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me/NovelPiaShare
노예 신입사원 (5)
면접에서 받은 성희롱의 충격 때문에 은비는 집에 처박혀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사흘 만에 집 밖으로 나와, 대학으로 향했다. 헤르메스상사의 면접에서 있었던 일을 은사인 한민 교수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떡하지? 교수님이 어렵게 추천장을 써준 회사인데..면접이 진핻되는 도중에 도망치 듯 뛰쳐나와 버렸어..헤르메스 상사의 관계자가 교수님에게 압력을 넣었을지도 몰라..모두 나 때문이야..내가 참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텐데..'
책임감이 강한 은비는 찬호의 성희롱과 비열한 행위보다는 자신이 면접관인 찬호의 따귀를 때리고 도망쳐 나온 게 더 큰 사건처럼 느껴졌다.
* * *
교수 연구실에 들어서자, 한민이 따뜻한 미소로 은비를 반겼다.
"이틀이나 학교에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지 걱정했단다."
한민의 자상한 태도에 은비는 면접 얘기를 꺼내기가 더 꺼려졌다.
"교수님, 실은...일부러 추천장까지 써 주셨는데..드릴 말씀이 없어요. 죄송해요, 교수님."
은비는 고개를 떨군 채 속삭이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책감으로 가슴 속이 가득찼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아아, 그래. 혹시 헤르메스상사에서 온 우편물을 못 받은 거 아니니? 어제 찬호 군한테 전화가 왔단다."
"네? 찬호씨가요?"
"축하한다! 은비 너의 채용이 결정되었단다."
"네! 그게 정말이세요?"
은비는 한민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은비가 면접 도중 뛰쳐나온 건 그녀 잘못이 아니지만, 어찌되었던 면접은 도중에 중지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찬호의 따귀까지 후려갈기지 않았던가. 은비는 자신이 채용되었다는 교수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기쁜 건 알겠지만, 그 얼굴은 의외라는 표정이구나. 내가 추천장을 제출했는데, 떨어질 리가 없잖아. 아니면 면접 볼 때, 무슨 실수라도 했니?"
한민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그게...사실은..."
* * *
은비는 면접에서 있었던 일을 솔직히 한민에게 이야기했다. 부끄럽긴 했지만 솔직히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뭐라고?! 가슴을 주무르고, 스커트 안에 손을 넣었다고! 그런 일이..믿을 수가 없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야..찬호 군에게는 내가 연락해서 따지도록 하마."
"네에..."
"하지만, 왜 그런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지? 그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당했으면, 당당하게 저항했어야지."
한민이 꾸짖는 말투로 목소리를 높이자, 은비는 뺨은 물론 귀까지 불그스레 물들었다.
"교수님, 저 헤르메스에 들어가지 않을래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그 회사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은비는 수치심과 자기혐오로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사퇴라니..그건 좋지 않아. 너의 장래를 위해서도 헤르메스에 꼭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실은..찬호 군은 요즘의 젊은 아가씨들이 너무 건방지고 제멋대로라 따끔하게 혼을 내주고 싶다고 전부터 나에게 말하곤 했어. 가끔 자기라도 혼을 내주고 싶다고 했거든. 하지만 이번엔 좀 도가 지나친 것 같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일은 찬호 군의 잘못이야."
"네에.."
"하지만 따귀까지 때렸는데, 널 합격시키지 않았느냐? 잘은 몰라도, 끝까지 불합리한 걸 알면서도 참아낸 너를 높이 평가한 게 아닐까?"
"잘 모르겠어요. 교수님.."
"그래. 국내 굴지의 종합상사에서 성희롱 면접이라니..말이 되지 않아. 은비 네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같구나. 그리고 찬호 군도 너무 심한 짓을 했다고 지금쯤 반성하고 있을거다. 그만 두다니..그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진 않겠지? 다시 생각해 보거라."
한민이 열변을 토하자, 은비도 왠지 한민의 말이 사실인 것 처럼 느껴졌다.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면접은 은비에게는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꿈인 것 같았다.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찬호가 연기를 한 거라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니저리니 해도 헤르메스는 은비에게 꿈의 직장이었다.
"교수님 저 헤르메스상사에 들어갈게요. 그리고 정말 열심히 할게요."
한민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찬호 군에게 들었는데, 은비 네가 배속될 곳도 이미 결정이 난 모양이구나. 서울 특별지사라고 하던데."
"서울본사가 아니라, 서울특별지사라고 하던가요?"
헤르메스에 대해서는 입사를 위해 자세히 알아본 은비지만, 서울특별지사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지방마다 지사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에서 서울에 지사를 따로 둔다는 건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이름은 지사지만, 사무실은 본사빌딩 안에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단다. 나도 의아한 생각에 찬호 군에게 물어 보았더니, 회사의 중요한 임무를 맡은 태스크포스 개념의 팀원 중심의 조직이라고 하더구나. 본사에서 엘리트만 추려내 만든 조직이라 본사에서 지사의 형식으로 독립시켜 놓았다는 거야."
