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1화
요즘 나는 거의 지각을 하지 않고 근태가 아주 좋은 상태다.
그래봤자, 그 기간이 1주일 밖에 되지 않지만이 정도만 해도 직원들은 나를 세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특히 박 부장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최근에 최창식이 결근하면서 기분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더불어 자신의 왼팔이자, 아킬레스건인 내가 살짝 달라진 모습을 보였더니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인다.
덕분에 다른 직원들도 훈훈한 사무실 분위기에 취해서 앞으로도 제발 지금처럼만 하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과장님, 여기 커피.”
“고마워요. 서연 씨, 잘 마실게요.”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유서연이 나에게 모닝커피를 대령했고 나는 주변의 시선도 있으니 평소처럼 존댓말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유서연은 나의 이런 가식적인 모습에 별다른 감흥도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주변에서는 아직도 아침마다 나에게 커피를 타다주는 유서연의 모습에 그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다.
도대체 내가 유서연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기에 매일같이 영업부의 퀸카 유서연이 저렇게 행동할까.
특히 남자 직원들의 시선에서는 나를 부러워하는 게 확 느껴졌다.
이런 시선을 받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면서 어깨가 슥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고 부장님이 지시한 업무를 시작했다.
나는 일하면서 틈틈이 고개를 돌려서 유서연을 바라봤다.
그런데 평상시 미친 듯이 업무에 몰두하는 그녀답지 않게 멍때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오늘 밤에 몽신과 만나게 될 거라는 내말을 들은 후부터 줄 곧 저런 상태다.
저러니까 더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과연 몽신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띠동 띵동.
유서연에 대한 생각을 하는 동안 벌써 오전이 끝나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종소리에 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서연의 모습을 보고는 얼른 톡을 보냈다.
내가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유서연의 휴대폰에서 알림음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곧 바로 확인했다.
[유 보좌관, 오늘 점심은 나가서 먹자. 내가 먼저 나갈 테니까 5분 후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유서연은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유서연은 비밀리에 사내연애를 하듯, 몰래 지하주차장에 있는 내차에 탑승해서 밖으로 나갔다.
회사 주변에도 맛집이 많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직원들의 눈에 띌까봐 다른 동네까지 이동했다.
그렇게 찾아간 식당은 지난번처럼 특별히 비싼 곳이 아니었다.
여유를 부릴 정도로 점심시간이 넉넉하지도 않고 유서연의 심각한 표정을 봐서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적당히 손님이 있어 보이는 곰탕집으로 들어간 나와 유서연은 자연스럽게 가장 구석진 곳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도 유서연은 그저 멍하니 있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오늘 몽신님을 본다고 생각 하니까 긴장돼서 그래?”
“아닙니다.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나를 보좌해야할 보좌관의 상태가 영 별로니까 나까지 피해보잖아.”
“아, 죄송합니다...뭐 시키실 일이라도...?”
“담배가 떨어져서 오전 쉬는 시간에 심부름 좀 시키려고 하다가 유 보조관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보여서 그냥 내가 다녀왔어.”
“그냥 시키셔도 되는데...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는 유서연과 크게 중요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냥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주문했던 곰탕이 나왔다.
하지만 유서연은 입맛이 별로 없는지 반도 안 먹고 남겼다.
일단 그래도 식사는 끝난 것 같으니까 나는 유서연에게 나름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유 보좌관, 처음 몽신님을 만났을 때처럼 막말하면 큰일 난다. 무조건 예의를 갖춰.”
“그땐, 몽신님이 저를 성추행해서 그런 겁니다.”
“꿈속에서 몽신님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정당성을 찾는다거나 평가하려고 하지 마. 그게 싫다면 너를 몽신님과 대면시킬 수 없다.”
“....명심할게요.”
“몽신님의 물음에 거짓없이 모든 것을 답변할 것, 절대 말대답 하지 말 것, 예의 있는 말투를 사용할 것.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지켜야 돼. 너도 한 번 만나봐서 알겠지만 몽신님의 성향은 결코 좋은 쪽이 아니다. 그리고 너로 인해 몽신님이 분노하면 나 역시 처벌을 받게 된다고 말했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심할게요.”
“그럼 됐어. 밥 다 먹었으니까 이제 사무실 들어가자.”
내 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유서연은 시종일관 창밖을 바라볼 뿐 나와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몽신을 대면할 때 긴장 좀 하라는 의미로 겁을 줬으니, 나도 오늘 하루 정도는 무게를 좀 잡고 있어야지.
