정이 커져가고 있다는, 그런...
그 민망한 내용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리즈벳 씨와 세마 씨의 관계에 대해 캐묻지 않았고,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쩐지 에세르의 기운이 너무나도 달라진 리즈벳 씨가 스스로 저에게 세마 씨와의 성욕처리에 대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리, 리즈벳 씨? 도대체... 왜 그런 얘길...” “쿡쿡...♡”
리즈벳 씨의 에세르와 웃는 목소리에서, 어쩐지 기분 나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클레아 씨. 주인님께 성욕처리를 해드리고 있었잖아? 그걸 당분간 매일 좀 해줬으면 할 뿐이야♡” “무, 무슨... 그런데, 주인님... 이라고요?”
주인님이라니, 리즈벳 씨와 세마 씨의 관계는 도대체...?
‘혹시... 세마 씨가 저한테 했던 것처럼 협박을? 아니, 그렇다기엔 리즈벳 씨의 감정이 너무 차분한데...’
그런 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리즈벳 씨가 요염한 목소리로 웃으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킥킥...♡ 별거 아냐. 그저... 세마라는 수컷은,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자... 날 정복한 수컷이거든♡ 그런 수컷을 주인님으로 모시는 건 당연한 거잖아?”
자신을 정복한 수컷...? 알스 씨가 있는데 세마 씨를 사랑한다고...?
리즈벳 씨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리, 리즈벳 씨? 리즈벳 씨는 분명 알스 씨와...” “하아... 알스?”
알스 씨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리즈벳 씨에게서 느껴지던 감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습니다.
그 감정의 온도차에, 저는 어쩐지 등골에 오싹함이 흐르면서, 눈앞의 리즈벳 씨에게서 조금 공포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수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병신 같은 녀석이랑 사귈 리가 없잖아?” “...네? 지금 무슨 소릴...”
점점 제 앞에 있는 여자가 정말 이전의 리즈벳 씨가 맞는지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분명 이전의 리즈벳 씨는, 알스 씨보다 세마 씨에게 더 뜨거운 감정을 보내는 게 느껴지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스 씨에게 보내는 감정에 지금 같은 혐오감과 불쾌함, 적대심이 존재하진 않았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어찌된 것일까요? 알스 씨의 이름을 들은 리즈벳 씨에게선, 여태까지 제가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혐오감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 쓰레기는 얼마 후에 잘 정리할거야. 그것보다...”
이해가 안될 정도로 리즈벳 씨의 감정이 급격하게 다시 올라가면서, 목소리의 톤까지 변한 채 말을 이어갔습니다.
“주인님의 성욕처리 말인데...”
맞아. 성욕처리. 도대체 왜 리즈벳 씨가 그런 얘기를 꺼낸 걸까요?
“내가 당분간 낮에는 주인님과 함께 다닐 수가 없거든. 그래서 클레아 씨에게 부탁하는 거야.” “네? 그, 그렇다고...” “클레아 씨.”
리즈벳 씨가 제 말을 끊으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저를 불렀습니다.
“주인님은 말이지... 아무리 용을 써봤자 하루에 한두 번 사정하는 게 고작인 다른 수컷들과는 달라”
그리고 천천히, 저에게 세마 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클레아 씨도 느껴봤겠지만, 그 신체와 정력은 생명체의 한계 따윈 아득히 뛰어넘었어. 식사랑 수분만 있으면 쉬지 않고 영원히 교미할 수 있을 정도야.”
교미라니... 어쩐지 리즈벳 씨의 목소리에 황홀함과 자랑스러움이 담겨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 몸을 가진 주인님인데, 암컷을 원하는 욕망까지 다른 수컷들의 미지근한 욕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
그건... 확실히... 세마 씨에게서 느꼈었던 것 같은...
“그런 주인님에게 낮 한정이라곤 하지만, 곁에 붙어있지 못한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 언제든지 몸을 바칠 수 있도록 곁에 붙어있는 게 암컷 노예의 역할인데 말이야. 하아...”
그렇게 말하는 리즈벳 씨에게서, 정말 커다란 안타까움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클레아 씨야. 클레아 씨라면, 주인님에게 성욕처리를 해주기로 약속한 것도 있으니 주인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잖아?” “그, 그건... 세마 씨의 협박 때문에...” “클레아 씨.”
절 부른 리즈벳 씨가, 제가 앉아있는 소파 뒤로 돌아가 제 어깨에 손을 올렸습니다.
“쿡쿡...♡ 클레아 씨도 알고 있잖아?” “네? 뭐, 뭘 말인가요?”
제 어깨를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로 쓰다듬던 리즈벳 씨가, 제 귀에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인님... 세마라는 수컷이, 정말 대단한 수컷이란 걸♡ 클레아 씨도 점점 세마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무, 무슨...! 아니에요!”
도대체 무슨... 리즈벳 씨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아니, 난 알고 있어. 클레아 씨가 세마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속삭이는 리즈벳 씨의 목소리가, 어쩐지 요염한 느낌이 들면서 제 맘을 간지럽히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의 두꺼운 팔을 느꼈을 때, 그 단단하고 뜨거운 몸에 안겼을 때... 상상해오던 우수한 수컷이라고 생각했었지?”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주인님의 뜨거운 욕망의 감정을 느꼈을 때, 그 뜨거운 욕망이야 말로 수컷이 암컷에게 보내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느꼈잖아?”
그렇지 않아요. 그런 건 사랑이 아니에요.
“주인님이 보내는 뜨거운 욕망에 흥분을 느끼고... 빈약하고 미지근하다 느끼던 바울씨와 주인님을 비교하고...”
