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9 - 107화 - 왕도에서의 나날! (3)
“...어떻던가?”
근위병들을 물린 알현실에서, 왕좌에 앉은 라인하르트의 국왕, 라인하르트 폰 아브에투스 13세 는 땀을 닦으며 오를란도에게 물었다.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문제되진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군.”
국왕은 지친 것처럼 왕좌에 기대앉으며, 방금 전까지 아래에 있었던 신수를 떠올리곤 몸을 떨었다.
그 흉악하게 생긴 외형. 그러나 말투는 그 외형과는 달리 교양과 존중이 느껴지던, 난생 처음 보는 반인반수 형태의 신수.
너무나도 차이 나는 외형과 행동 때문에, 아브에투스는 아직도 마음 속으로 불안함이 새어나왔다.
“정말이지. 에세르를 못 느끼는 나도 흉흉하단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두렵게 생겼더군. 나에게 존칭을 쓰면서 잘 배운 듯한 대화가 가능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꽤 고민스러웠을걸세.” “확실히, 다른 신수들과는 달리 꽤 이질적인 기운이더군요.” “어때요? 써먹을 수 있겠던가요?”
왕과 오를란도, 두 사람만이 있던 알현실에서 갑작스레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향한 곳을 두 사람이 바라보자, 그 곳에는 화려한 드레스에 얼굴을 반투명한 베일로 가린 여성이 있었다.
화려하고 고상한 드레스 위로 부각되는 풍만하고 육감적인 신체와, 가려진 베일 위로 살짝 비쳐 보이는 그녀의 얼굴.
그 모습은 그녀가 보통 여성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만한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오를란도는 가볍게 머리를 숙인 후,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운 듯이 말을 이었다.
“아직은... 다른 신수들에 비해 어려서인지, 육체 외엔 크게 눈에 띄진 않더군요.” “아쉽네요. 바로 써먹을 수 있었다면, 신수가 참가하는 거니 빠르게 마족들을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래도 모험가를 한다고 했으니, 신수인 만큼 빠른 성장을 기대해봐도 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왕좌에 앉아있던 국왕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쟁이 꼭 필요하겠는가? 왕국에 신수가 왔으니, 그를 잘 써서 수왕국에게 중재를 요청한다면...” “그 수왕국에서 은근히 마족에게 협력하고 있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하는 건가요. 아브에투스? 마족은 대화가 안 통하는 놈들이란 건 잘 알잖아요.” “알지 알아. 희생될 병사와 기사들 때문에 푸념해 본걸세.”
두 사람에게 질렸다는 듯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왕은, 한숨을 쉰 후 다시 오를란도에게 물었다.
“...그 신수가 협력을 하겠던가?” “길드를 만들었더군요. 왕국에서 살아갈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상황을 보면서 잘 설득해 봐야겠죠.” “권력에 관심 있다면, 인성을 파악한 후 적당한 작위를 내려주는 것도 괜찮겠죠. 신수라서 오래 살 테니, 왕국에 헌신하는 것만 보장된다면 앞으로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 후, 오를란도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다른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슬슬 국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히 지내시길.” “...그리 급하게 와서 쉬지도 못했는데. 미안하네 오를란도 경.” “아닙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걸 알면 가만히 있을 녀석이 아니니까요. 서로 싸우면 피해가 워낙 커져 견제만 하고 있을 뿐,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공격해 올 겁니다.”
얼굴에 베일을 두른 여성은, 고개를 든 오를란도에게 다가가 살며시 그에게 포옹하며 말했다.
“친구에게 차 한잔 대접하지 못하고 바로 떠나 보내야 한다니. 부디 무리하진 말아줘요. 오를란도 경.”
자신을 껴안은 그녀가 떨어지자, 오를란도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라인하르트 파시파 에스토리아 왕비.”
***********************************************************************************************************
다음날. 기대 없이 만난 교황은 딱 생각대로의 할아버지였다.
