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4 - 페이엔의 비밀 1
“흑흑... 엄마아... 아빠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은,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장소나 주변 풍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매일같이 구슬프게 울었다는 것만은 기억이 나는 어린 시절.
울면서 부르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은 이제 기억도 나질 않는데. 그런데도 저 시절의 슬픔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새겨져,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질 않는다.
마을 어딘가에서. 혼자 남은 집 안에서. 작은 몸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꼬마 엘프.
왜 우는 거야. 뭐가 그리 슬픈 거야. 부모님은 어디에 가셨어?
그렇게 묻는 나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난다.
“어머. 저기 좀 보세요. 저 아이...” “아... 저 아이가 페이룬과 마리엔의 아이군요...” “쯔쯔쯧... 저 어린 것을 두고 세계수로 돌아가다니. 참 딱하게 됐어요...”
세계수 인근의 마을. 그 곳의 공동묘지에서 치러진 부모님의 장례식.
내가 부모님의 묘에 매달리며 하염없이 우는 동안,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장례식에 모인 많은 엘프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것이 부모를 잃은 어린 엘프에 대한 온전한 동정심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매일같이 우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때 어른 엘프들의 목소리는, 동정심보다는 다른 감정이 더 깊게 베여있었다.
“...역시, 저 아이는 저주받은 거 아니에요?” “페이룬과 마리엔이 이렇게 어이없이 죽은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죠?” “여왕님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엘프가 저런 불길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니...” “세계수의 축복이 있는데도 저런 불길한 색을... 아무래도 저 아이는 여왕님이 틀리셨다고 봐야...” “괜히 마을에 데리고 있다가, 우리도 저주받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내쫓거나 했다간, 저 아이를 허락한 여왕님께서 뭐라 하실지...”
몬스터를 사냥하러 나갔다가, 마물인지 몬스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만나 돌아가셨다고 하던가?
그런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내가 살던 마을의 엘프들은 나를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에세르에 영향을 받아 밝은 빛의 머리 색을 지니고 태어나는 엘프들인데.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고 태어난 나를 보고 불길하다며 수군거리던 엘프들.
날 낳자 마자 내 부모님이 세계수의 관리자인 여왕님을 찾아가 내가 저주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받고 왔는데.
하지만 저들은 그런 증명되지 않은 미신에 빠져, 엘프 여왕님의 증명이 있음에도 나를 찝찝하게 여겼었다.
그나마 부모님이 살아계시던 때엔, 앞에서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었지만...
하지만 이 날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기점으로, 나는 이 엘프들에게 가까이 해선 안될 저주받은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비과학적인 미신 따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 뿐인데.
부모님을 잃은 슬픔과 어린 나이 때문에, 이때의 나는 어른들의 수군거림을 반박하고 못하고 그냥 울기만 할 뿐이었다.
“야! 검은 머리! 너희 부모님은 너 때문에 죽었다며?” “불길하니까 여기 있지 말고 딴 데로 꺼져!” “얼마 전에 헤르실 할아버지가 죽은 것도 너 때문이지!?” “가까이 오지 마! 우리한테도 저주 옮잖아!”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어른들의 수군거림을 그냥 넘어간 것 때문이었을까?
그 후로 마을 안에서는, 저주받은 아이에 대한 배척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나와 비슷한 나이였던 어린 엘프들의 따돌림.
출산율은 낮으면서 인간과 비슷한 속도로 성인이 된 이후 2~300년 동안 장수하는 엘프들이기에, 몇 안 되는 어린 엘프들은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되기 마련인데.
하지만 나는 내 또래의 어린 엘프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고, 그들이 다니는 곳을 피해 다녀야만 했었다.
그렇게 나를 거부하는 어린 엘프들이, 말 뿐만 아니라 돌을 던지며 행동에 나서기 시작할 무렵.
그때쯤엔 수군거리기만 하던 어른들조차, 내가 보이면 인상을 쓰며 조금씩 행동으로 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었다.
만약 그들이 날 인정한 엘프 여왕을 존중하지 않았더라면, 상하기 직전의 식량조차 지원받지 못하고 굶어 죽었었겠지...
그렇게 하루 하루 동족들의 배척을 받으며, 내가 저주받았구나 하고 체념하고 있던 도중.
언제였더라.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을 때쯤, 마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서 부딪쳐 버렸었다.
