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5 - 페이엔의 비밀 3
리즈벳이란 여자가 나탈리아의 마법을 비웃으며, 자신의 새로운 마법을 공개한 순간.
그 순간 나는, 현기증에 가까운 어지러움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저 미친 여자가...! 저런걸 막 공개해도 되는 거야?’
그녀가 손을 뻗은 순간 하늘에 나타난, 불길하게 느껴지는 검은 태양.
저 태양이 어째서 저런 불길한 색을 지녔는지 잘 알기에, 당연히 저것의 원리가 알려졌을 때의 파장을 걱정할 수 밖에 없다.
혹시나 싶어 앞에 놓은 술식 도면을 살펴봤지만, 역시나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면 발동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이 이상한 술식.
저 여자는 지금, 본인이 마왕이라고 부르며 아양부리는 그 짐승의 에너지...
세마의 테세르를, 자신의 마법에 응용한 것이다.
‘미친 년... 설마, 진짜 저런 몬스터랑 섹스 했다는 거야? 아니 그보다, 인간이 정말 테세르를 몸에 지닐 수 있다고?’
어느 정도는, 의심을 하고 있기는 했었다.
세마의 정액에 테세르가 포함되어 있던 것은 사실. 그리고 저 여자를 포함한 마물의 동료들은, 그 마물을 대하는 태도가 평범하지는 않았으니까.
심지어 세마 본인이 인정하기도 한 만큼, 머리로는 저 여자들이 마물과의 교미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인 그녀들이 성기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흉악한 그런 말자지와 교미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해 버렸으니, 이제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하지 할 수 밖에 없다.
세마 저 녀석의 정액이... 인간의 몸을 변질시킨다는 것을.
‘...아무리 저 녀석의 테세르가 다른 마물들의 테세르와는 달리 안정되어 있다지만, 인간은 애초에 테세르를 몸에서 붙잡아 둘 수가 없어... 그저, 테세르가 몸에서 사라질 때까지 영향을 받을 뿐이지... 하지만, 저 여자는...’
소름이 끼친다.
애초에 외형이 몬스터에 가까운 세마의 경우는, 놀라기는 했었지만 인간이 아니었기에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마물이 에센티아에 적응해서, 몬스터에 가까워졌냐는 것. 단지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세마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조차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마물처럼 느껴진다.
‘그 정액에 단순히 쾌락 물질만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만약... 세마의 테세르가, 사람을 변질시키고 영원히 그 육체에 정착된다면...?’
마물과의 교미를 통해,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테세르를 가지게 된 저 여자들.
겉모습이 인간이라고, 그녀들을 인간으로 봐도 괜찮은 걸까?
아니... 만약 내 추측대로라면, 그녀들은 인간이라고 볼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존에 없던 새로운 종족...
마물인지 몬스터인지 구분이 모호한 저 짐승과 교배가 가능한... 짐승에 가까운 무언가일 것이다.
절반은 인간, 절반은 마물에 가까운 새로운 종족이기에 가능한, 에세르와 테세르의 동시 보유.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저들의 육체는, 에세르에도 테세르에도 적응한 완벽한 육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테세르라는 에너지는, 인체에 대한 영향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내면의 욕망과 악의를 자극하는 사악한 에너지.
세마의 테세르는 특히 음란한 욕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에너지에 적응한다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일까?
그리고...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지금 자신의 뱃속에 가득 찬 말정액은... 지금, 내 몸을...
“...윽, 으흑...”
몸이 떨린다.
뱃속에 가득 찬 저 마물의 정액이, 당장 토하고 싶을 만큼 너무나도 두렵고 혐오스럽다.
하지만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은, 그런 감정과 왠지 모를 기쁨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
이미 세마에 대한 혐오감은 3일 전에 비해서, 나조차 이해가 안될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다.
분명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었는데. 그런데 어쩐지 지금은, 밉살스럽긴 해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가 않는다.
고작 3일. 그 3일동안, 저 녀석의 정액을 배가 부풀어오를 정도로 마셨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저 흉악한 마물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몸이 기분 좋게 달아올라서 하루 종일 식지가 않는다.
이대로 계속 세마의 그 진한 정액을 마시게 된다면, 나는 분명...
