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56 - 602화 - 여우는 속았습니다!
맹약의 주술로 계약한 마왕과 요화가, 주술의 조건으로 걸었던 첫 날의 승부를 마쳤을 무렵.
백선을 데리고 청야의 영역에 들어온 호월은, 청야의 거처인 동굴로 향하며 백선에게 다왔다는 듯이 말을 걸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회복도 끝났을 테니, 바로 출발할 수 있게 준비 중일거야. 요화 녀석이 걱정되니 바로 청야를 데리고 출발하자고.” “흐음~ 글쎄다. 본인 영역을 범위로 잡아 맹약의 주술을 쓴 걸 보면,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닐 것 같다만...” “뭐!? 맹약의 주술!? 요화가 그걸 썼다고!?”
손에 쥔 부채를 팔랑거리며, 호월의 등 위에서 요화의 영역이 위치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백선.
보이지도 않는 먼 장소의 주술을 감지한 백선의 말에, 호월은 짐승의 얼굴임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당황하며 달리다 말고 백선을 돌아보았다.
“이 막내가 미쳤나! 그거 그렇게 막 쓸만한 주술이 아니라 했는데도...!” “앞이나 똑바로 보거라. 힘들게 따라와준 나를 바닥에 내던질 생각은 아니겠지?”
호월을 나무라듯 그 머리를 툭 건드리는 백선과, 백선의 말에 할 말 없다는 듯이 다시 앞을 바라보는 호월.
호월이 고개를 돌리자, 백선은 다시 요화의 영역 방향을 바라보며 부채를 팔랑거렸다.
“...오히려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규칙만 잘 설정했다면, 안전하게 마왕을 묶어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말이다.” “양측이 동의해야 맺어지는 주술인데 그리 좋은 규칙이 성립됐겠어? 역으로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글쎄. 모르는 일이지. 네 얘기대로라면 마왕은 요화를 원하는 모양이니, 적당히 요화에게 맞춰주었을지도...”
같은 신수인 호월은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는 희미한 주술의 기운인데. 거기서 무엇인가를 느낀 것일까.
백선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호월의 등을 쓰다듬었다.
“뭐, 어떤 규칙을 설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술의 기운이 안정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구나. 주변 구경이나 좀 하게 조금 천천히 달려보거라.” “이런 미친 요화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 판에...! 구경은 일 끝나고 천천히 해!” “하여간 성질만 급해서는... 간만에 이곳의 맑은 기운이나 좀 느껴보고 싶었거늘...”
자신의 부탁을 짜증난다는 듯이 거절하는 호월의 대답에, 재미없다는 듯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백선.
기껏 데려온 백선이 흥미를 잃은 듯한 낌새를 감지한 호월은, 더욱 속도를 높이며 다급하게 청야가 있는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청야! 준비됐지!? 백선을 데려왔으니, 바로 출발하...!”
지금쯤이면 청야가 회복을 마치고, 바로 움직일 준비까지 끝내둔 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호월.
하지만 동굴에 도착한 호월과 백선을 맞이한 것은, 감기라도 걸린 듯한 안색으로 회복에 전념하고 있는 청야의 모습이었다.
“무, 무슨...!? 아직도 회복이 덜됐단 말이야!?” “미안하다 호월... 상처는 거의 아물었지만, 상처에 파고든 사악한 기운이 영 빠지질 않아서... 큭...”
상처 부위 자체는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히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청야의 붉어진 얼굴.
식은 땀을 흘리며 뜨거운 숨을 내뱉고 있는 청야의 모습에, 호월의 등에 타고 있던 백선이 부채를 팔랑거리며 청야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구나 청야. 지금 네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마왕의 기운이더냐?” “...그대가 와줄 줄은 몰랐는데. 백선... 큭, 마왕은 아니고 그와 이어진 마녀들에게 당한 것이다만... 그런데도 참으로 지독하군. 몸의 기운이 도저히 다스려지지가 않아.”
반쯤 포기하고 있던 백선의 모습에, 무언가 반가움을 느끼는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짓는 청야.