저주받은 아이가 부딪쳤다며, 역겹다는 표정으로 화를 내던 그 남자 엘프.
그 날 따라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미 혐오는 익숙한데도, 그 엘프의 분노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았고...
기어코 내 머리를 붙잡고선,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나를 때리기 시작했었다.
아. 이제 끝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얻어맞으면서, 더 이상 괴롭지 않아도 된다고 내 안에서 무언가 안도감이 솟아오르던 도중.
“그만둬! 어린애한테 지금 무슨 짓이야!?”
그때 당시 마을에 머물던, 수왕국을 찾아온 인간 용사의 일행이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그 엘프의 앞을 막아 섰었다.
당시엔 아직 머리가 검던, 웃는 표정이 참으로 얄미운 그 인간.
수왕국에서 사고를 치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그 인간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주받은 아이였던 날 지키기 위해 엘프들을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었다.
“외부인은 빠져! 그 년은 저주받은 년이니까! 그 검은 머리가 안보여!?” “뭣...!? 머리 색이 검다고 저주받았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이 마을엔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진 놈이 없는 거냐!? 엘프면서!?”
마을 사람들과 대치하면서, 세계수가 어떠네 에세르가 어떠네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훈계하듯이 소리지르던 인간.
나를 완전히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20살이 가까워져 가는 내 나이를 듣고서 잠깐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은 날 계속 지키려는 듯이 마을사람들과 대치했었다.
‘저주받은 날 지켜주려는 인간이 있구나’ 하며, 그 남자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인간 남자의 동료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마을 사람들은 재수없다는 듯이 혀를 차고 흩어졌었고...
그리고 날 지켜준 남자는, 몸 곳곳에 멍이 든 채 쓰러져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꼬마야... 아니, 엘프 아가씨. 나와 함께 마법도시로 가지 않을래?”
늘 얄밉기만 한 표정을 지으며, 성가신 일을 떠맡기는 주제에.
그런 얄미운 미소만 짓는 이 남자가, 이때만큼은 너무나도 인자해 보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어서...
모든 것을 체념하다시피 하고 있던 내가, 그 남자의 손을 붙잡고 싶게 만들었었다.
“...괜찮나요? 저, 저주받은 엘프인데...” “넌 저주받지 않았어. 내가 보장할게. 이래뵈도 난 마법을 연구하는 사람이거든. 내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저주에 대해선 잘 알지. 엘프들에게 그런 저주 따위는 없어.”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나를 저주받지 않았다고 말해준 남자.
이 남자와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오늘 죽었거나 마을에서 쫓겨나 어딘가에서 시체가 되었었겠지.
“인간들의 왕국 안에 있기는 하지만, 마법도시는 종족에 구분이 없는 마법사들의 도시거든. 거기 가면, 다양한 걸 배우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거짓말쟁이. 즐겁기 보다는, 성가신 일이 많아서 피곤한 날이 더 많았는걸.
10년 정도는 배우는 즐거움에 빠져 제법 즐거웠었지만, 그 동안에도 다른 학생들의 시선엔 익숙해지지가 않았어.
그래서 학위만 얻으면 어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지내려고 했었는데. 네가 조수니 교수니 하며 계속 뭘 맡겨서 그럴 수가 없었잖아.
심지어 어딘가의 대형 길드나 회사가 맡기는 연구 의뢰는 정말이지... 너, 내가 사람들 만나기 싫어한다는 것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자기나 신경 쓸 것이지 오지랖만 넓어서는... 네가 술집에서 여자들 건들다가 쇠고랑 찼다고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알아?
마법사라 체력도 없고 나이도 젊지 않으면서. 늙어가는 아저씨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었대?
그렇게 여자를 밝히면서도, 난 무슨 딸내미처럼 취급하다니. 도대체 무슨 배려야 그건.
...그렇지만, 이 때 내게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 사루앙.
만약 이때로 다시 되돌아가더라도, 나는 네가 내밀어준 손을 고마워하며 붙잡을 거야.
“엘프들이 싫으면, 그냥 인간은 어떠냐? 젊은 아이 하나 붙여주리? 마침 미하일이라는 똑똑한 아이가 들어왔는데...”
근데 이건 좀 오지랖이었어. 도대체 내 결혼을 왜 신경 쓰는 거야?
