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5 - 막간 ~ 수왕국의 용사 ~
사악한 짐승들의 왕이, 자신의 새로운 음수를 맞이했을 무렵.
수왕국의 어딘가에서는, 두 명의 인간이 그렇게나 찾아 다녔던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대단하군... 언젠가는 누군가 이 곳을 찾아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 그게 엘프가 아니라 인간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로브를 걸친 엘프 남성이, 자신을 찾아 온 인간들에게 칭찬 아닌 칭찬을 건넨다.
빤히 마주 앉은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그 인간들에게 관심은 없는 듯한 초췌한 눈빛.
쓰고 있는 안경을 고치고는, 회색 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엘프는 지루하다는 듯이 탁자를 두드리며 자신을 찾아온 인간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 곳에 처음 온 손님들께선, 무슨 볼일로 찾아오셨지?” “...당신이, 엘프들의 영웅이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현자라고 불리시던 용사. 라플라스 님이신가요?”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는,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는 인간 여자의 목소리.
자신의 이름을 들은 엘프 남성은, 조금 어이없단 듯이 코웃음을 치며 눈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핫. 다 알고 찾아온 거 아니었나? 나를 그렇게나 찾아 다녔다고 들었는데?”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하네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이셔서...” “엘프의 나이를 외모로 파악하려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지.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네에. 어떻게든 라플라스 님을 찾아야 했기에, 확인 차 여쭤본 것뿐이랍니다.”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여자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얼굴을 내비친다.
묘하게 아름다운 광택을 지닌, 포근하게 느껴지는 검은색의 머리카락.
여신교의 상급 수녀였던 클라리스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선 가슴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인간 왕국에서 여신교의 성녀 후보였던, 클라리스라고 합니다. 이쪽은, 여신교의 주교였던 바울. 자, 바울. 인사하세요.” “아, 아, 아... 안녕, 하십니까...”
자신을 성녀 후보였다고 소개하는 아름다운 여성과, 정신이 나간 듯한 남자의 모습.
그 독특한 조합을 잠시 흥미롭게 바라보던 라플라스 였지만, 이내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이 라플라스는 눈을 돌렸다.
“여신교의 성녀 후보와 주교님이라... 생각보다 대단한 분들이셨군. 그래서, 내겐 무슨 일로?” “라플라스 님께, 의뢰를 맡기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의뢰? 흐음... 무슨 의뢰지?”
무엇이냐고 묻고는 있지만,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클라리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엘프.
그런 엘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클라리스는 조금 긴장된다는 듯이 식은땀을 흘렸다.
라플라스. 200년 전 한 마물에 의해 멸망할뻔한 수왕국을 구한, 엘프들의 영웅.
지금 수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용사를 고르라고 하면, 엘프들이 지목하는 것은 단연코 그였다.
비록 그의 능력이 영웅이라 불리기엔 조금 흉흉한 능력이라곤 하나, 인간들의 왕국에서도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정도로 확실한 능력을 지닌 용사.
하지만 지금 클라리스가 긴장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대단한 위업을 가진 용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간들의 왕국에 있는, 성녀와 사악한 신수 한 마리를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의뢰 내용을 말한 클라리스에게, 라플라스의 싸늘한 시선이 파고든다.
그 싸늘한 시선에, 긴장한 듯이 몸을 움찔거리는 클라리스.
누가 봐도 긴장한 클라리스의 모습을 본 라플라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거절이다. 마물은 그렇다 쳐도 성녀 암살이라니. 꿈자리 사나울 만한 의뢰로군.” “성녀 쪽은 죽일 필요까진 없습니다. 다만, 신수를 처리하려고 하면 분명 성녀가 나서게 될 것이라서...” “결국 여신교와 척져야 한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여신교를 믿는 엘프들은 없지만, 굳이 척지려고 하는 엘프들도 없어. 심지어 인간들의 왕국까지 가야 한다니. 받아들이기엔 너무 성가신 의뢰야.”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클라리스의 의뢰를 거절하는 라플라스.
자신에게 어이없는 의뢰를 가져온 인간 성직자를, 라플라스는 마치 비웃는 것처럼 피식 웃으며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거기다 죽여야 하는 대상이 신수라니... 인간들은 신수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영혼이 한 단계 상승하여, 세상의 진실을 파악한 초월적인 존재들이라고...” “그걸 알면서도 신수를 죽여달라고 하다니. 성녀 후보였다는 분께서 너무 생각 없는 말을 내뱉으시는군.”
다리를 꼬은 채 의자에 팔을 걸치며, 조금 무례해 보이는 자세로 클라리스를 대하는 라플라스.
마치 훈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라플라스는 자신을 찾아온 인간들을 향해 포기하란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에세르가 농도가 낮은 인간 왕국에 신수가 찾아갔다니. 두 번 다시 없을 굉장한 행운이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사이 좋게 지내는 게 좋을 거야.” “...무언가 욕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라플라스 님께서도, 몇 달 전에 있었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셨을 테죠?”
순간, 고개를 내젓던 라플라스의 몸이 움찔거리며 굳었다.
눈 앞의 인간들에게 흥미를 잃었던 라플라스의 눈빛에, 다시 흥미가 돌아온 것처럼 힘이 돌아온다.
관심 없다는 듯이 눈을 돌리고 있다가, 재미난 이야기를 꺼냈단 듯이 다시 클라리스를 바라보는 라플라스.
