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9화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는 나와 김상우 대리의 목소리만 들렸다.
이미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기에 모든 직원들이 퇴근하고 단 둘이 남아있었다.
내가 이런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있는 게 정말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당연히 일에 대한 열정이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니고, 내가 김 대리에게 부탁했던 일 때문이다.
“강 과장님, 진짜 보기만 해야 됩니다. 더구나 이거 원본이라서 낙서하거나 하면 절대 안돼요.”
“거 참, 진짜 내 점수 확인만 한다니까.”
“그럼, 저는 잠시 배가 아파서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그 동안에 다 보세요. 이거 오늘내로 엑셀에 다 옮겨 적으려면 밤 새야할지 몰라요.”
“얼른 다녀와. 금방보고 김 대리 책상에 올려둘게.”
김 대리는 배를 부여잡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때 마침 운도 따라주네.
나는 김 대리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서 작업을 시작했다.
위이이잉.
사용자가 없어서 꺼두었던 복사기의 전원을 다시 켜고, 부장님의 업무평가 파일철을 펼쳤다.
끈으로 묶여있는 서류를 재빨리 풀고 낱장이 된 업무 평가지를 모두 복사기 안으로 투입시켰다.
몇 백 만원이나 주고 산 대형 복합기답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복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를 씹고 다니는 몇몇 년들의 신상만 털 목적으로 폰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사실, 정확하게 누구누구인지 몰라서 모든 정보를 챙겨가기로 했다.
그리고 때마침 김 대리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탁.
복사물들을 내 가방에 모두 챙겨 넣고 원본을 다시 묶어서 파일철을 덮었을 때, 김 대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주 시원하고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강 과장님, 성적은 확인 다 했어요?”
“어, 확인 다 하고 파일철은 김 대리 자리에 올려놨어.”
“그데 표정이 왜 그래요? 점수가 많이 심각하던가요?”
“김 대리가 작업하면서 직접 보면 알겠지만, 아마 내년부터는 새로운 유흥친구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요나라.”
“에이, 설마...진짜 잘리기야 하겠어요...?”
“그건 모르지, 박 부장 손에 달린 거니까.”
“흐음, 제가 어떻게든 박 부장님 설득해서 강 과장님의 업무 능력은 이런 점수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좀 더 지켜봐 달라고 부탁해 보겠습니다.”
“역시, 김 대리밖에 없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마음 맞는 친구가 최고라는 옛말은 틀린 게 아니라니까.”
“근데, 다음 주 바이어들 접대하기로 한 곳은 어딥니까? 비너스?”
하여튼, 공짜로 룸에서 술 마시고 떡치는 거 존나 좋아하는 새끼라니까.
처음에는 내 업무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재미삼아 몇 번 끼워줬더니 그 뒤로는 환장하고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그래도 박 부장 오른팔이라서 내가 박 부장에게 심하게 깨지는 걸 쉴드 쳐주는 역할로 지금까지 데리고 다녔다.
일단 유능한 녀석이니까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멀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간도 늦었으니까 나는 이만 간다.”
“어어? 과장님, 오늘 저와 계속 함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아니, 결혼도 안하셨고, 그렇다고 집에 가서회사일 붙잡고 있을 리도 없는데 뭐가 바쁘시다고...”
“게임을 좀 만들어볼까 하거든.”
“게, 게임을 제작한다고요? 강 과장님 순수문돌이 출신이잖아요. 게임 제작 프로그램 만질 줄 아세요?”
“뭐, 그냥 배워가면서 하는 중이야.”
“와우! 유흥 말고도 과장님이 잘하시는 게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근데 제작중인 게임이 무슨 장르인가요?”
“존나 무서운 서바이벌 게임.”
“호오, 재밌겠는데요. 다 만들어지면 저도 한 번...”
“아니야. 이 게임은 안하는 게 좋아. 한 번 빠지면 절대 마음대로 헤어 나올 수 없거든.”
“그 만큼 중독성 있는 게임인가요?”
“아무튼, 김 대리는 절대 이 게임을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내 말은 진심이다.
그래도 김 대리 정도면 회사 내에서는 나와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친구니까 말이다.
만약 이 게임을 하게 되는 경우라면 내 눈 밖에 났다는 증거니까.
나는 진짜 존나 어마무시하게 미쳐버릴 정도로 무서운 게임을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날 씹고 다니던 년들이 이 게임의 최초 유저가 될 것이다.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있었더니 피로가 확 몰려왔다.