흥분하지 않았어요. 비교하지 않았어요. 저는 바울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 뜨거운 욕망을 가진 수컷을... 그 근사하고 황홀한 육체를 가진 수컷을...”
...분명 세마 씨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긴 하지만... 하지만 전...!
“숭배하고 싶다고 생각했잖아?”
...!!?
“클레아 씨는 다른 평범한 수컷들의 밋밋한 사랑으로 만족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자신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자신의 ‘신’ 이 되어줄 수 있는 수컷이어야만 클레아 씨를 만족시켜 줄 수 있지.”
나의... 신?
“클레아 씨가 원하는 건, 연인끼리 서로 배려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해주는 우수한 수컷을 숭배하고 섬기는 것...”
날... 지배해주는...? 그 수컷을... 숭배...?
“바울? 클레아 씨도 알고 있잖아? 그 남자는 클레아 씨가 숭배할만한 수컷이 아니란 걸. 그 남자는 여성에게서 어머니 같은 애정을 원하는 유약한 남자라는걸.”
...제가 바울의 에세르에서 외면하던 그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후후...♡ 뭐, 주인님에게 몸을 바치라거나 나처럼 갈아타라는 소리는 아니야. 그런 수컷이라도 일단 ‘지금은’ 클레아 씨의 연인이니까...♡”
그래요. 저는 바울의 연인이에요. 그를 배신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이 제안을 받는다면... 체험해 볼 수 있다구? 우수한 수컷을 숭배하고 봉사하는 기쁨을...♡ 순결을 유지한 채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말이야♡”
리즈벳 씨의 손이 어느 샌가, 제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저는 그 손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리즈벳 씨의 말이... 이렇게 달콤하게 들리는 걸까요?
“우수한 수컷에게 지배당하고...♡ 우수한 수컷을 숭배하고...♡ 우수한 수컷에게 정복당하고...♡ 우수한 수컷에게 복종하고...♡”
자각하려 하지 않았던... 달콤하고... 황홀한... 정말 멋진 말들...
“우수한 수컷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고 섬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클레아 씨가 꿈꿔오던 ‘진정한 사랑’...♡ 그렇지?”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
마치 저조차 알지 못하던 저의 본성을 일깨우는 것처럼, 리즈벳 씨의 달콤한 말이 제 귀에 들어와 몸을 헤집으며 돌아다닙니다.
“거기다...♡ 킥킥...♡ 주인님에게 부탁해서 한가지 허가를 받아줄게♡” “허가... 라고요?”
마치 즐거운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웃던 리즈벳 씨는, 저에게 놀랄만한 제안을 건넸습니다.
“내가 말한 기간까지 이 제안을 받아준다면... 주인님에게 봉사했던 것 그대로, 바울 씨에게 해줘도 돼♡”
...그건... 설마...
“비교해 볼 수 있잖아? 자신의 연인과, 우수한 수컷간의 차이를♡ 그렇게 한 번 비교해 보는 게 나중에 결혼하더라도 더 도움될걸?”
리즈벳 씨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걸까요. 이 무슨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하지만... 확실히... 바울과 세마 씨의 차이가 어떨지 궁금해서... 거절의 목소리가 나오질 않습니다.
“바울 씨와 결혼하기 전에... 잘 비교해 해보는 거야♡ 두 수컷간의 차이를...♡ 자신의 어떤 수컷을 섬기길 원하는지를...♡
말도 안 되는 제안인데...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당연히 바울이겠죠. 네. 그래요. 연인이니까. 당연히 바울을 섬기길 원하게 될 거에요.
그래야만... 하니까요.
“후후...♡ 받아준 것 같네♡ 기한은 주인님이 만든 길드가 허가가 나올 때까지♡ 매일 주인님이 찾아오실 테니까, 이전처럼 성욕을 풀어드리면 돼♡”
리즈벳 씨는 들뜬 목소리로 말하면서, 제 가슴에서 손을 떼고 제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길드 허가가 나오고 난 뒤에도 주인님과 약속한 기간은 좀 남아있겠지만, 그 땐 내가 주인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으니 괜찮아♡ 그러니까... 쿡쿡♡ 클레아 씨가 ‘원한다면’ 그 시점에서 끝나게 될 거야♡”
...마치 제가 끝나길 원하지 않을 거란 것처럼 말하는 리즈벳 씨지만...
어째서일까요. 그 말에 반박을 하고 싶은데. 자신이 끝나는 것을 원할 거라는 확신이 들질 않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른 점은... 협박이나 강요가 없는 상태에서, 주인님의 지배를 느껴보고 스스로 봉사해 보는 것...♡ 저번에 던전에서 주인님이 구해주셨을 때 해봤던 것과 똑같이 하면 돼♡”
세마 씨가 말해준 걸까요... 그 일까지 알고 있다니...
“암컷을 지배하고 복종시킬 수 있는 우수하고 훌륭한 수컷...♡ 그 수컷을 섬기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잘 느껴봐♡”
...꿀꺽.
우수한 수컷을 섬기는 기쁨...
그 말이... 너무나도 근사하게 들려서...
저는...
“그럼... 궁금한 건 있어?”
...그래요. 이것부터 물어봐야겠죠.
“......도대체 세마 씨와 리즈벳 씨는... 무슨 관계인 건가요?”
그러자 리즈벳 씨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황홀한 목소리로 제게 속삭였습니다.
“주인님에게 있어서, 자신의 암컷들은 모두 주인님의 연인이자 노예들이야.”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는 리즈벳 씨의 목소리에서, 어쩐지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타니아 리즈벳은, 그런 주인님에게 모든걸 바치고 복종을 맹세한 한 마리의 암컷 노예지♡”
그런 리즈벳 씨의 감정을 느끼자, 저는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부러운 감정이 흘러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