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2 - 176화 - 짐승을 얕보는 암컷, 세실리아! (2)
“......말도 안돼...”
훈련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 같은 알람 소리를 들으며, 허탈한 감정에 휩싸여 몸을 떤다.
말도 안 된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하아, 하아... 생각보단 잘 따라왔네. 그치만...”
숨을 고르던 세실리아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비웃는 것처럼 날 내려다본다.
2시간 가량의 대련이 이어지던 세실리아와의 훈련. 분명,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 받아들인 훈련인데...
“이건 내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지? 단 한번도 날 못 건드렸으니까.”
나는 단 한번도, 세실리아의 몸에 말박이를 때려 넣을 수 없었다.
승패가 갈린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론 내 패배나 마찬가지.
내 몸에는 세실리아가 남긴 자잘한 공격의 흔적이 잔뜩 생겨버렸지만, 세실리아는 땀을 좀 흘리는 것 외엔 상처하나 없으니까.
처음엔 반쯤 흥분해서 달려들었으나, 중간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싶어 나름 진지하게 대련했는데도 이 꼴이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건 말이 안돼!
“킥킥♡ 좆밥♡ 패배자♡ 허접 몬스터♡ 실력이 형편없네♡” “...아직 진 건 아니거든요?” “진 거나 마찬가지지. 봐 주면서 했는데 한번도 날 못 맞췄잖아?”
욱해서 반박했지만, 사실 세실리아 말대로다.
셀레스티아 때는 그녀가 먼저 지쳐서 내 판정승이 됐었지만, 이번엔 경우가 조금 다르다.
2시간의 제한 시간의 대련, 그 이후 차이 나는 서로의 몸 상태, 누구 하나가 먼저 지쳐서 쓰러진 것도 아니다.
심판이라도 있었다면, 누가 심판을 맡았더라도 승자 세실리아를 외치게 될 터.
...시발. 암만 스킬을 안 쓴다 해도 어떻게 2시간을 버티냐? 용사도 그러진 못할 텐데.
“후우... 뭐, 짜증나게 떽떽거리던 전 선생들보단 낫네. 허접하긴 하지만 꽤 튼튼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즐거웠어♡”
검을 다시 있던 자리에 되돌려놓고,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문으로 향하는 세실리아.
문 앞에선 세실리아가, 짜증나게 웃으면서 날 향해 키득거렸다.
“그럼, 패배자인 허접 몬스터는 훈련장 청소하고 갈 것. 다음 훈련은 이틀 후였던가? 늦지 말고 또 쳐 맞으러 와~♡”
큭, 저 싸가지가... 말을 해도 진짜...
...하지만, 이번엔 저 말에 달려들 기분이 들질 않는다.
고작 28레벨인 19살짜리 꼬맹이한테, 단 한대도 때려보질 못하고 농락당했으니까.
분명 오늘 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실리아의 얼굴과 몸매를 품평하다가 너무 싸가지 없다 싶으면 한대 쥐어박아줄 생각이었는데...
쥐어박긴 개뿔, 저 싸가지의 샌드백이나 되어주다니.
...시발... 개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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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멀쩡한 모습으로 훈련장을 나온 세실리아는, 훈련장의 복도를 빠져 나오자 마자 다리를 떨며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했다. 우습게 생각했던 저 몬스터가, 이리 힘겨울 줄은.
만약 훈련 시간을 조금만 더 길게 잡았거나 스킬을 사용해도 되는 조건이었다면, 한계에 도달한 자신의 몸이 먼저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좀 치네. 저 몬스터...”
잔뜩 원하는 대로 하란 식으로 도발하긴 했지만, 사실 오늘 훈련은 모두 세실리아의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었다.
세실리아의 특기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움직이며 가볍게 휘두르는 속검.
자신의 훈련을 담당하는 선생들에게 검을 가져오게 시키면, 귀족인 세실리아와의 대련인 만큼 누구나 마지못해하며 큰 검보다는 작은 검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잘 맞는 가벼운 검을 받아, 그 검으로 상대를 놀리며 괴로워하는 꼴을 보는 게 너무나 즐거웠는데. 저 몬스터를 상대하는 동안엔 그런 여유를 즐길 수가 없었다.
재능이 있는 만큼, 다양한 상황에 맞춰 자유롭게 검을 날릴 수 있는 세실리아. 그런 만큼 자신보다 상위 레벨의 모험가라도 어느 정도 맞상대할 자신은 있었는데.
하지만 저 몬스터가 날리는 묵직한 일격을 맞으면, 그 순간 바로 패배할 거라는 확신이 들어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 훌륭한 근육을 목격했을 때부터 그럴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저 몬스터가 저 정도의 근력을 가졌을 줄이야.
한번만 맞으면 끝. 그것이, 세실리아에게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상쾌함과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후훗. 좋은 장난감이 생겼어...”
