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7화
역시나 내 예상대로 배지영, 박미희, 천수연은 아주 기뻐하며 내 제의를 수락했다.
1주일 정도의 빡신 괴롭힘을 당한 후에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봐야했다.
이들은 문어괴물에게 빙의한 나에게 엎드려서 절까지 하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도 나름 재미는 있었기에 이들을 해방시켜주려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앞으로 더 재밌는 일들이 무궁무진할 테니까 여기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빠르게 준비해서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최근에는 내가 자주 회사에 일찍 출근해서인지 직원들이 크게 놀라지는 않는 모습이다.
어차피 내 기준에서 일찍 도착했다고 해봤자 남들 다 출근하는 보통의 시간이다.
나는 배지영 일행의 모습을 지켜봤다.
보통 때라면 자기들끼리 모여서 꿈에서 당한 내용에 대해서 심각하게 토론하며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고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각자의 자리에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러더니 거의 동시에 세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 부장에게 다가갔다.
“부장님, 부서이동 신청서 입니다...희망부서는 그냥 무시하시고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부서로 보내주세요...”
“부장님, 저는 오늘부로 퇴사하겠습니다...”
“저도, 퇴사...”
가정이 있는 배지영은 부서이동을 신청했고 박미희와 천수연은 다른 회사를 알아보기로 했는지 퇴사를 희망했다.
당연히 박 부장의 표정이 마구 일그러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건가?”
“그게...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저도...”
“저도...”
보통 부서이동을 신청하거나 퇴사를 하기 한 달 전에 통보를 하고 자신이 하던 업무를 다른 직원에게 인수인계를 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모두 생략해버렸으니 박 부장의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
그리고 세 명이 동시에 이러고 있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세 명이 서로 친한 건 내가 잘 알고 있는데, 이렇게 동시에 부서이동하고 퇴사를 하겠다니, 꼭 짠 거 같은데? 혹시 나한테 불만 있어서 물 먹이려고 작정한 건가?”
“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부장님...”
“이봐, 배 대리, 지난번에 나한테 혼났다고 미희 사원과 수연 사원까지 동원해서 나한테 복수 하는 거지?”
“오해입니다. 부장님!”
배지영이 아무리 오해라고 말해봤자 이미 박 부장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박 부장도 빡쳤는지 빠르게 이년들의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고 축객령을 내렸다.
“배 대리, 다른 부서 가서 얼마나 잘하나 보자고. 내가 우리 부서에 있는 동안 진짜 잘 챙겨줬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그리고 미희 사원과, 수연 사원도 다른 직장에 가거든 사람 보는 눈 좀 키워. 배 대리 같은 사람과 어울려 다니지 말고.”
“......”
진심으로 빡친 박 부장이 자리에 앉아서 썩은 표정으로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세 사람은 슬금슬금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짐을 챙겼다.
박미희와 천수연은 자기 짐을 챙겨서 곧바로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배지영은 아마 하루 이틀 뒤에 부서 이동이 이루어질 것이다.
당연히 늘 인력이 부족한 존나 빡센 부서로 이동하게 될 거다.
일단 박 부장이 존나 열 받았으니까 오늘은 진짜 조심해야지.
박 부장의 오른팔인 김상우 대리도 박 부장의 눈치를 살피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김 대리는 둘 만 알 수 있는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박 부장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고 6시 땡하면 튀자는 뜻이다.
어차피 나야 항상 6시만 되면 칼퇴근했으니 달라질 건 없다.
나는 박 부장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성질이 존나 더럽고 와이프에게 깨지고 온 날에는 광기가 보이긴 하지만 은근히 나를 챙겨주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박 부장 때문에 나의 바로 윗 직급인 최창식 차장 그 개 새끼가 나한테 지랄하고 싶어도 못한다.
이미 박 부장에게 깨졌는데 똑같은 이유로 또 나한테 지랄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최 차장과 사이가 안 좋은 박 부장은 그래도 나를 자기 라인으로 생각하고 최 차장이 손쓰기 전에 먼저 오버액션을 취하며 나에게 지랄하는 거다.
근데 내가 지각도 자주하고 일도 존나 못해서 진짜 빡치는 경우도 있긴 있다.
이 정도는 내가 이해 해줘야지.
결국 박 부장이 나를 회사에서 자른다고 개지랄을 떠는 것도 최 차장에게 보여주기일 뿐, 실제로는 오히려 나를 감싸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대리급보다도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나를 접대 능력이 좋다는 이유를 핑계로 과장자리까지 올려준 거다.
