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6 - 524화 - 마왕의 복수는, 음습하고 지독한 것!
‘...기억 동기화 완료. 기억 변조 확인... 이상 없음. 시스템 체크... 에러 없음. 각 유닛 상태 정상. 부팅 프로세스 종료...’
이미 수없이 진행해 보았던, 신체를 교환하는 동기화 과정.
그 동기화가 정상적으로 끝난 것을 체크한 라피나는, 부팅 절차를 마치고 이제는 익숙한 인형 생산 박스 안에서 눈을 떴다.
“일어났나? RFN-0103. 구성된 신체의 상태는 어떻지?” “...모두 양호합니다. 마스터.”
박스의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라플라스가 새로운 라피나를 맞이한다.
지금 라플라스의 표정은, 무엇인가 잘 풀리지 않았을 때 내비치는 언짢은 표정.
자신이 수행한 임무가 주인을 만족시키기 못했음을 직감한 라피나는, 면목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라플라스의 앞에 섰다.
“...일단 기억 확인부터 하지. 이쪽으로 전달된 영상에선 네가 파티장에 들어가려는 장면까지 전달받았다. 혹시 그 이후의 기억이 있나?” “...아뇨. 박스에서 동기화 된 기억도 거기까지 입니다.” “칫... 골치 아프군. 적어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확인하고 싶었는데...”
자폭한 순간, 그 사유를 영상이 아닌 텍스트 정보로 긴급 전송한 라피나의 자폭 유닛.
그렇게 라플라스에게 전달된 자폭 사유에는, 신수의 암살 실패로 인한 자폭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비록 탐색을 위해 가볍게 시도한 첫 잠입이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인형의 성능이 성능인 만큼 운이 좋으면 바로 암살까지 이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암살이 성공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정했던 기간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허무하게 인형 하나만 소모되고 말았다.
지금 라플라스 일행이 얻은 정보라곤, 라디아의 지도 일부와 함께 신수가 라디아에 방문한 인간들을 파티에 초대하고 있다는 수상한 정보뿐.
무언가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어떤 파티인지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그런 정보를 전송 받기도 전에, 라피나가 자폭을 선택할만한 상황이 그 파티장 안에서 일어나 버렸다.
자폭이 신수를 죽이거나 큰 피해를 입혔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오히려 라피나의 존재만 알리게 된 난감한 상황.
최악의 경우라면 어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라플라스는 눈 앞에 서 있는 ‘작은’ 인형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리 골렘이라지만 여자아이한테 너무한 것 아니에요? 일단 옷부터 입히고 얘기해요. 바울도 있는데 정말...”
클라리스가 라피나의 곁으로 다가와, 알몸인 그녀에게 천을 두르며 몸을 가려준다.
그제서야 이전 신체와 달라진 체형을 느끼곤,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한 라피나.
제법 풍만한 몸매를 가지고 있던 이전의 신체와는 다르게, 지금의 신체는 슬림한 체형과 살짝 작아 보이는 신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지나간 일은 넘어가지. 이번 잠입은 최대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이전 신체로 파악한 장소들을 살피는 것을 우선시해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 에닌이란 여자처럼 접근하는 인간은 모두 무시해라. 혹시라도 누군가와 대화를 해야 한다면, 중간에 따로 지시를 보냈던 것처럼 최대한 말을 아끼도록.”
라플라스의 명령에, 라피나는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을 아끼라니. 그런 명령은, 전달받은 적이 없는데.
저번 잠입에서 통신으로 전달된 명령은, 첫 날에 수신한 피부색을 뭐라고 둘러대는지에 대한 명령뿐.
그 이후로는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채,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아. 혹시 그 음료가...’
불현듯, 라피나는 에닌이란 여자가 건네주었던 음료를 떠올렸다.
자신의 유닛들을 침식하듯이 교란시키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누런빛의 음료.
테세르와 함께 마약 같은 물질들이 포함되어 있던 그 음료가, 통신 유닛까지 교란시켜 명령 수신을 방해한 게 아닐까?
다행히 영상 전송은 가능했던 모양이지만. 음식물 섭취와는 관련이 없는 통신 유닛쪽까지 영향을 끼친다니.