여태까지의 선생들은, 자세가 어떻니 무슨 스킬을 익혀야 하니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짜증나는 인간들 뿐이었다.
특히 저 몬스터 바로 전의 선생은 외모도 맘에 안 들고 짜증나는 꼰대여서, 그냥 냅다 알을 까버렸었는데.
하지만 저 몬스터는 조금 다르다.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그냥 즐겁게 대련을 하는 훈련에, 한방만 맞으면 끝난다는 스릴이 있다.
거기다 훈련이 끝난 후 잠시 눈길을 빼앗겼던, 자신이 자잘하게 베어 상처를 남긴 근사한 근육질의 몸.
그 거친 몸을 보게 되자, 세실리아는 묘하게 흥분되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더더욱 저 몬스터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싶다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킥킥, 다음에 오면, 어떤 식으로...” “세실리아?”
지친 몸을 벽에 기대며 몬스터의 몸을 떠올리던 세실리아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온다.
목소리를 들은 것 만으로도, 기분이 즐거워지는 자신의 약혼자.
용사이자 라디아의 병사인 레오가, 건너편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 훈련하고 나왔구나. 어땠어? 신수와의 훈련은?” “...킥. 별거 아냐. 잔뜩 괴롭혀주다 왔어.” “또 그런... 이번 신수도 다른 선생님들처럼 그만두게 만들면, 영주님이 화내실걸?” “아~ 또 잔소리. 그래도 이번 신수는 튼튼한 것 같으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 “...신수가 있는 도시가 되었다고 영주님이 이것저것 생각하시던 것 같던데. 살살해줘...”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세실리아에게 다가가는 레오.
가볍게 세실리아의 어깨를 만진 순간, 레오는 놀라운 표정으로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신수가 굉장하긴 하네. 세실리아를 이렇게나 지치게 만들다니...”
병사들을 괴롭히는 세실리아의 힘을 조금이라도 빼놓기 위해 시작된 개인 훈련.
그 동안 그 어느 선생도, 까탈스럽고 힘이 넘치는 세실리아를 감당하지 못했었다.
맘에 드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과 행동으로도 사람을 괴롭혀대기에, 훈련이 끝나면 오히려 선생들이 지친 상태로 나왔던 세실리아.
그러고 나서 아직 힘이 남은 세실리아와 좀 더 어울려 주는 것이, 세실리아의 훈련이 있는 날 해야 할 레오의 일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손에 느껴지는 세실리아의 체온과 땀에 젖은 몸이,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 안 지쳤거든? 고작 그런 몬스터와의 대련 정도로...” “그렇게 말해도, 이렇게 지친 세실리아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흥미거리에 빠지면 거기에 푹 빠져 지칠 줄 모르고 매달리는 세실리아.
그런 세실리아의 최근 흥미거리가 바로 검을 휘두르며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빠져든 것인지, 최근에는 용사인 자신과도 비등비등할 정도의 급격한 성장을 이룬 세실리아인데... 그런 세실리아를 상대하면서 이렇게 체력을 빼다니?
용사이자 약혼자인 자신이 세실리아를 상대해주지 못하는 것은, 다른 건 몰라도 먼저 지쳐 나가떨어지기 때문이었는데...
레오는 세실리아의 힘을 이렇게나 뺀 신수에게, 다시 한번 속으로 감탄해 버렸다.
“아무래도 오늘 추가 대련은 필요 없겠네. 그렇지?” “...하아. 뭐... 그렇네.”
뾰루퉁하게 입을 내밀지만, 세실리아가 이렇게 얌전히 인정하는 모습은 흔하지 않다.
아마, 정말 체력이 남아있질 않은 것일 터.
오늘은 빨리 자러 가는 세실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겠다며, 레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오늘도 저녁은 같이 먹을 거야! 씻고 나올 테니까, 나갈 준비해!” “하하. 알았어 알았어. 얼른 씻고 나와. 성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알았어 레오 오빠!”
병사와 영주의 영애이지만, 둘만 있을 때 세실리아가 자신에게 붙이는 오빠라는 호칭.
그 호칭을 붙이며 손을 흔드는 자신의 약혼자의 모습이, 마치 귀여운 사고뭉치 여동생처럼 느껴져서 자연스럽게 레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과연 신수야. 그만두지 말고 앞으로 쭉 세실리아 상대를 해 줬으면 좋겠는걸.’
세실리아를 저리 만족시킨 신수의 실력에, 제법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 엄청난 근육을 보고 보통이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이제 겨우 20레벨이 조금 넘었다 들었기에 세실리아나 자신과는 꽤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다시 한번 과연 신수라고 감탄하면서, 그 신수가 앞으로 쭉 세실리아의 훈련 담당이 되어줬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며 세실리아를 기다리러 나가는 레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