임원들에게나름 인정받고 있는 박 부장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나였다.
임원의 친인척인 최 차장이 박 부장을 어떻게 하고 싶어도 능력으로 인정받고 여기까지 올라온 박 부장을 쉽게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최 차장이 나를 핑계로 박 부장을 살살 건드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박 부장의 스트레스는 나에게로 반사되어 돌아온다.
최창식 이런 개새끼!!!
***
띵동띵동.
6시에 퇴근을 알리는 종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무실에는 컴퓨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집에 갈 생각이 없는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주변을 살피며 아주 조심스럽게 자기 짐을 챙기고 있다.
바로 김상우 대리.
김 대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또 다시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손가락을 말아 쥐고 입안에 털어 넣는 모습이다.
술 한 잔 하러가자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김 대리는 나에게 실망했다는 수신호를 보내고는 사라졌다.
이제 나는 남자 새끼와 단 둘이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얼른 짐을 챙겨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톡을 보내고 지하주차장에서 대기했다.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누군가 내 차 앞으로 걸어왔다.
어두운 지하주차장이 아주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빛이 나는 외모와는 달리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쓰며 톡 쏘아붙였다.
“저 아직 업무 덜 끝났는데, 왜 짐 챙겨서 내려오라고 하신 겁니까?”
“회사일이 중요해? 아니면 보좌관의 일이 더 중요해?”
“......”
“응? 왜 대답이 없어?”
“....보좌관의 업무가 더 중요합니다.”
“잘 인지하고 있으니까 다행이네. 따라와.”
유서연은 한숨을 내쉬며 내 차에 올라탔다.
나는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서 서울시내의 도로 위를 달렸다.
역시나 서울의 퇴근시간은 교통체증이 장난 아니다.
달리는 시간 보다 신호대기를 받아서 서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당연히 짜증이 학 올라왔다.
“씨발, 인간들 진짜 대중교통 좀 이용하지.”
“과장님도 자가용 타시잖아요.”
“그럼, 이렇게 예쁜 유 보좌관을 데리고 버스에 올라타야겠어?”
“저는 상관없어요. 지금까지도 대중교통 이용해서 출퇴근 하고 있으니까요.”
“어? 그게 말이 돼? 출근시간의 그 지옥철에서 이렇게 예쁜 유 보좌관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존나 변태 새끼들이 막 이렇게 이렇게 할 텐데?”
나는 조수석에 앉아있는 유서연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친히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당연히 유서연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아직은 과장님처럼 변태를 만나 본적이 없습니다.”
유서연은 차분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내손을 잡아서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역시 가슴을 한 번 만져봐서 그런지 엉덩이를 이렇게 기습적으로 만진 것 치고는 크게 놀란 반응도 아니었다.
나는 그 뒤로도 신호대기 중일 때 마다 불쑥 불쑥 유서연의 엉덩이를 만지고 가슴도 건드렸다.
그럴 때 마다 유서연이 내 손을 쳐내며 방어를 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내 집념에 감탄했는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저항의 정도는 줄어들었다.
비록 교통체증은 심했지만 나름 즐거움을 느끼며 운전하는 동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 다 왔다. 내려.”
“여기는...”
“여기 바이어들 접대하면서 몇 번 와 봤는데 맛이 괜찮아.”
나와 유서연이 도착한 곳은 외관만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초밥 전문집이었다.
유서연은 이 곳이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자신을 데리고 밥 먹으러 왔다는 사실에 놀란 듯하다.
“밥도 안 먹고 너무 열심히 일만 하는 것 같아서 그러다가 우리 유 보조관이 쓰러지면 나만 손해잖아.”
“......”
조금 감동 한 걸까?
나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유서연을 데리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유서연은 내가 안내하는 방안으로 들어와서 또 한 번 놀랐다.
독방에 한상 가득 차려진 코스요리를 보고는 내가 이미 예약을 했음을 알아차렸다.
“미리 예약했어요?”
“그럼 예약도 안했는데 이렇게 준비가 되어있겠어?”
“좀 의외네요.”
“배고파 죽겠으니까 빨리 앉아.”
아직도 자리에 앉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유서연을 뒤로 한 채 내가 먼저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유서연도 천천히 자리에 앉아서 조금씩 음식을 덜어갔다.
초밥 한 점을 집어먹은 유서연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대충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생각보다 맛있지?”
“식당이 화려해서 맛있을 것 같기는 했는데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어요.”