자신의 유닛 전체를 망가트린 듯한 그 음료의 위력에, 라피나는 놀라움과 함께 그 음료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함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지? 뭔가 이견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마스터.”
본인이 대답해 놓고서, 라피나는 자신이 내뱉은 대답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인형. 무엇인가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면, 당연히 주인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신의 유닛들을 오염시키던 그 음료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정보를 숨겨버렸다.
어째서일까. 자신의 유닛들에 영향을 줄 정도면, 당연히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데도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니, 무엇인가 감정 유닛에서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새어 나왔다.
진짜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어졌기에 가지고 있는, ‘여성’ 으로서의 마음.
감정 유닛에서 만들어진 그 여성으로서의 마음이, 음료 한 잔으로 주인의 ‘상대’가 되었을 때보다 황홀한 기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피부색은 바꾸지 못하나요? 체형은 변했지만 여전히 갈색 피부를 가진 엘프의 모습이니, 이번에도 주목을 받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어. 체형은 꽤 변화를 줄 수 있지만, 피부색과 얼굴만큼은 거의 변경이 불가능해.” “그럼 어떻게 하시게요? 신수와 만난데다 자폭까지 해버렸으니, 아무리 체형이 달라도 이대로는 들키지 않겠어요? 아무리 피해 다닌다 해도 만약이란 게...” “쯧. 어쩔 수 없지. 벌써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여기선 추가 파츠로 커버하는 수 밖에.”
라피나가 주인에게 정보를 숨긴 자신에 대해 놀라는 사이, 다시 잠입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라플라스와 클라리스.
클라리스의 말에 라플라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컨트롤 박스에서 귀걸이처럼 생긴 묘한 물건을 꺼내왔다.
“만드는 게 성가셔서 최대한 아끼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아끼면 안되겠지. 장착해라. RFN-0103.” “네. 마스터.”
엘프의 귀를 감싸는 식으로 만들어진 듯한, 조금 독특한 외형을 지닌 귀걸이.
라피나가 그것을 자신의 귀에 장착하는 동안, 라플라스는 팔짱을 낀 후 자신의 엘프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그 추가 파츠는 필수 사항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장착 상태를 유지하도록.”
혼자 장착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는 그 귀걸이를, 시간을 들여 자신의 귀에 착용하는 라피나.
그렇게 라피나가 착용을 마치자, 평소의 은회색 머리카락이 아닌 검은 머리카락과 인간의 귀를 지닌 소녀가 나타나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스터.”
갈색 피부와 그 얼굴은 그대로인 채, 변장을 마친 라피나가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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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허어어어엉... 클레아아아...” “정말... 고개 숙이지 말아주세요 마왕님. 저는 이제 괜찮답니다.”
자신의 허벅지에 뺨을 비비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클레아.
지금 클레아는, 마왕성의 침실 위에서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목에 검을 휘두르던 라피나란 이름의 엘프.
탐스러운 구릿빛 피부가 맘에 들어 좀 즐겨보려고 한 것뿐인데. 암컷이 나를 거부하고 반격할 거라곤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그런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은 것에 놀라, 배가 열리고 그 배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데도 가만히 그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 한심하기 그지 없는 나라는 마왕.
그런 한심한 나를 지키기 위해, 클레아는 몸을 날려가며 나 대신 그 엘프의 자폭을 막아내었다.
그냥 단순한 폭발이었다면 나둬도 괜찮았을 텐데. 마안으로 그 폭발의 근원이 밀도 높은 에세르의 덩어리라는 것을 파악했던 클레아.
그게 테세르 그 자체인 내 육체에 치명적일 것이란 것을 직감한 클레아는, 설명할 틈도 없이 보호막까지 두르며 그 폭발에서 나를 지켜주었다.
아무리 에세르를 지닌 생명체 출신이라 영향이 적다지만. 본인도 테세르를 가진 짐승이 된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런데도 혼자 그 에세르의 폭발을 막아낸 클레아는, 그 대가로 이 음란하기 그지 없는 육체가 식겁할 정도로 너덜너덜해 졌었다.