유서연은 사무실에 도착하고 업무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업무에 집중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6시 정각에 유서연과 나는 함께 퇴근준비를 했다.
어차피 나는 항상 이 시간에 퇴근을 하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유서연은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한다고 부장님에게 가서 인사까지 하고 왔다.
씨발, 업무시간이 끝나고 퇴근하는데도 상사에게 허락 비슷하게 인사를 해야 하는 이 더러운 현실 때문에 욕이 저절로 나온다.
이제 내차를 타는 게 제법 익숙해진 유서연은 내가 집에 태워다 준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고 바로 탑승한다.
오히려 내가 태워주길 기다렸다는눈치다.
확실히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는 것 보다는 내차를 타고 가는 게 편하긴 하겠지.
이번에도 별다른 대화 없이 나는 운전에만 집중했고 금세 유서연의 오피스텔앞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유서연은 차가 멈추자마자 안전벨트를 풀고 한 줄의 인사만 남기고 가려고 했다.
나는 그냥 보내기가 너무 허전했다.
“잠깐만.”
“네?”
“오늘 유 보좌관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내가 오늘 엄청 배려 해준 거 알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충전 한 번 정도는 해주고 가지 그래?”
유서연은 내 말에 잠시 멈칫 하더니 눈을 감고 얼굴을 내 쪽으로 가져왔다.
결국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며 안겨왔다.
어?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라 가슴을 만지는 거였는데...
뭐, 그래도 나쁘진 않다.
그리고 가벼운 뽀뽀가 아니라 내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으며 나름 농도 짙은 키스를 했다.
“충전 좀 됐어요?”
“집에 갈 수 있을 정도까지는 충전했어. 조심해서 들어가.”
유서연은 담담하게 말하는 척 했지만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내 대답을 듣고는 빠른 걸음으로 오피스텔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도 내가 밖에서 담배를 한 대 피고 있을 때, 그녀는 창문을 열어서 그런 내 모습을 지켜봤다.
지난번에는 잠시 창문으로 내 모습을 지켜보다가 닫았는데, 지금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결국 담배를 다 피우고 차에 오르고 시동을 걸고 나서야 그녀는창문을 닫았다.
왜 계속 내가 갔는지 확인 하는 거지?
남자들의 이런 행동이 여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궁금증도 아주 잠시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천둥소리보다도 크게 들리는 내 차의 엔진 소리다
무슨, 경운기도 아니고 털털거리는 소리가 나지?
이제 내 차에도 슬슬 여자를 태우는 일이 자주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좋은 차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 팔리면 존나 좋은 외제차 한 대 살까?
처음에 8년 된 중고차를 사서 대충 7년 정도 탔으니까, 벌써 15년이 지난 차량이다.
사람으로 치면 고령의 나이니까 뼈마디에서 소리가 날만도 하지.
확실히 차를 바꾸긴 바꿔야 하는데 가격대는 일단 아파트가 팔리면 생각하기로 했다.
***
꿈속으로 들어온 나는 또 다시 새로운 [지형]을 불러와서 여기저기를 고치기 바빴다.
내 옆에는 민지가 착 달라붙어서 내가 뭘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민지의 눈에는 그저 허공에서 뭔가 휙휙 튀어나오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는 모양이다.
“오빠, 여긴 또 어떤 함정을 만들 거예요? 대상은 누구에요?”
“여긴 그런 용도 아니다.”
민지는 이제 내가 뭔가를 만들거나 하면 무조건 누구를 괴롭히기 위한 작업으로 생각한다.
내 대답에 민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상당히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더니 내가 만들고 있는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꼭 무슨 신전 같은데요?”
“신전 맞아. 인터넷에서 찾은 유적지거든.”
“아, 그렇구나. 그런데 신전은 갑자기 왜요?”
“너를 제외하고 꿈에서 나를 만난 사람은 모두 내가 신이라고 믿고 있잖아.”
“아! 여기가 몽신을 위한 신전이구나.”
“화려한 호텔방이나 현대식 건물 보다는 그래도 이런 게 좀 있어 보일 것 같아서.”
“처음에는 재미삼아 잠시 놀려는 거라고 하더니, 지금 보니까 꽤 심취한 것 같네요?”
“어, 이거 생각보다 존나 재밌어.”
