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0 - 라피나의 비밀 1
마왕이 무력을 이용한 첫 번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무렵.
라디아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언덕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물체가 라디아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네 발의 짐승 같기도 하고 바퀴 없는 수레 같기도 한, 괴상하게 느껴지는 독특한 형태.
그 위에 올라타있는 인간과 엘프들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탈 것이란 것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괴악한 형상이었다.
“이제 보이네요. 저기가 바로, 그 신수가 머무는 도시인 라디아에요.”
몇 개의 산이 도시 안에 들어갈 정도로 넓은 라디아의 성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언덕의 위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자신의 옆에 있는 엘프에게 설명해 주는 것처럼 앞을 가리켰다.
걸치고 있는 후드에 먼지가 묻어있기는 하지만, 그 후드 사이로 보이는 깨끗한 피부와 찰랑이는 검은 흑발.
한 때 여신교의 성녀 후보였던, 클라리스의 모습이었다.
“수왕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한 달도 걸리질 않다니... 정말 엄청난 속도네요 이 골렘. 수레차용 몬스터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수왕국으로 건너가, 자신들의 의뢰를 받아 줄 강한 엘프를 찾아 다니던 클라리스와 바울.
년 단위의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런 긴 시간을 투자한 덕분에 결국 엘프 용사들 중에서도 손꼽힌다는 능력을 가진 라플라스를 고용할 수 있었다.
그런 라플라스가 조작하고 있는 골렘이라고 부른 탈 것의 등을 툭툭 치며, 옆에 있는 라플라스를 치켜세우듯이 바라보는 클라리스.
하지만 라플라스는, 수왕국을 나선 이후부터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휴. 말을 걸면 뭐라도 대답 좀 해주세요. 안 그래도 적던 말수가 날이 갈수록 더 적어지시네. 고용주한테 너무 차가우신 거 아니에요?”
함께 이동하는 동안 그럭저럭 친해진 것인지, 토라진 듯한 말을 내뱉으며 라플라스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클라리스.
이내 클라리스는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며, 바울의 옆에 있던 갈색 피부를 지닌 엘프에게 말을 건넸다.
“너희 주인님은 너무 무뚝뚝하신 것 같아~ 그치? 라피나?” “......”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짐을 지닌 채, 라플라스와 같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클라리스를 멀뚱히 바라보는 라피나 라고 불린 소녀.
언뜻 보기엔 피부색이 특이한 엘프 소녀 같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녀 역시 라플라스가 만들어낸 골렘이라고 했었다.
이 탈것을 포함해 라플라스가 부리던 다른 골렘들과는 달리, 정말 살아있는 듯한 생기가 느껴지는 라피나의 모습.
주인을 닮은 것인지 아니면 골렘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기와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표정은 라플라스 보다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휴. 웃으면 귀여울 것 같은데. 단 한번도 웃는 표정을 보여주질 않으니... 바울! 그만 정신 차려요! 라디아가 보이고 있으니 슬슬 준비해야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라피나의 표정에 실망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던 클라리스.
그리곤 대신 말을 걸 상대를 찾는 것처럼, 라피나의 옆에서 웅크리고 있던 바울의 몸을 흔들었다.
“...으, 으으... 라, 라디아... 무서워... 으으...” “하아. 정말이지... 이젠 좀 멀쩡해졌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라디아에 들어가면 진정제부터 사야겠네요.”
바울의 상태를 확인하곤 한숨을 재차 내쉰 후, 클라리스는 몸을 돌려 자신에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우리가 왕도를 벗어날 때 굳이 라디아에서 지내는 걸 택했다고 들었으니, 클레아와 그 신수는 아직 라디아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을 거에요. 바울은 몰골이 엉망이고 난 라디아에 간 적이 없으니, 아마 조금만 변장하면 굳이 숨어 다니지 않더라도...” “...하아. 난감하군. 그냥 과장하는 건 줄 알았는데...”
마치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는 것처럼, 팔짱을 낀 채 라플라스의 옆에서 말을 이어나가던 클라리스.
그런데 그녀의 옆에서 골렘을 조종하고 있던 라플라스가, 갑작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클라리스의 말을 끊어버렸다.
“...네? 무슨 말씀인가요? 라플라스 님?” “성녀 후보까지 되었던 수녀라고 했었으면서. 아직 모르겠나? ...하긴. 아직 어린 인간인데다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니... 감각이 예민하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겠군...”