역시 회사에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운이 쭉쭉 빠지는 걸 봐서 ‘Work’는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생활을 20년 이상 하고 있는 박 부장이나, 새벽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열정을 불태우는 김 대리가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거주하고 있는 민지의 오피스텔이 가까워서 10분 만에 도착했다.
나는 문자로 늦을 테니까 민지에게 저녁은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에 따로 준비는 안했지만, 간단한 간식과 녹차를 준비해서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많이 피곤하죠? 얼른 씻고 주무세요.”
역시나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옷도 받아주고 이런저런 말도 걸어준다.
민지와는 뭔가 비밀을 공유한다는 느낌 때문인지 나도 편하게 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꿈속 세상인 <영혼의 쉼터>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부분도 있겠지만, 한 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몸으로 직접 겪은 결과물이기도 했다.
나는 민지의 서재로 사용되고 있는 방의 책상에 서류들을 어지럽게 펼쳐놓고 공부, 아니 단순 암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내 손에 들려진 것은 오늘 회사에서 김 대리를 통해서 복사를 해온 우리 부서 직원들의 성적표였다.
대충 나를 뒤에서 씹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직원들 4명 정도를 추려내서 주민등록번호를 암기하고 있는 중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안 외워지는 걸까.
학창시절에는 나도 공부를 제법 잘해서 명문대로 소문난 문천대학교에 입학까지 했는데, 그 뒤로 너무 술 마시고 놀기만 해서 머리가 완전 굳어져 버린 것 같다.
당장에 같은 학교 출신인 민지는 변호사인데 너무 비교된다.
자괴감 까지는 아니지만 느낌이 좀 그렇다.
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자 민지가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서 자라고 했지만, 민지는 잠이 안온다면서 나를 따라 서재로 들어와서 의자 하나를 가져오더니 옆에 앉아있는 중이다.
“이런 날 아니면 현실에서 자유도 거의 없을텐데, 왜 내 옆에 계속 붙어 있어?”
“이렇게 붙어 다니다보면 혹시라도 제가 오빠를 좋아하게 되거나, 정이라도 들어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도 응원은 해 줄게.”
아무리 여자가 남자의 외모만 보고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의 관계에서 나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모, 재력, 열정...여자들이 생각하는 매력 포인트가 나에게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네.
나는 민지가 기특해서 엉덩이를 몇 번 두드려주고 다시 내 손에 들린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뭔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던 내 모습에 민지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본다.
“근데 이게 뭐예요?”
“모르는 게 정신건강에 좋긴 한데, 그래도 민지 너라면 곧 알게 될 수밖에 없겠네.”
“네에?”
“꿈에서 서바이벌 게임 하나 만드는 중인데 거기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 명단이야.”
“아....그...그렇구나....”
나는 별다른 부연설명도 없이 간단명료하게, 그리고 별 감정 없이 말을 했지만, 똑똑한 민지의 머리에는 제법 상세한 그림이 그려진 모양이다.
잠시 동안 그 상황을 상상한 민지는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내 팔을 감싸며 바짝 붙어서 껴안았다.
“저, 저도...그 게임에 참여하는 건가요....?”
민지가 왜 이렇게 공포에 질려서 나에게 안겨오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자신도 내가 만든 서바이벌에 참여하게 될 사람이라고 착가한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민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거긴 말 안 듣는 인간들을 교육하기 위한 곳이라서 민지처럼 착한 애는 참가 안 시켜. 민지는 오빠 말 잘 듣잖아? 그치?”
“그, 그럼요! 저는 이유 불문하고 오빠 말이라면 무조건이죠. 히잇~”
나의 뼈있는 말에 민지는 오버하면서 억지웃음까지 지어보였다.
나는 민지를 내 무릎위에 앉혀놓고 열심히 4명의 주민등록번호를 암기했다.
처음에는 잘 외워지지 않던 숫자들이 내 무릎위에 앉아있는 민지의 젖가슴을 만지면서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히게 잘 외워졌다.
민지는 피곤했는지 내 무릎위에 앉아있는 상태로 잠이 들어버렸다.
나도 이제 4명의 주민등록번호를 모두 암기했기에 민지를 안아서 침대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원래도 베개에 머리가 닿으면 빠르게 잠이 드는데 오늘은 유독 피곤해서 거의 1분 만에 잠들어버렸다.
게임에 로그인 하듯이 꿈속으로 들어오자 <영혼의 쉼터>라는 문구와 함께 환영한다는 메시지가 나를 반겼다.
