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26화
[영혼의 쉼터]라는 미친 시스템이 내 꿈속에 자리잡고부터 많은 변화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아침에 특별히 알람을 맞춰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
다른 대상의 영혼에는 불가능 하지만 내 수면상태에 자극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그 방법으로 나는 정확히 6시 30분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내 팔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유서연을 바라봤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린 나는 내가 베고 있던 베개로 받쳐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서연은 어제 상당히 무리를 해서 피곤한지 내가 일어나는 기척소리에도 흔들림 없이 잘 자고 있다.
이 오래된 아파트에는 욕실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회사에 늦지 않으려면 일단 한 사람이 먼저 씻어야한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엄청 지저분하게 다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깔끔떠는 편도 아니라서 대충 머리를 감고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왔다.
욕실 사용을 끝마친 나는 유서연을 깨우기 위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가 일어나면서 봤던 그 자세 그대로 자고 있었다.
아직도 완전 한 밤중인 듯 보였다.
일단 조심스럽게 흔들어 봤다.
유서연은 잠시 몸을 비틀며 일어나는가 싶더니 반대로 다시 돌아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일어나. 너 그러다 지각한다.”
나는 유서연의 몸을 좀 더 크게 흔들며 다시 깨웠다.
“으음...5분만 더...”
“너 연속 3일 째, 지각하면박 부장한테 완전 찍히고 지금까지의 모범 이미지 다 망가져.”
“우우움...5분만 더...”
지금 유서연의 귀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휙 잡아당겨서 뺏었다.
그리고 팬티바람으로 자고 있던 그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찰싹 찰싹.
“아앗...”
“잠이 확 깨지?”
“아...우리집이 아니구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유서연은 눈이 살짝 풀려서 아직 잠이 덜 깼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평소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몇 시에요...?”
“7시 다 되가.”
“그렇게 늦은 건 아닌 것 같은데...10분 만 더 누워 있으면 안 될까요?”
유서연은 지금 습관처럼 자기가 사는 오피스텔에서 회사까지의 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아파트에서 회사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고 차도 막히는 구간도 많아서 서둘러야 한다.
나는 이런 설명을 하는 것 보다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다.
“잠이 한 방에 확 깨는 침 놔줄게 누워봐.”
“아, 아니에요! 저 잠 다 깼어요!”
나는 바지와 팬티를 벗고 아침부터 빨딱 서 있는 내 자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딱 한마디 했을 뿐인데, 유서연은 기겁하며 욕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욕실에서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처럼 대충 머리감고 세수만 하는 게 아니라 샤워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시간이 더욱 촉박해진다.
나는 곧바로 유서연이 샤워하고 있는 욕실로 가서 문을 열었다.
벌컥.
“어어...!”
유서연은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더니 살짝 당황했다.
나는 유서연의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욕실에 달려있는 수납장을 열고 새칫솔 하나를 꺼내어 치약까지 짜서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 하나도 옆에 걸어두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시간 없으니까 샤워 빨리 끝내고 나와. 우리집에서 회사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니까.”
끄덕끄덕.
칫솔을 비롯해서 수건까지 이것저것 챙겨주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유서연은 서둘러야 한다는 내말에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행동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유서연이 씻고 나올 동안 그녀의 옷가지를 챙겨서 욕실 앞에 준비 해 두었다.
역시나 그녀는 욕실 문을 열고 나와서 내가 정리해서 가져다 놓은 옷을 보고는 또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꾸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옷 입고 나가자.”
“아, 네...”
유서연은 내 차에 타서 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슬쩍 유서연을 본다고 봤을 때 유서연도 나를 보다가 딱 눈이 마주쳤다.
그때서야 그녀는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어제는 저를 완전 성노예 취급할 것처럼 겁주더니 왜 이렇게 친절해요?”
“그게 신기해서 아침에 계속 멍때리고 있었어?”
“네, 불안하잖아요.”
“바빠서 그런 것도 있고...”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요?”
“원래 사람 심리가 다 그래. 갖고 싶은 걸 가지지 못했을 때는 욕망에 불타오르지만, 실제로 갖게 되었을 때는 여유가 생기는 법이지. 그리고 내 건 소중하니까.”
“다행이네요.”
“그렇다고 선을 넘지는 마라.”
“네. 그건 말 안 해도 잘 압니다.”
예전 모습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서연의 표정이 어제 저녁보다는 많이 풀어졌다.
민지를 교육시키면서도 느꼈지만 이건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딜레마다.
내 성적취향은 역시 강제물이지만, 이게 반복되거나 너무 심해지면 그 여성은 삶의 의욕을 상실한 나머지 아무런 반응도 없어지고 그냥 기계적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변한다는 거다.
최소한의 숨구멍은 막지 않으면서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
민지의 경우는 스스로 그 숨구멍을 찾아서 확장공사를 제대로 해버렸다.
이제는 나를 자기 애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운이 좋은지 차가 움직일 때 마다 신호가 척척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10분 정도 일찍 회사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나는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유서연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과장님은 안 올라가세요?”
“나는 밖에서 담배 한 대 피고 올라 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서 내 자리에 커피 한잔 타서 올려 둬.”
“네, 그럼 저 먼저 올라갈게요.”
유서연은 내 차에 내리기 전에 창문으로 혹시나 주변에 우리 부서의 직원들이 있는지부터 살피고 내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재빨리 내려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나도 대충 짐을 챙겨서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담배를 사기 위해 회사 바로 앞에 위치한 편의점에 들어갔다.