클라리스를 쳐다보지 않은 채 인상을 쓰면서, 흐릿하게 보이는 라디아의 외곽을 바라보는 라플라스.
늘 무표정하던 라플라스의 표정이 진지해진 것을 본 클라리스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곤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몸을 움츠렸다.
“...감각? 이질적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엘프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성직자들도, 여신과 연관되어 있으니 사악함을 감지하는 스킬이 있겠지? 눈을 감고, 저 라디아라는 도시 쪽을 잘 감지해 봐라.” “네? ...음. 알겠어요. 어디...”
말보다는 행동이라는 것처럼, 라플라스는 클라리스를 바라보지 않고 라디아를 가리켰다.
이동하는 동안 익숙해진 설명이 부족한 라플라스의 지시에 따라, 가만히 감각을 곤두세우며 라디아가 있는 위치를 감지하기 시작한 클라리스.
“음... 어디... 수왕국 만큼은 아니지만, 공기중에 퍼진 에세르의 기운...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도시의... 흣!? 이, 이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감지 스킬을 사용하던 클라리스는, 무엇인가 꺼림칙한 것을 느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라플라스를 바라보았다.
“뭐, 뭐죠 이 기운은!? 어떻게, 라디아에서 이런 기운이!?”
안색까지 바뀔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대체 이게 무엇이냐는 듯이 라플라스는 바라보는 클라리스.
라플라스는 그런 클라리스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흔들고는, 기분 나쁘단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골렘을 멈춰 세웠다.
“테세르다. 우리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말이야...” “테세르라뇨!? 그건, 마물들이나 가지는 사악한 에너지가 아닌가요!? 던전이 아닌 이상 저렇게 뭉쳐있을 수가 없을 텐데!?” “조금 다르다고 말하지 않았나. 분명 테세르이긴 하지만,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테세르와는 성질이 달라.”
라플라스가 멈춰진 골렘의 조종간을 놓고선, 흐릿하게 보이는 라디아를 노려보며 입술을 매만졌다.
마치 이해되지 않는 라디아의 기운을 분석하는 것 마냥, 진지한 표정으로 라디아를 노려보는 라플라스.
이동하면서 보던 그의 모습과는 달리 무엇인가 여유 없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며, 라플라스는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한 감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에세르와 반발해서 자연 소멸해야 하는 테세르가 저렇게 뭉쳐져 있다니... 이건 뭐라고 할까... 마치, 테세르가 에세르를 흉내 내고 있다는 느낌이군... 아니, 정확히는 에세르의 성질을 흉내 내고 있다고 해야 하나?” “세, 세상에... 아무리 그렇다지만, 성직자인 제가 저런걸 못 느끼고 있었다니...” “저렇게 자연의 일부마냥 조화롭게 유지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조차 까딱하면 놓칠 뻔 했어... 심지어 주변에 퍼지지도 않고 저렇게 뭉쳐 있는 걸 보면, 평범한 인간은 도시 안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저 기운을 감지할 수 없을 것 같군.”
입술을 매만지던 손을 내리고선, 조종간을 툭툭 건드리며 라디아를 계속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라플라스.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 클라리스를 바라보지도 않고서, 라플라스는 계속 그녀에게 설명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뭐라고 할까... 누군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테세르의 성질을, 교묘하게 조작한 듯한 느낌인데... 그런데도 저런 꺼림칙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니. 도대체 저 안에 들어간 순간 어떤 영향을 받게 될 지 상상이 되질 않는군...” “...하지만... 분명히, 수많은 인간들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가 아는 테세르마냥 신체를 붕괴시키진 않을 것 같지만... 글쎄. 저 테세르도 기존의 테세르처럼,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지 않을까?”
한 때 현자라고 불렸던 데다 수 백 년의 시간을 보내온 만큼, 멀리서 라디아를 본 것 만으로도 제법 정확한 추리를 해낸 영리한 엘프.
시간만 충분하다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며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라플라스 였지만, 지금 라디아를 확인한 라플라스는 자신의 고용주인 클라리스를 향해 찝찝한 표정을 내비칠 수 밖에 없었다.
“분노. 탐욕. 질투. 나태. 색욕 등... 어느 게 더 크게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저건 생명에 지장이 없어 보이는 만큼 더 질이 나쁘다 해야겠군. 기존의 테세르였다면 욕망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전에 죽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럴 수가... 그럼, 지금 도시 안에 있는 인간들은...” “...쯧. 아마, 부모자식끼리도 못 알아보는 난폭한 인간들이 되어있겠지. 아니면 정신을 놓고, 짐승마냥 본능에 따라 살고 있거나 말이야.”