그나마 귀족은 없던 왕의 알현과는 다르게, 여신교의 높으신 분들도 모여 날 신기한 것처럼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만남.
내 흉흉한 기운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면서 은근슬쩍 여신을 믿길 권유하는 통에 참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웃으며 그들에게 대충대충 대답해주다, 어쩌다 보니 교황과 식사를 함께하게 되면서 중간에 바울과 클레아를 끼운 식사자리가 마련되었다.
“호오오... 그 히어로 이터를 찾고 있다?” “네. 얘기는 들으셨겠지만, 아주 흉악한 마물입니다. 제가 모험가를 하게 된 이유기도 하지요.”
무슨 사명감을 가진 용사처럼 말하면서, 은근슬쩍 교황에게 가진 정보 좀 풀어보란 식으로 물었다.
그러자 교황은 잠시 ‘허어~’ 하며 고민하더니, 골치 아프단 듯이 내게 말했다.
“최근 안 그래도 그 마물들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네. 그 동안 사고로 치부해오던 용사나 모험가들의 실종이 그 녀석들 때문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니, 교회에서도 전력으로 정보를 모으고 있는 상황이지만...”
도움이 안되네 이거. 왕이건 교황이건 왜이래?
그냥 확 멸망에 대한 얘길 들려주면서 위기감을 가지게 해 봐?
...후. 그래. 이쪽도 여신교 안에서 감지 능력으로 손꼽힌단 클레아가 나서서야 그 고양이 같던 히어로 이터, 에레보스가 숨어있던 곳을 찾았으니까.
얘들이 무능한 게 아니라 그냥 찾기 힘든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물이란 참으로 두려운 존재들이야. 여신님께서 안배해둔 인간이나 몬스터와는 다르게,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지성도 없이 그저 생명을 해칠 뿐이니... 여신님께서...”
으음. 누가 나이 많은 교황님 아니랄까 봐. 갑자기 여신 얘기가 나오더니, 여신을 찬양하는 말을 줄줄 늘어놓고 있다.
대충 믿습니까? 믿숩니다! 하는 분위기로 맞장구나 쳐줘야지.
“...왕도 주변에선 왕실 기사단이 비슷한 분위기의 마물을 몇 번 처단한 적이 있었다고 들었네. 몇 년 사이의 일이니, 아마 왕도 주변엔 히어로 이터는 없지 않을까 싶네만... 최근에 4~5명 정도의 실종자가 생겨서 길드관리소 쪽에서 혹시나 하며 파악 중이지. 한번 그쪽을 들려 보는 것도 좋을 걸세.”
마지막에서야 그나마 정보다운 정보가 나왔네.
왕실 기사단이 몇 마리 잡았었다라... 그런 강한 애들이 나서는 걸 봐선, 그냥 적당히 즐겁게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멸망을 늦춰두고 여유 부려도 되겠어.
그런 사기적인 애들이 있는데, 그냥 안심할 만큼 적당하게만 시간을 벌어두고 이후로는 뒹굴면서 놀고먹어도 되지 않을까?
애초에 용사들의 여자를 빼앗아 정신적 충격을 주는 것도 멸망을 늦추는데엔 별 도움은 안 되는 수준이었지. 그저 내 욕망을 해소하는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선을 그어둔 것일 뿐.
여신의 기억같은 정보를 떠올리면, 멸망을 늦추는 건 히어로 이터를 잡는게 직빵이지만... 나 대신 잡을 애들이 있다?
그럼 뭐, 얘기는 끝난거지.
어제와 오늘. 그렇게 왕과 교회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한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새롭게 에센티아에서의 삶의 목표를 세웠다.
적당히 감당할 수 있는 용사들만 골라, 그 용사들의 여자를 빼앗고 내 암컷으로 만든다!
적당히 나 죽을 때까지 즐기며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멸망을 늦춰두고, 적당한 선에서 여유롭게 모험가 생활을 하며 산다!