그런 청야의 미소에 뭔가를 느낀 것처럼, 백선은 펼친 부채로 입을 가리며 청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흠. 그렇군. 마왕과 이어진 여인들의 기운인가...” “백선...?” “2천년 넘게 마음을 다스리며 지내다 보니 무엇인지 모르겠나 보구나. 청야. 그대 지금, 발기하고 있도다.” “...하? 아니... 잠깐. 바, 발기...!?”
백선이 말한 단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해, 잠시 멍하니 백선의 말을 생각해보던 청야.
그 단어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순간, 청야는 당황하면서 그제서야 자신의 하반신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그 마녀란 여인들은 수컷의 정욕을 이끌어내는 기운을 지닌 모양이구나. 그런 기운이 몸에 스며들었는데 가만히 명상만 하고 있으니 당연히 기운이 안정되지 않겠지.” “무, 무슨...!?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 내가, 정욕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얼마나 고자처럼 살았길래 그것도 눈치채질 못하느냐. 네가 가진 정화의 샘에 가서 기운을 빼고 오던가, 아니면 자리를 비워줄 테니 직접 해결해서 기운을 소모시키거라.” “큭, 아니, 이 무슨...! 그, 금방 다녀오겠다 백선, 호월...!!”
너무나도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바지를 부여잡고 동굴의 밖으로 뛰쳐나가는 청야.
그런 청야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백선이, 웃음을 참는 것처럼 부채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인간 형태가 되어 그런 백선과 뛰쳐나간 청야를 황당하다는 듯이 번갈아 보면서, 무언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말을 하지 못하던 호월.
잠시 멍하니 있던 호월이, 자신이 머리를 헝클이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백선에게 물었다.
“아... 그러니까... 정욕만 잘 풀면 끝이었는데, 착각한 청야는 계속 회복에 집중했다? 그건가?” “뭐, 자연스러운 정욕은 아니었으니 착각할 법도 하지. 그 왜, 청야는 처음부터 수도승마냥 정욕과는 거리가 있던 녀석 아니더냐.” “그 사악한 기운 때문에 고통이라도 느끼고 있는 건 줄 알았더니... 나 참. 청야가 저리 당황하는 건 또 처음 보는군...” “그러게나 말이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재미있는 광경도 보게 되는구나. 쿡쿡.”
자리에 없는 청야를 놀리는 것처럼 키득거리는 백선과, 기운이 빠진 것처럼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쉬는 호월.
잠시 그렇게 웃던 백선은 부채를 접더니, 동굴의 밖으로 나와서 요화의 영역 쪽을 바라보았다.
“흐음. 감정 중에서도 정욕을 자극하는 테세르란 말이지... 그런 테세르를 에센티아에 섞겠다라...” “...설마, 저런 테세르면 섞여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문제는 어떤 테세르냐가 아니라, 저 테세르를 섞기 위해 이곳에 있던 생명체들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거라고?” “그래도 일단은 다행 아니더냐. 만약 정욕이 아닌 다른 감정을 자극하는 테세르였다면, 이미 진작에 이 세상이 지옥도로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이가 없어서... 아니, 그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백선을 흘겨보는 호월과, 그런 호월에게 키득거리며 웃음을 보이는 백선.
손에 쥔 부채를 팔랑거리며, 백선은 느긋한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요화의 영역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 일단 가서 확인해 보자꾸나. 그래도 급하게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너나 청야는 다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준비들 하거라.”
무언가 안심되는 요소라도 본 것처럼, 느긋한 표정으로 호월에게 제대로 준비를 갖추라고 말하는 백선.
“흐응. 마왕씩이나 되어서 그런 욕망을 지닌 녀석인가... 참으로 웃긴 녀석이로고...”
무기력하기 그지 없던 암컷 신수의 눈빛에서, 무엇인가 흥미를 느낀 듯한 호기심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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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왕, 님.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이셨으니, 이제 마왕님만 내려오시면 됩니다...” “오? 그래? 금방 내려갈게. 고마워~” “아, 아닙니다. 그럼...”
첫 승부부터 수작을 걸어온 요화와, 그런 요화에게 무리하지 않고 승리를 건네줬던 나.
그 이후 연달아 2번을 더 패배해주자, 무언가 안심되는 요소라도 생긴 것처럼 요화의 제자들에게서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제법 줄어들었다.
뭐, 여전히 내 눈을 잘 못 마주치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예전처럼 덜덜 떨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건 아니잖아?