한민의 설명은 들으며, 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본사에서 근무하고 싶었던 그녀는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앞으로 헤르메스 본사 빌딩에서 근무할 생각을 하자, 은비는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 가슴이 설레였다.
'너무 욕심을 부리면, 벌 받을거야. 누구나 부러워하는 헤르메스잖아?'
은비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운함을 달랬다.
"찬호 군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입사한 뒤에는 다 잊고 같이 열심히 일하도록 해. 근본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무슨 오해가 있었을거야."
"네에..교수님. 명심할게요. 다 교수님 덕분이에요. 다시 한번 감사드릴게요."
은비의 얼굴에 겨우 웃음기가 돌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더 빨리 한민 교수님에게 상담할 걸 그랬어. 모든 게 잘 돼서 정말 다행이야.'
완전히 포기하고 있던 헤르메스에서 채용 통지를 받았다는 사실에, 은비의 표정은 교수실에 들어설 때와는 달리,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지나간 일은 다 잊고, 본사에서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거야.'
은비는 헤르메스의 사원이 된 자기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새로 장만한 베이지색 스커트에 정장을 입고, 은비는 집을 나섰다. 갈라진 머리카락 한 올 없는 건강하고 윤기나는 긴 생머리가 아침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늘부터 나도 헤르메스 상사의 정직원이야."
올해는 청심여대 졸업생 중 두 명만이 헤르메스상사에 최종적으로 채용이 되었다. 역에 도착한 은비는 자기 외의 그 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서 함께 출근하기로 미리 약속을 한 것이다.
"미안해요, 은비 씨. 기다렸죠?"
5분 정도 늦게 도착한 보라가 은비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건넸다. 보라는 윤곽이 뚜렷한 서구적인 미인으로 긴 머리를 옅은 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세로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간 회색 바지 차림으로, 옷깃 사이로 밝은 오렌지빛의 셔츠가 들여다보였다. 막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신입사원치고는 화려하게 멋을 부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나도 지금 온 걸요."
두 사람은 곧 같이 전철에 올라 탔다.
은비는 같은 영문과이긴 했지만, 보라와는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었다. 가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정도의 기억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은비는 몰랐지만, 보라는 그녀에게 강한 경쟁심을 지니고 있었다.
3학년 때 대학축제에서 [미스 청심여대]의 자리를 놓고 그녀는 은비와 경쟁을 벌였다. 은비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추천으로 떠밀려 나왔지만, 보라는 자진해서 참가했다. 하지만 그녀는 은비에게 미스 청심여대를 빼앗겨 준 미스 청심여대에 머물렀다.
보라가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은비는 미안한 마음에 미스 청심여대를 그녀에게 양보하고 싶을 정도였다.
"사회인이 된 첫날인데,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보라 씨."
"네. 정말 뿌듯해요. 오늘부터 그 유명한 헤르메스 상사의 신입사원이잖아요."
은비와는 다른 이유로 보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학축제 때는 은비한테 지긴 했지만, 보라의 외모도 지나치는 남자들의 시선을 끌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미스 헤르메스 상사]가 될거야.'
그녀는 다시 은비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불타고 있었다.
'찬호씨가 말한 요즘 여대생이란 보라 같은 타입을 말하는 걸거야..'
은비는 반년 전에 면접 때 경험한 악몽 같았던 성희롱을 떠올렸다. 한민 교수에게 나름대로 사연을 듣기는 했지만, 역시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헤르메스의 사원이 되었으니, 멋진 남자들이 넘쳐날거에요. 잘생긴 엘리트 애인을 만들기 위해, 은비씨도 힘내세요."
"저, 나는 그럴 생각이..."
입사 첫날부터 노골적으로 괜찮은 애인을 찾을 궁리를 하는 보라를 보면서, 은비는 왠지 자신이 보라 대신 그 끔찍한 면접을 받은 것 같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머, 그렇게 새침 떨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건 그렇고, 은비 씨가 배속된 서울 특별지사란 곳은 어떤 곳이죠? 신기하지 않아요? 서울 본사빌딩 안에 서울 지사가 있다니."
"아, 네에.."
보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은비는 우물거리며 대충 넘겼다. 사실 은비 자신도 한민 교수에서 간단한 설명을 들은 게 전부여서, 서울 특별지사라는 게 정확히 어떤 곳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헤르메스상사의 회사소개 책자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서울 특별지사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도 실려 있지 않았다.
"저도 자세히는 잘 몰라요.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획을 위한 태스크포스 팀이라는 정도의 설명을 들었을 뿐이거든요."
"태스크포스 팀?"
막연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은비를 보라는 질투와 선망이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