나는 그냥 혼자가 편했다구. 심지어 이 때는 교수 생활도 짜증나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을 때였는데...
인간들은 하나같이 날 신기하게 쳐다보고, 가끔 유학 오는 엘프들은 내가 꼴 보기 싫었거든? 그런 나한테 무슨 결혼이야?
심지어 그런 나한테 붙인 게, 이제 10살이 넘은 어린애라니. 어이가 없어서...
날 도대체 어떻게 봤길래 그런 어린애를 떠맡긴 거야? 혹시 내 외모 때문에 어울릴 거라 생각했었어? 하여간 나이 먹더니 노망만 들었다니까.
“아, 안녕하세요! 미하일이라고 합니다 교수님!”
...뭐, 자기랑 비슷한 나이처럼 보이는 내 모습을 보고도,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미하일은 나쁘진 않았지만.
강의하면서 가르치는 학생들이 아니라, 직접 하나하나 알려주는 수제자는 처음이라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지.
거기다 옆에 두고 가르치다 보니, 어느새 자기가 배워와서 집안일이나 식사 준비도 대신 해주는 게 상당히 편하고 귀여웠었어.
물론 그것도, 미하일이 어릴 때까지의 일이었지만...
“정신차려 페이엔! 논문 하나 냈다고 너무 늘어져 있으면 안돼! 네 뛰어난 머리가 아깝다구! 사람들도 만나면서, 더 다양한 연구를 해봐야지!”
언제부터였더라? 미하일이 나한테 반말하기 시작한 게...
방에 처박혀서 1년정도 나오지 않았을 때였나? 얌전히 내 수발을 들어주다가,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놔두지 못하겠다는 듯이 날 귀찮게 볶기 시작했지...
내 제자 주제에 건방지게... 뭐, 그래도 날 계속 챙겨주는 건 어릴 때랑 똑같지만.
근데 미하일이 그렇게 건방지게 변한 것보다, 나랑 미하일을 보며 킬킬대던 사루앙의 얄미운 표정이 더 짜증났어!
하여간... 뭘 생각대로란 듯이 웃는 거야. 그 영감은...
나랑 미하일을 보며 ‘이제 곧...’ 하며 중얼거리던데. 곧은 뭐가 곧이야 이 미친 할배야.
꼬맹이 시절부터 봐왔던 제자한테, 50이 넘은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질 것 같아?
...뭐, 성인이 되니 어린 티가 사라져서 제법 괜찮아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었으면 아들뻘의 나이차인데. 어떻게 그런 감정을 가지겠어?
“페이엔. 나, 용사가 되었대. 이제 연구는 물론이고, 너를 지킬... 아, 아니. 뒤에 말은 잊어줘...”
...하지만, 2년 전쯤에 용사가 되었다는 걸 고백하던 때엔... 조금 놀라긴 했지.
동년배에선 가장 뛰어나다 싶은 미하일 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용사가 되어버려선...
무언가를 강하게 지키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야 용사가 된다고 하던데... 분명, 잊어달라고 하던 그 뒤의 말은...
후우. 아니야. 나이차를 생각하면, 그런 말에 두근거리면 안되지. 어릴 때부터 키워온 제자인데 말이야.
인간과 엘프의 수명 차이가 있는 이상, 미하일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는 건 스승으로서도 여자로서도 최악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구.
이 도시의 대부분인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학 오는 엘프들과도 어울릴 수가 없는걸.
아마 너희 둘이 죽거나 어디론가 떠나면, 나는 오랫동안 살아온 이 도시에서도 아마...
“허허허. 페이엔. 거 참 쓸데없는 고민이나 하는구나. 뻔뻔하게 일도 안하고 뒹굴 대면서 말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학장님... 페이엔. 마법도시가 바로 네 집이야. 학장님이나 내가 없어도 그건 변하지 않아. 정 걱정되면 지금부터라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건 싫은걸. 누구랑 어울린다니,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피곤해.
인간이건 엘프건 마족이건, 그냥 누구랑 어울리는 게 피곤한 거라구.
나이가 드니 어린 시절의 일도 좀 짜증만 날 뿐, 엘프들 개개인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꼴 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고...
동족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데. 수명 차이나 외모가 다른 인간과 마족은 오죽하겠어?
물론 나도 마법도시를 내 집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너희가 사라지면, 최소한의 일도 안하고 밥만 축내게 될 나는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겠지.