...어쩌지? 너무 무서운데...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괜찮으냐? 페이엔?” “으, 응? 아... 괘, 괜찮아. 응...” “...몸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구나. 이따가 잠시 이야기 좀 하자꾸나.” “...응...”
어째서 지금 난, 사루앙에게 괜찮다고 말해버린 걸까.
세마에게 협박당했던 것을 떠올리기도 전에, 몸이 자연스럽게 사루앙의 관심을 거부해 버렸다.
지금 내가 겪는 일을 상담해야 한다면, 사루앙 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없는데.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믿음직스러운 아버지를 곁에 두고서, 날 협박하는 세마를 위해 입을 다물어 버린 거지?
내게 소중한 사람인 미하일 때문에...? 으응, 아니야. 방금 난 미하일에 대해 떠올리지도 않았어.
이건 분명... 내 육체가, 세마를... 저 마물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어쩌지? 이대로 있다간 나... 분명, 마음까지도... 저 마물에게... 변질되어버려...
“...페이엔. 가만히 있거라.” “어...? 아, 앗!? 잠깐, 거긴...!”
날 힐끔거리던 사루앙이, 갑작스럽게 내 배를 만진다.
왜 갑자기 배를...? 아니 그보다, 아직 배가 살짝 부풀어 있는데...!
이대로면 사루앙이 의심을... 앗.
“...언제부터 이랬느냐. 어째서 네 몸 속에, 테세르 같은 에너지가 머물고 있는 거냐?”
아... 이미, 눈치 챘구나...
역시 사루앙... 마물들을 토벌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녔던 만큼, 이런 쪽으론 눈치가 빠르구나...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어. 평소엔 장난기만 많아 보이는 남자지만, 사실 사루앙은 대단한 사람이란 걸.
그렇지만... 이대로, 사루앙에게 말해도 괜찮은 걸까...?
“...신수라고 생각했던, 저 몬스터의 짓인가...”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이럴 때 보면, 과연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아깝지가 않네. 역시 내 아버지야.
하지만 지금은... 사루앙에게 의지하기엔, 미하일이...
“...확인해봐야겠군... 아까 말했던 대로, 잠시 후에 이야기 하자꾸나.”
***********************************************************************************************************
“그랬던 건가... 신수라고 생각했던 그 몬스터가, 실제로는 마물이었다고...” “...응... 그리고, 미하일을 가지고 협박을...”
마법대결이 끝나고 나서, 사루앙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상황을 파악해 버렸다.
갑자기 날 부른 세마의 목소리에, 원래라면 나탈리아의 마법을 고평가 했을 내가 리즈벳 그 여자의 마법을 선택해버린 것.
거기서 사루앙은 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란 것을 눈치챘고, 그 원인이 내게 테세르를 주입한 세마 때문이란 것까지 파악했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거기까지 파악해 버리니, 나도 누군가에게 숨기려고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있게 되어서...
그렇게, 사루앙에게 그 동안 겪은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그랬군... 그랬어... 안 그래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래서 미하일이 갑자기 그런 연구를...” “미안... 내가 좀 더 정신을 차렸더라면...” “아니, 페이엔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란다. 오히려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 것이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사루앙이, 복잡한 표정으로 다가와 날 끌어 앉는다.
사루앙에게서 느껴지는 포근한 냄새. 평소라면 할아버지 냄새 난다고 걷어차 버렸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이 냄새가 너무나도 편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구나... 네가 사람들과 가까워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말하는 몬스터를 붙인다면 사람을 만나는 연습이 될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너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만들 줄이야... 미안하구나. 미안해...” “으응... 사루앙 탓이 아닌걸. 따지고 보면, 내가 사루앙의 말을 듣질 않았으니까...” “아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혼자서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을... 내가 어설픈 판단을 한 탓에, 너와 미하일을 큰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 버렸구나...”
평상시의 사루앙 이었다면, 내 실수에 장난치듯 놀리며 비웃었을 텐데.
그런데 정말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날 안아주는 사루앙을 보니, 내가 너무나도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느껴진다.
이렇게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처음부터 사루앙 말을 들어서, 사루앙의 걱정을 덜어줬었더라면...
하다못해 미하일의 마음이라도 받아들였다면, 사루앙의 이런 표정을 보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그런데 내가, 사루앙의 말도 듣지 않고... 미하일의 마음을 받지도 않아서... 그래서, 이런...