이젠 할 말이 있으면 지금처럼 말을 걸어오기도 하니, 상당히 나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는 거겠지.
용건이 있을 때 외엔 말을 걸어오는 암컷이 없다는 건 슬프지만... 뭐, 오늘의 승부 이후엔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니까. 며칠만 더 지나면 분위기가 확 바뀌겠지?
큭큭. 이틀간 얌전히 있느라 얼마나 좀이 쑤셨는지... 벌써부터 마음껏 즐길 생각에 몸이 근질거리네.
3일간 꽤나 긴장이 풀렸지 요화? 조금만 기다려. 오늘부터는 계획했던 대로, 너를 마구 즐겨줄 테니까 말이야.
“흐흐흠~ 보지만 맛볼까 모든 구멍을 맛볼까~ 어떻게 맛볼지 고민되는... 흐음?” “...칫. 별 것도 아닌 주제에...”
요화의 제자들에게 반쯤 억지로 뜯어낸, 일본 온천 같은 곳에서 입어도 될 것 같은 이국적인 복장.
가장 큰 사이즈인데도 내 체격에 맞지 않는 그 옷을 매만지며 내려가던 도중, 쟁반을 든 어린 수컷이 건방진 눈으로 날 쏘아보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저건... 저번에 나한테 덤볐던, 소우마란 녀석이었던가?
흐음. 잠깐이었지만 참 시건방진 눈빛이었는데. 그때 그리 당했으면서 아직도 저따위로 눈을 부라린단 말이야?
아직 좆에 털도 안 났을 꼬맹이 주제에. 참 건방진 새끼인걸? 다른 꼬맹이들은 내 눈도 못 마주치는데 말이야.
요화가 3연승 중이라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건가? 흐음. 쟤는 좀 기억해 놨다가 참교육 좀 해줘야겠어.
“마왕님~ 잘 쉬었어? 컨디션은 좀 어때?” “음. 최고야 리즈. 오늘은 시작하자마자 항아리 째로 퍼 마셔도 될 것 같아~”
거슬리는 꼬맹이의 눈빛을 되새기며 1층 거실의 미닫이 문을 열자, 나와 마찬가지로 이국적인 복장을 입은 내 음수들이 나를 반기듯이 손을 흔단다.
푸흐흐. 눈에 띄는 노출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저 은근하게 풍겨오는 색기... 가끔은 이런 복장도 꽤 괜찮은걸?
과연 리안나가 이런 복장들을 어떻게 바꿔주려나? 얼른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네 정말. 큭큭.
“페이엔이 준비해준 영양제 덕분에 숙취 같은 것도 전혀 없고. 위장도 간도 확실하게 준비됐단 느낌이야. 뭐, 세계수의 에세르 때문에 몸이 찌뿌둥한건 여전하지만...” “요화의 영역이 더 안쪽이 아니어서 다행이네. 여기서 더 안쪽이었으면 찌뿌둥한걸 넘어서 신체 능력 자체에 영향을 끼쳤을 텐데 말이야.” “푸흐흐. 그러게. 요화가 참 어정쩡한 곳에 자리잡아줘서 고마운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내게 피로감을 더해주던 세계수의 에세르였지만, 고맙게도 요화의 영역은 아직까진 버틸만한 수준.
무리하게 힘을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도 몸 자체엔 큰 영향은 없는 수준이었다.
만약 더 안쪽에서 요화를 만났다면, 이렇게 주술 계약을 하기는 커녕 요화를 제압하지도 못해서 빌빌거리고 있었을 텐데...
큭큭. 요화는 이런 사실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 적당히 가까워졌을 때 알려주면서 당황하는 것 좀 구경해야겠어.
“자... 그럼 다들. 본격적으로 시작할 준비는 됐지?” ““네♥ 마왕님♥”” “좋아. 오늘 승부에서 승리한 후에, 본격적으로 요화와 그 제자들을 공략한다. 이 요화의 거처를, 우리들의 음탕한 휴양지로 만들어보자고.”
기다리느라 너무 지루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즐거운 듯이 키득거리는 내 음수들.
본성을 숨기고 있는 나와 내 음수들이 마지막으로 즐기는, 얌전한 저녁 식사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