불쾌하단 듯이 한숨을 내뱉고는, 자신의 잿빛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인상을 찌푸리던 라플라스.
재차 한숨을 내뱉은 라플라스는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바울을 바라보았다.
“마왕이니 뭐니 하길래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인정할 수 밖에 없군. 도시가 저런 꼴이 될 정도라면 마왕이 나타났다고 느낄 만도 해. 이미 저긴 도시가 아니라, 도시의 형태를 한 마굴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웅크리고 있는 바울이 마왕이란 단어가 들릴 때마다, 흠칫 거리며 몸을 떨어댄다.
그런 바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힐끗 바울의 옆에 있는 라피나를 바라보는 라플라스.
라피나를 보며 무언가를 가늠해보는 듯한 라플라스에게, 클라리스가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역시 그 신수... 일까요?” “...아마 그 쪽이 가능성이 높겠지. 인간의 짓이라고 보기엔 저 테세르의 에너지 농도가 너무 짙어. 고레벨 용사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던전이라 할지라도, 저 정도로 짙은 테세르를 뿜어내진 않아.” “그렇단 말은... 그 신수를 따르던 클레아는...” “아마 그 신수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흠... 말하고 나니, 어쩌면 그 신수의 정체가 이 세상에 적응한 마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군... 예전에 한 번, 에세르가 짙은 수왕국인데도 자연 소멸하지 않는 마물과 싸워본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런 마물의 진화판 일수도 있겠는걸...”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클라리스와 나누던 대화가 점점 혼잣말로 바뀌어가는 라플라스의 말.
한동안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리던 라플라스는, 생각을 정한 듯 혼잣말을 멈추고선 자신의 옆에 있는 클라리스를 바라보았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던 계획은 중지다. 나는 몰라도 너희 둘에게 저런 테세르는 너무 위험해. 성직자이니 잠시 버틸 수는 있겠지만, 얼마 못 가 저 테세르에 영향을 받게 될 거야.” “그럼 어떻게 하죠? 클레아와 그 마물이 도시 밖으로 나올 때까지 대기할 건가요?” “저 넓은 도시의 성문들을 어떻게 감시하나? 심지어 그 마물과 성녀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클라리스의 물음에 어이없단 듯이 피식 웃으며, 뒷자리에 있는 라피나를 바라보는 라플라스.
라플라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선, 굳은 표정으로 라피나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영혼석을 분리해라. 라피나. 일단, 너 혼자 ‘인형’ 상태로 도시를 탐색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마스터.”
라플라스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인 후, 커다란 짐을 뒤편에 내려놓고 몸에 걸친 로브와 상의를 들어올려 자신의 배를 내보이는 라피나.
라피나가 부드러워 보이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자, 풍만한 가슴 아래로 늘씬함을 자랑하던 라피나의 복부가 딸깍 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죽이 벗겨졌다.
“힉!? 무, 무슨...!?”
누가 봐도 사람의 몸이라고 생각되었건만. 마치 기계처럼 열린 라피나의 복부를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라보는 클라리스.
살아있는 엘프가 아닌 골렘이란 이야기는 들었었지만... 라피나의 ‘안쪽’을 본 순간, 클라리스는 라피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데도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무언가 사람의 내장 같으면서도 금속 같기도 한, 기묘하기 그지 없는 라피나의 ‘안쪽’
마치 자궁처럼 보이는 내장까지 재현되어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 안쪽에 손을 집어넣는 라피나에겐 더욱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마스터.”
자신의 심장쯤 되는 위치를 뒤적거리다가, 무언가 푸른색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돌을 꺼내 라플라스에게 건네는 라피나.
주먹만한 그 돌을 건네 받은 라플라스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보석을 움켜쥐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동기화 시간의 간격이 적은 곳까지 이동하도록 하지. 너는 동기화를 할 준비를 하고 있어라. ‘인형’.” “네. 마스터.”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낸 것 같은데. 그런데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는 라피나라고 불리던 인형.
소중하단 듯이 돌을 움켜쥐고선, 라플라스는 인형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시 골렘을 조종하면서, 가던 방향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골렘을 움직이기 시작한 라플라스.
그렇게 짐승들이 모르는 사이, 라디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짐승이 아닌 이들의 캠프가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