“...몸이 어느 정도로 말을 듣지 않느냐.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는 게야?” “...움직이는 건 그럭저럭 괜찮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 녀석을 거부할 수가 없어... 그 녀석을 거역하려 하거나 해가 될만한 일을 하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거부해버려.” “그 마물의 테세르가 영향력이 강하구나. 테세르에 면역이 약한 엘프라지만, 이 정도로 육체와 마음을 지배하려고 하다니...” “어쩌지? 나, 너무 무서워... 이대로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릴 것 같아...” “...나만 믿거라. 마물 따위가 내 딸을 계속 건드리게 놔둘 생각은 없으니. 내가 알게 된 이상, 그 마물은 이 마법도시를 살아서 벗어날 수 없을 게야.”
그렇게 말하며 사루앙은, 내 배에 손을 대며 마법진을 만들었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몸에 편안한 기분이 감돌면서 달아오른 열이 빠져나가는 듯한 이 느낌.
어쩐지 내 몸을 괴롭히던 무엇인가를, 사루앙의 마법이 막아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마물에게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겠느냐.” “...모르겠어. 그 짐승의 정액은... 여자인 내가, 도저히 버틸만한 게 아니라서...” “그런가... 그렇다면... 3일. 3일은 가능하겠느냐?” “3일... 지금처럼, 입으로만 한다면 어떻게든...”
사실, 입으로만 한다고 해도 확신은 없다.
그 뜨겁고 냄새나던 흉악한 말자지는, 외모가 어리건 뭐건 간에 여자를 미치게 만드는 흉기 그 자체.
심지어 그 마약같은 말정액까지 계속 마시게 된다면, 몸은 몰라도 정신이 망가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3일만에 그렇게나 죽이고 싶던 마물을 얄밉다는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3일이 또 지난다면...
“최대한 빨리 준비하마. 하지만 3일은 필요할 테니, 너는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척하며 그 마물이 뭔가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거라. 내 마법이 어느 정도 이성을 유지하도록 도와줄 게야.” “...뭘 하려고? 그 녀석, 상당히 강했었어... 해안 연구시설에서도, 그런 괴물을 상대로 멀쩡하게...” “후후... 잊은 모양이구나. 이래뵈도 나는, 용사 막시밀리앙과 함께 사룡 토벌의 전설을 만들어낸 대마법사란다. 비록 늙기는 했지만, 이 마법도시 안에서는 왕국 최강이라는 용사 오를란도 경 조차 나를 이길 수 없을 게야.” “그렇지만... 만약, 사루앙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이쿠... 내 딸은 이 아비가 못미더운 게냐? 이 아비는 대마법사래도? 어설픈 자들이 끼어 봤자 오히려 방해될 정도로 강하니 걱정 말거라. 허허.”
알고 있다. 내 아버지인 이 마법사가, 정말로 강한 마법사라는 것쯤은.
심지어 이 마법도시는 사루앙이 관리하는 그의 공방이나 마찬가지. 말한 대로 준비를 갖춘다면, 이 마법사는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주 만약... 그 마물이, 사루앙에게 이겨버린다면?
그렇게 되면 나는...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를 잃고... 남아있는 가족마저, 그 마물의 손 안에 그대로...
그렇게 된다면,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엘프 마을에서 데리고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 아비는 널 구해줄 거란다. 걱정하지 말고, 이 아비를 믿어주면 좋겠구나.” “응... 고마워 아빠... 날, 도와줘...” “걱정 말거라.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댄 놈팽이 마물을, 내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테니. 그러고 나면, 네 몸에서 테세르를 정화할 방법을 찾자꾸나. 마법은 무엇이든 가능하니, 방법이 있을게야.”
부드럽게 날 쓰다듬어주는, 믿음직스러운 내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포옹.
하지만 지금 사루앙의 안에서는, 세마의 대한 분노가 이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드디어, 그 마물에게서 벗어날 희망이 보이는데.
그런데도 나는 날 위해 나서준 사루앙에게, 어이없는 부탁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아, 아빠... 그런데, 그 녀석... 되도록이면 목숨은... 아, 아니, 내가 무슨... 으흑...” “...최대한 빨리 준비하마.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주렴. 페이엔.”
그 녀석이 죽었으면 좋겠는데. 죽지 말았으면 하는 이상한 감정의 충돌.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내 아버지는 평소의 장난기가 사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