곧 바로 민지의 영혼을 소환하고, 나를 씹어대던 년들의 주민등록번호를 차례로 입력했다.
[현재배지영은 수면상태가 아닙니다.]
[수면상태가 아닌 대상의 영혼은 불러올 수 없습니다.]
[현재 이지수는 수면상태가 아닙니다.]
[수면상태가 아닌 대상의 영혼은 불러올 수 없습니다.]
[현재 박미희는 수면상태가 아닙니다.]
[수면상태가 아닌 대상의 영혼은 불러올 수 없습니다.]
[현재 천수연은 수면상태가 아닙니다.]
[수면상태가 아닌 대상의 영혼은 불러올 수 없습니다.]
새벽 1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4명 모두 여전히 잠이 들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이 시간까지 전부 잠도 안자고 뭐 하는 거지?
항상 회사에서 같이 뭉쳐 다니는4명이니까 아마 지금도 단톡방에서 나를 씹어대면서 놀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꿈속에서 상태창은 오직 내 눈에만 보이기 때문에 민지의 눈에는 그저 가만히 서서 인상을 쓰고 있는걸로 보였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오빠,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아니,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니까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놀고 있어. 뭐 필요한데?”
“늘 하던 대로...”
나는 민지의 가슴을 몇 번 만져주고는 그녀가 좋아하는 초밥과 각종 영화를 볼 수 있는 스크린을 생성해 주었다.
민지의 취미는 TV시청이나 영화보기 그리고 가끔 독서 정도였다.
그녀는 이렇게 실내에서 즐기는 걸 좋아해서 평소에 호캉스를 즐겨왔고, 지금 내 꿈속에서 그 기분을 내는 중이다.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보고 있는 민지를 뒤로 하고 나는 새로운 [지형]을 구상하는 데 집중했다.
그년들이 수면에 들기 전까지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대기 장소를 만들어 두기로 했다.
나와 민지가 머물고 있는 호텔방으로 불러올 수는 없으니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가로세로 5미터 정도의 정사각형 방을 4개생성하고 이제 인테리어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조명은 아주 어둡고 기온은 낮게 설정해두었고 벽지는 없는 시멘트 상태로 곳곳에 거미줄을 만들었다.
살아있는 거미도 생성하고 싶었으나 생명체의 생성은 주민등록번호를 통해서 현실의 정보를 불러오는 방법과 내가 직접 그리거나 창작해서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 밖에 없다.
거미에게 주민등록번호란 존재하지 않아서 첫 번째 방법은 불가능하고, 내가 직접 창작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건 잘 만들 자신이 없다.
그냥 대충 곤충의 기본 마디를 그리고 털을 슝슝 그린 후에 거미줄에 걸어둘까 싶었는데 때 마침 머릿속에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거 가능하면 대박인데.
검색 키워드에서 거미를 검색하니 각종 거미인형과 장난감들이 끝도 없이 나열되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현실에 가깝게 생긴 거미인형을 선택해서 생성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내가 직접 그리거나 창작한 형상에 생명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거미인형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매뉴를 실행시켰다.
[생명체의 상세 설정을 해주세요.]
성공이다!
생명체의 성별, 성향, 지능 등등 여러 가지 내용들을 기입해야하는데 어차피 사람을 모티브로 생성하는 것도 아니기에 대충 거미줄 위에서 왔다갔다 움직일 정도의 단세포 수준으로 설정했다.
모두 똑같은 디자인으로 통일한 4개의 방은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겼다.
이제 새벽 2시가 넘어갔으니 4명 모두 잠들었을 것 같은데.
4명의 여성들은 이미한 번 영혼 소환을 시도했던 기록 덕분에 주민등록번호가 저장되어 있었고, 나는 빠르게 다시 불러오기를 시도했다.
[현재 배지영은 수면상태입니다.]
[해당 인물의 영혼을 불러 오겠습니까? YES/NO]
[현재 이지수는 수면상태입니다.]
[해당 인물의 영혼을 불러 오겠습니까? YES/NO]
[현재 박미희은 수면상태입니다.]
[해당 인물의 영혼을 불러 오겠습니까? YES/NO]
[현재 천수연은 수면상태입니다.]
[해당 인물의 영혼을 불러 오겠습니까? YES/NO]
모두 예스!
방 하나에 한 명씩 들어가도록 위치를 설정하고 4명의 영혼을 모두 소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