그래! 인생은 적당해야지! 암! 노는게 최고야!
예아! 해피&섹스한 말쥬지 생활!
***********************************************************************************************************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뒹굴거리는 삶을 살려는 내 결심이 무색하게, 우리에게 아스투스 라는 이름의 대주교가 황당한 과제를 전달했다.
“말도 안됩니다! 성녀로서의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이지 모험가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앞에서, 바울이 책상을 내리치며 눈 앞의 나이든 대주교에게 소리지르자, 대주교는 어쩐지 조금 능글맞다 생각되는 미소를 지으며 바울에게 말했다.
“이번엔 경우가 다르지 않나. 클레아도 클라리스도, 거기다 그 두 명만큼 유력하진 않지만 나머지 후보들도 마물 토벌 경험을 내세우고 있어. 성녀에게 딱히 필수적인 요소도 아닌데 말이야.”
아스투스 대주교가 전달한 첫 번째 과제는, 지정된 던전에서의 마물 토벌.
아스투스 본인이 직접 제안하고 통과시킨 과제라고 한다.
“어디까지나 가산점의 요소일 뿐인데 다들 자신만만하게 토벌 경력을 내세우고 있어. 그렇다면 어디 한번 능력을 확인해 보자는 걸세. 왕도에서 생활하던 클라리스는 알고 있는 모험가들이 있을 거고, 다른 곳에서 온 자들에겐 길드관리소에 협력을 구해 적절한 모험가들을 모집해서 파티를 만들어주면 문제없겠지. 클레아는 거기 신수와 함께 했었다 들었는데, 오히려 이득 아닌가?“
아니, 그냥 클라리스 라는 걔한테 좋은 거 아냐? 자기 구역이잖아 여기.
난 아직 쪼렙이야. 무시무시한 용사들을 보고 쫄아버린 응애 세마 라구.
“위험합니다! 그리고 마물 토벌이나 모험에서 사제는 어디까지나 보조의 역할일 뿐입니다! 성녀로서의 능력 검증과는 전혀...!” “자. 자. 이건 요즘 부각된 히어로 이터들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네. 그 마물이 위험하단 걸 알았으니, 앞으로 그 마물들에 대한 대응도 성녀의 역할 중 하나가 될 거야.” “그건...!”
계속해서 바울이 항의하고 있지만, 아스투스는 들을 맘이 없다는 것처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그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바울의 항의를 듣던 아스투스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말하며 끝났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자! 어찌 됐건 이건 이미 결정된 사항일세! 7일 뒤, 각 후보들은 배정된 던전에서 모험가들과 함께 마물 토벌 능력을 검증한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게.”
아스투스는 이런 저런 설명이 적힌 종이를 책상 위에 놔둔 후, 우릴 쳐다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갔다.
“...하아. 어쩌다 이렇게...” “어쩐지 클라리스 라던 수녀를 밀어주는 것처럼 생각되면 이상한 겁니까?”
내가 묻자, 바울은 한번 더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스투스 대주교는 클라리스 수녀를 지지하는 분이죠.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 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을 그냥 진행 한다구요? 교황님은 뭐라고 안 하십니까?” “시험 자체는 대주교님들이 결정하는 거라... 교황님과 엇비슷한 권력이 있는 성녀를 선출하는데 교황님이 관여하게 되면 혹시 모를 부정이 생길 수도 있으니, 교황님께서는 성녀가 선출된 후 승인만 하시게 됩니다.”
잠시 생각하던 바울은 혀를 차며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주교복을 여미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클레아를 지지해주시는 다른 대주교님들을 만나봐야겠습니다. 그 동안 클레아를 부탁 드립니다.”
바울이 방을 나간 후, 나는 뭔가 묘한 찝찝함이 느껴지는 것에 고민하면서 클레아와 리즈벳이 있는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