고개를 까딱이며, 라플라스는 클라리스에게 다시 관심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 “저희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만... 몇 달 전에 있었던 그 불길한 기운. 곰곰이 되새겨보니 아마 테세르의 기운이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그래. 내가 가지고 있던 마도구에서도 그렇게 측정되었지.” “라플라스 님을 찾는 동안 의견을 나눠본 결과, 저희는 그 기운이 아마 그 신수의 기운이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불길하면서도 사악한 기운... 저희가 마주했던 그 신수의 불길함과 흡사한 느낌이었거든요.” “흐음... 신수에게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고?”
클라리스의 말에, 조금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플라스.
확신이 가득한 표정을 내비치며, 클라리스는 라플라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저희는... 아마 그 신수의 정체가, 사실 마물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마... 마물이, 모종의 무언가를 통해 신수처럼 영혼이 상승한 것이 아닐까 싶은...” “...흐음. 마물이, 신수 행세를 하고 있다라...?”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턱에 손을 가져다 댄 채 클라리스의 이야기를 듣는 라플라스.
자신들이 무엇들 보고 겪었는지 설명하는 동안, 클라리스의 옆에 있던 바울의 안색이 창백해 지더니...
클라리스가 신수의 인상에 대해 설명을 마칠 때쯤, 바울은 얼굴을 감싸며 두렵다는 듯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흐, 흐윽...! 마, 마왕... 그건, 마왕이야...! 흐으윽...!” “...죄송합니다. 바울은, 그 날 이후로 정신에 병이 생겨서...” “흐으윽...! 마왕이, 내, 내 클레아를...! 으흑...!”
바울을 위로하듯이 토닥이는 클라리스와, 정신이 나간 것처럼 흐느끼는 바울.
그런 바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라플라스는 가슴 한 켠에 씁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마왕이라니. 성직자라는 인간이 무슨 그런 망상에 사로잡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주교 정도면 나름대로 고위직일 텐데. 그런 자리에 있던 인간이, 저리도 망가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니.
도대체 그 신수가 어떠한 기운을 가졌길래, 여신교의 성직자라는 인간들이 이렇게 확신에 찬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바울과 클라리스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라플라스의 시선에, 클라리스는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겠다는 듯이 각오를 다지며 말을 이어나갔다.
“바울은... 그 마물에게, 자신의 연인이었던 성녀를 빼앗겼습니다. 사랑하던 여인을 잃게 된 아픔... 라플라스 님이시라면, 그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지 않나요?”
클라리스의 말에, 라플라스의 눈에 살기가 나타난다.
무척이나 언짢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클라리스를 노려보는 라플라스.
그런 라플라스의 시선에 식은 땀을 흘리며, 클라리스는 면목 없다는 듯이 라플라스의 눈을 피했다.
“...내게 붙은 또 다른 별명. 알고 있을 텐데...” “...네. 분명, 대역죄인 이라는 별명이...”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꺼내다니. 정말 용감한 수녀로군.”
한동안 클라리스를 노려보며 말없이 생각을 이어나가던 라플라스.
클라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면목없다는 듯이 라플라스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쯧. 내 경우는 거기 바울이란 남자와는 전혀 다른데. 뭘 이해한다는 거야?”
머리를 헝클이면서, 라플라스가 됐다는 듯이 살기를 거둔다.
마물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신수의 존재와, 그런 마물에게 빠져 타락했다는 여신교의 성녀.
분명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년 단위의 시간을 들여 자신을 찾아왔다.
마치 자신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이, 확신도 없으면서 자신을 찾아온 젊은 성직자들.
자신에 비하면 갓난아기나 다름없는 두 인간을 바라보면서, 라플라스는 한숨을 내쉬곤 잠시 테이블을 툭툭 치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의뢰를 받으면, 너희는 내게 무슨 대가를 줄 생각이지?”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는 듯이, 클라리스를 향해 대가에 대해 묻는 라플라스.
클라리스는 그런 라플라스의 말에 안도감을 느낀 것처럼 다행이라는 표정을 내비친 후,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것을 풀어 라플라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가 왕도를 벗어나면서 가져온 여신교의 성물입니다. 분명, 라플라스 님께서는... 영혼을 다룰 수 있는 물건을 찾고 계셨죠? 이 성물이 그런 물건입니다.” “...쯧. 정말, 나에 대해 열심히 알아 본 모양이군...”
하필이면 제시를 해도 이런 대가를 제시하냐는 듯이, 한숨을 내쉬던 라플라스.
잠시 고민을 하던 라플라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클라리스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 신수가 내 생각과 다르면 나는 바로 물러나겠다. 그런 조건이라도 괜찮나?” “네. 아마, 직접 보시게 되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지 아시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악한 존재를 그냥 놔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딱히 믿기진 않지만...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좋아.”
의뢰를 받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손가락을 튕기는 라플라스.
그러자 아무도 없던 라플라스의 뒤에서, 안색이 창백한 구리빛 피부를 지닌 여성 엘프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인간들의 왕국으로 갈 거다. 움직일 채비를 해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는 여성 엘프.
그런 엘프를 안타깝다는 듯이 힐끔 바라보며, 라플라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가 아니라, 오라버니라고 불러라.” “네. 마스터.”
라플라스의 표정에서, 안타까운 듯한 감정이 더욱 커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