현실에서 불러온 유적지의 모습은 너무 낡고 오래된 모습이라서 손 봐야 할 곳이 제법 많았다.
민지는 역할놀이에 심취한 나를 위해서 신전 꾸미기에 적극 동참했다.
확실히 나보다 민지의 예술적 감각이 훨씬 뛰어났다.
비록 민지의 역할은 그림을 그려서 나에게 보여주는 정도였지만 나는 최대한 비슷한 형상들을 찾거나 내가 직접 만들어서 장식했다.
몇 시간이나 고생해서 재탄생한 신전의 모습은 웅장하면서도 경건함이 물씬 풍겼다.
“제법 괜찮은데?”
“아 힘들어...”
“수고했어. 이제 민지 너는 호텔방으로 가서 쉬어.”
이제 슬슬 유서연의 영혼을 신전으로 소환시킬 준비를 하고 민지는 호텔방으로 이동시켰다.
나는 아직까지는 내 원래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어서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서 빙의하기로 했다.
어떤 모습이 좋을지 살짝 고민된다.
무서운 모습이 좋을까?
아니면 신비한 컨셉이 좋을까?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모습은 바로영물.
일단 백호를 복제해서 크기를 약 5미터 정도로 키웠다.
그 외 이빨과 털의 모양을 수정해서 상상속의 영물처럼 꾸몄다.
나는 완성된 백호를 세워두고 찬찬히 살펴봤다.
일단, 크기에서 반은 먹고 들어가서 보는 순간 움찔하게 된다.
그리고 밖으로 삐져나온 기다란 송곳니의 모습 때문에 조금 험악한 이미지도 풍기면서 은백색의 털 때문에 신비함도 느껴졌다.
여기까지!
더 이상은 이 짓도 못해 먹겠다.
이미 시간도 제법 늦어서 빨리 유서연을 소환하기로 했다.
[현재 유서연은 수면상태입니다.]
[해당 인물의 영혼을 불러 오겠습니까? YES/NO]
예쓰!
파스스
어김없이 들려오는 효과음과 함께 내 앞에 유서연의 모습이 생겨났다.
잠옷이 아니네?
유서연은 정장까지는 아니지만 깔끔한 외출복 상태였다.
내가 낮에 식당에서 예의를 갖추라고 했던 것 때문인 듯 했다.
백호의 몸에 빙의한 나는 유서연의 영혼이 동기화 될 때까지 기다리며 지켜봤다.
유서연은 옷만 차려입은 게 아니라 평소 회사에서 머리를 묶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풀어서 스타일링까지 했다.
회사에서 보는 평소의 모습도 정말 예쁘지만 지금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가 유서연의 모습을 감상하는 사이에 그녀는 동기화가 이미 끝나서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몽신님....?”
“그렇다. 지금까지 죗값을 치르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서 나를 대면하는 경우는 대리자를 제외하고 네가 처음이다.”
“정말 죄송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창조한 백호의 모습에 기가 눌린 건지, 내가 점심시간에 주의를 주었던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유서연은 나와 대화를 나누는 지금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말투 역시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가하지도 않고 사사로운 부탁 따위로 이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허나, 대리자가 처음으로 나에게 부탁이란 것을 했기에 특별히 들어준 것이다.”
“몽신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대리자님의 보좌에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어디 한 번 말해보라.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는지 말이다.”
나는 최대한 목을 가다듬고 경건한 말투로 그 이유를 물었다.
유서연은 무릎을 꿇고 있던 상태에서 자세를 더욱 엎드리며 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갑자기 유서연이 왜 저러나 싶어서 뭐하는 건지 물어보려는 찰나에 그녀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대답이 들려왔다.
“엄마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제발 엄마를 만나게 해주세요!”
이건 도대체 뭔 소리야?
엄마가 어디 해외라도 나가있는 모양이네.
그럼 그냥 전화를 하든지 아니면 화상통화를 하면 될 것을...
겨우 한다는 소리가 꿈에서 엄마의 영혼을 소환시켜달라는 유서연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살짝 화가 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를 만나고 싶어 해서 무슨 대단한 말을 할까 내심 궁금했는데 겨우 그런 시답지 않은 부탁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엄마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엄마는...이미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요즘 돌아가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습니다....흑흑...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발 엄마를 만나게 해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아, 이거 뭔가 좆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충 부탁을 핑계 삼아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거의 불가능, 아니 무조건 불가능한 미션이 떨어졌다.
설마,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달라고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