하긴, 유서연은 자기 돈 주고 이런 곳에 와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유서연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는데 굳이 자가용이 필요 없다고 면허증을 딸 생각조차 없고, 회사에서 제공되는 비품들도 얼마나 알뜰하게 사용하는지 모른다.
옷차림을 보더라도 싸구려는 아니지만 딱 적당한 가격의 브랜드를 선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얼굴이 예쁘고 몸매도 좋아서인지 옷이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효과가 있다.
단정한 옷차림만큼이나 차분하게 식사를 하던 유서연은 나의 시선에 젓가락질을 멈췄다.
“불안하게 또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그냥 우리 유 보좌관이 너무 예뻐서 넋 놓고 보는 중.”
“그럼 보기만 하세요.”
유서연은 짧은 대답 한마디를 남기고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룸이니까 나는 대놓고 유서연의 얼굴과 몸매를 감상하며 젓가락을 놀렸다.
유서연도 이제 이런 내 시선 따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계속 식사를 했다.
하지만 내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유서연의 평점심이 깨졌다.
“옆자리로 가서 앉아도 돼?”
“쿨럭...쿨럭...서로 불편하게 왜 제 옆자리에 앉으려고 합니까?”
“나는 안 불편 해. 오히려 유 보좌관의 옆 자리가 더 편할 것 같은데.”
“두 사람이 식사를 할 때는 원래 서로 마보는 자리에서 대화도 나누면서 먹는 게 예의입니다. 접대 전문이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어차피 유 보조관은 나랑 대화를 안 하잖아?”
“...대화 할 테니까, 그냥 거기 앉아서 식사하세요.”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면 좋을까?”
“과장님이 말씀하시면 제가 대답할게요.”
“뭐든지 다?”
“이상한 질문은 사양합니다.”
“남자랑 성관계 경험은 있어?”
“대답할 가치가 없네요.”
“3사이즈는?”
“제가 대답 안 해도 과장님 정도면 눈으로 대충 봐도 알 것 같은데요?”
“학창 시절에 남자들에게 인기 좋았어?”
“네, 많이 좋았습니다.”
“그 남자들이랑 섹스도 했겠네?”
“강 과장님, 차라리 그냥 제 옆자리에 앉으세요. 전 조용히 식사만 할게요.”
나와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느꼈는지 유서연은 한숨을 내쉬며 그냥 자신의 옆자리로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나를 무시하듯 앞만 보고 식사를 했다.
그렇다고 나도 조용히 식사만 할 수는 없지.
나는 오른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며 열심히 초밥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할일 없는 왼손으로는 테이블 밑에서 유서연의 허벅지를 쓰담쓰담했다.
유서연은 내 손을 뿌리치며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꼭 밥 먹으면서까지 이렇게 해야 되나요?”
“그럼 밥 안 먹을 땐 해도 돼?”
“.......”
“아니면 여기서 내가 바지랑 팬티 벗을 테니까 유서연 보좌관이 손으로 해 줄래?”
“여, 여기서요? 미친...”
“거 봐. 나는 지금 엄청난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나는 자신 있게 허리를 펴서 정장바지 위로 불룩하게 솟아 오른 내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유서연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앉으세요.”
유서연은 그 뒷말을 따로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내 왼손이 바쁘게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유서연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 했다.
젓가락질이 제법 빨리진 걸 보니, 빨리 식사를 마치고 나가고 싶은 듯 했다.
초밥이 워낙 맛있기도 하지만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식사는 빨리 끝났다.
유서연은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 진 내 손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강 과장님, 오늘 저녁식사 정말 잘 먹었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집에는 그냥 택시타고 갈 테니까 안태워 주셔도 됩니다.”
아직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룸에서 나가려는 유서연에게 나는 살짝 화가 난 음성으로 말했다.
“유 보좌관, 내가 나름대로 배려해주려고 노력하는데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죄송합니다.”
영혼을 담은 나의 연기력에 유서연이 많이 당황한 듯 나에게 사과를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목을 가다듬고 할 말을 했다.
“유 보좌관의 퇴근은 내가 결정해. 알았어? 그게 싫으면 당장 내 보좌관 그만 두고 몽신님께 원래 받기로 했던 처벌을 받아. 나도 빠르게 새로운 보좌관을 뽑아달라고 요청할 테니까”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처벌을 강조하며 겁을 주자, 유서연은 확실히 겁을 먹은 듯 움츠려들었다.
그 모습에 만족한 나는 화난 표정을 풀고 차분하게 말했다.
“자, 그럼 저녁도 든든하게 먹었으니까 이제 2차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