그나마 입고 있던 성녀복이 겉보기와는 달리 충격 보호를 제대로 해서 이 정도지, 만약 그 성녀복이 아니었다면 클레아의 몸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폭발이었다고 분석한 리즈벳과 페이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장이 보일 정도로 크게 다친 것은 사실이라, 까딱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하필이면 회복 스킬이 가장 뛰어난 클레아가 다친 거라... 처음에는 다들 멘붕해서 완전 난리였지.
만약 클레아가 생명력이 인간보다 질긴 음수가 아니었거나, 라디아에 수녀 가축이 조금만 더 모자랐더라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큭. 그렇게 어떻게든 위험한 구간은 넘어갔다지만... 그래도 아직도 전부 회복을 못할 정도라니. 이거 정말 마왕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한 상황이야...!
“크흑...! 내 부인을 이렇게 다치게 만들다니...! 정말 마왕으로서 부끄럽기 그지 없어!” “마왕님 탓이 아니랍니다. 제가 빠르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인걸요.. 제가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파악했다면, 이렇게 마왕님의 것인 몸을 함부로 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아니.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자기 부인이 목숨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게 만들다니. 이게 무슨 마왕이란 말이야.
“그나마 흉터 없이 회복될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네요.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면 마왕님께 죄송한 일이니... 역시 저희 짐승들의 육체는 열등한 인간들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니까요♥” “크흑... 지금 흉터 같은 게 문제야? 정말...”
이 와중에도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만을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키득거리는 클레아.
그런 기특한 클레아의 표정을 보게 되자, 가슴 한 켠에서 안타까운 감정이 몰려온다.
“...마왕님. 일단 클레아는 좀 더 쉬는 게 좋겠어요. 저랑 세레스 언니가 보고 있을 테니...” “그래요 마왕님. 일단 마왕님께선, 리즈와 페이엔 언니에게 가서 상황을 파악하시는 게...”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부탁해 리안나. 세레스.”
우리 음수들의 든든한 유부녀들이, 클레아에게 매달린 나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내비친다.
제길... 말정액에 회복 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정도로 만능은 아닌 말정액이니...
...쯧. 그래. 일단 위기는 넘겼으니, 클레아는 쉬도록 해줘야지.
클레아의 회복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대로 가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모든 기력을 회복에 전념할 수 있게, 두 사람 말대로 클레아는 쉬게 놔두고 나는 상황을 파악하러 가야겠어.
“클레아. 난 가서 상황을 파악할게. 세레스랑 리안나가 간호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푹 쉬고 있어.” “후후... 네. 그럼 부탁 드려요. 마왕님.”
조금 안색이 안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아.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세레스와 리안나에게 클레아의 간호를 부탁했다.
“클레아를 부탁해 두 사람. 수녀 가축들의 기력이 회복되면, 바로 회복 스킬을 쓸 수 있게 투입해주고.” “걱정 마세요. 다들 얼른 클레아를 회복시키려고 말정액 마약을 들이키며 회복 중이니까요.” “내일 정도면 건강해질 수 있을 거에요. 걱정 마시고 페이엔 언니에게 가보세요.”
그래. 이 세상의 회복 스킬이 생각보다 애매하긴 하지만, 내 수많은 가축들이 애쓰고 있는 만큼 클레아의 회복은 금방 끝날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그 라피나란 암컷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클레아가 테세르를 방출해가며 그 폭발을 막았기에 그 암컷의 괴기한 육체는 조사할 수 있을 정도의 조각들이 남아있는 상태다.
지금 페이엔과 리즈벳이 분석에 들어갔으니, 그 암컷이 무엇인지는 곧 파악이 가능할 터.
누군가 보낸 것인지, 아니면 라피나라는 그 암컷이 목숨을 버려가며 날 공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든 상관없어. 내 음수가 이렇게나 다쳤으니, 아주 잔혹하게 복수해 줄 테니까 말이야.
단순히 암컷의 단독 행동이라면, 처벌로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없게 짐승으로 만들지 않고 깔끔하게 죽여주겠지만...
만약, 누가 뒤에 있다면... 그리고 그게, 수컷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가장 편할 거야. 누군지 모를 수컷.
절대 편하게 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암컷들의 장난감이 되는 것보다, 발전소가 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지옥을 선사해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