아마 두 사람 모두, 그런 날 걱정해 주는 거겠지만... 그래도 나 같은 엘프를 딸처럼 여기거나, 여자로 봐줄 필요까진 없다고.
하여간 오지랖들이야. 가족이 생기면 계속 마법도시에 지낼 것 같아서? 나 참...
...그래도 고마워 사루앙. 이런 날 딸처럼 여기고 걱정해줘서.
못난 스승을 좋아해줘서 고마워 미하일. 네 마음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나도 널 특별하게 여기고 있어.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수십 년 동안 마법도시에 있을 수도 없었겠지.
제자와 가족이 되거나, 억지로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있을 곳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있는 동안은 여기가 내 집이니까...
그러니까, 이곳이 내 집인 동안... 두 사람이, 나를 아껴주는 동안...
나는, 즐겁게... 그 신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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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핫!?”
무엇인가 불쾌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나 버렸다.
분명, 옛 기억을 떠올리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추억을 회상하듯이 즐거운 광경들을 만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추억의 끝에서 무엇인가, 찝찝하기 그지 없는 묘한 광경을 봐버린 것 같은 기분...
갑자기 왜 세마... 그 신수가 꿈에서 나타난 거지?
그 신수랑은, 만난 지 불과 2~3일 정도 됐을 뿐인데...
“하아, 하아... 하...”
무엇인가 불쾌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 이상한 찝찝함.
왠지 모르게 내 몸에, 질척질척한 무엇인가가 들러붙은 것만 같다.
...이건 아마도, 오늘 잠들기 전에 경험했던... 신수의, 그...
“...쯧. 무슨 놈의 정액이 그런...”
그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냄새가 풍기던, 대량의 정액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정액이라니... 거기다, 연구실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던 그 엄청난 양...
그런 정액을 사정하다니. 도대체 그 신수의 몸은 어떻게 되어있는 걸까?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그 엄청난 정액에 대한 놀라움과, 왠지 모르게 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느낌 때문에 신수의 앞에서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었다.
뭔가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듯한 그 느낌 때문인지, 딱히 데려올 이유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신수를 방까지 데려오기 까지 했었고...
도대체 뭐였을까 그 정액은? 그게 정액이 맞기는 한 건가?
제법 시간도 지났고 몸도 깨끗하게 씻었는데. 그런데 왠지 모르게 아직 그 정액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아... 괜히 생식세포부터 연구해본다 했나...”
무엇인가의 변종 몬스터로 보여서, 숫자가 늘어나면 다양한 연구를 해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쪽에 관심을 가졌던 건데.
그런데 설마, 그런 경험을 해보게 될 줄이야.
몬스터들의 성기는 다양하게 봤었지만... 대부분 불알에서 직접 생식세포를 채취했을 뿐, 정액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귀찮은 것부터 먼저 끝내자는 생각이, 무엇인가 일을 더 성가시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그래도, 확실히 연구를 해볼만한 신기한 소재이기는 하지...”
차마 전부 보관할 수 없어서, 물 한 컵 정도의 분량만 보관해둔 그 신수의 정액.
그렇게 꿈틀거릴 정도의 생명력이라면, 아마 그 정액에서 재미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신수의 혈액에서 검출된 테세르... 그게 만약 그 정액에까지 검출된다면?
에센티아의 생명체들은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정자 같은 작은 세포가 지닐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였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건 어쩌면, 에센티아의 생명체 들에게 새로운 에너지원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미하일의 연구에도, 참고할 수 있을 거고... 사루앙도 새로운 발견이라며 좋아하겠지...?”
나도 그렇지만, 미하일과 사루앙은 새로운 발견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흥미를 가지는 학자.
특히 사루앙 쪽은, 말년에 이런 발견을 보게 되다니 하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인간 성격이라면 분명히 그럴지도...
“...좋아. 오랜만에 의욕이 생기는걸...!”
일하기를 귀찮아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연구하는 걸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연구를 하게 되면서 얽히게 되는 인간 관계나 귀찮은 일들이 싫은 것일 뿐.
그런 것만 아니라면야, 내게 있어서 무언가를 연구하는 건 몇 안 되는 나의 즐거움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어떻게 의욕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니까... 미하일. 사루앙. 조금만 기다려.
억지로 떠맡은 일이지만, 내가 아주 놀라운 발견을 해줄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