와, 씨발 무슨 줄이 이렇게 길어?
여유시간이 10분밖에 없어서 빠르게 담배 한 대 피고 들어가려고 했더니 망한 것 같다.
그때, 내 눈에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김상우 대리였다.
거의 계산대 코앞에 줄 서 있는 김 대리를 발견한 나는 아주 반갑게 달려가서 인사부터 했다.
“여어~김 대리 좋은 아침.”
“어? 강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계산할 때 내 담배도 좀 부탁할게.”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혹시 박 부장님 보셨어요?”
“어? 박 부장을 왜 나한테서 찾아?”
“부장님 밖에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오늘 제 차타고 같이 왔거든요.”
“오오 그래?”
이 시간에 이렇게 밖에서 박 부장을 만나면 나름 계 탔다고 볼 수 있다.
담배를 몇 모금 빨고 급하게 뛰어가려던 나는 나름 여유를 되찾고 밖에 기다리고 있을 박 부장님을 찾으러 갔다.
김 대리 말대로 편의점 건물 구석탱이에 박 부장이 휴대폰을 보며 서 있었다.
“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어, 그래, 강 과장...근데 제발 밖에서는 쪽팔리니까 좀 조용히 인사 하지?”
“아, 죄송합니다. 습관이 돼서...”
내가 박 부장과 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에 김 대리가 담배를 사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박 부장님, 담배 여기 있습니다. 강 과장님 것도 여기요.”
“수고했어. 김 대리. 얼른 한 대만 피고 들어가도록 하지.”
원래라면 박 부장도 이렇게 업무시간이 다돼 갈 때는 밖에서 여유를 부리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 덕분에 이런 짬이 생겼다.
바로 최창식 그 개새끼가 퇴사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최창식이 박 부장의 작은 꼬투리 하나라도 잡기 위해서 혈안이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 누구보다 근태에 신경을 썼었다.
그런데, 최창식이 없는 지금 박 부장 정도의 짬밥이 10분 정도 늦게 사무실에 들어간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임원들의 사무실은 층이 다르니까.
확실히 최근에는 내가 지각도 잘 안하고 최창식도 없어지니까 나를 대하는 박 부장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조금 인상이 안 좋은 것 같다.
분명 내가 실수하거나 한 건 없는데, 다른 이유인가?
나는 궁금한 건 절대 못 참기 때문에 결국 넌지시 박 부장에게 물었다.
“박 부장님,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말씀만 하시면 제가 해결 해 보겠습니다.”
나는 아주 믿음직스러운 말투로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박 부장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최 차장이 퇴사하고 그 자리에 누가 오기로 했는지 알아?”
“아직 못 들었습니다만...”
“후우, 진세희가 차장으로 진급하면서 우리 부서로 발령 났다.”
“진세희....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어휴, 강 과장 동기였잖아. 그것도 기억 못해?”
“아! 저와 영업부에 같이 입사했었던 진세희 말이군요?”
“그래, 2년 있다가 다른 부서로 가서 좋아했는데...말도 안 되는 속도로 진급해서 다시 우리 부서로 온단다.”
한숨 섞인 박 부장의 말을 다시 김 대리가 이어 받았다.
“최창식 차장이 퇴사하니까, 그 자리에 또 임원 친인척이 들어오네요. 제가 듣기로는 최창식 그 인간보다 더 지랄맞은 성격이라고 하던데 진짠가요?”
“말도마라. 그래도 최창식은 내가 작정하고 대응하면 움츠리기는 했는데, 진세희 그년은 아주 부사장 믿고 눈에 뵈는 게 없다. 소문 들어보니까 우리 부서에 있을 때 보다 지금은 더 심하다고 하더라.”
부장님과 김 대리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도 예전 생각이 슬슬 떠오른다.
나와 동기였던 진세희라는 여사원이 있었는데, 2년 만에 대리로 진급해서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부사장의 친척이란다.
동기이긴 하지만 나와는 크게 접점이 없었고, 오히려 그 당시 진세희는 과장급 이상의 짬밥이 있는 사람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던 것 같다.
물론, 제법 큰 다툼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나면 그 사람들은 짐을 싸거나 다른 부서로 이동되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굳건히 지금의 자리를 지켜낸 사람이 바로 박명호 부장이다.
진세희와 가장 많은 트러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유능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박명호 부장은 앞으로 진세희 차장과 함께할 생각에 스트레스가 올라오는지 줄담배를 피웠다.
어? 씨발, 잘못하면 박 부장의 스트레스가 나한테 오겠는데...
최창식이 없는 며칠 동안 정말 내 눈에 박 부장은 천사였다.
그런데 곧 다시 악마로 변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씨발! 박 부장이 악마로 변하기 전에 내가 먼저 진세희 그년을 조져야 돼.
선빵필승은 모든 게임의 정석이니까.
***
박 부장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온 나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고 유서연에게 시선을 고정 했다.
그녀는 나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하긴, 며칠 동안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으니 밀린 업무도 많을 테지.
그녀가 일에 집중 할 수 있도록 오늘은 쉬는 시간에 비상계단으로 불러내지도 않고 점심도 밖에서 먹자고 하지 않았다.
나도 오늘은 부장님이 특별히 요청한 자료를 만든다고 꽤 바쁘다.
거의 한 달 만에 업무로 인한 잔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오전에 바로 제출하라는 부장님의 특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6시가 되었을 때 퇴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크게 억울하지는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일에 빡집중을 해서 그런지 직원들이 하나 둘 씩 퇴근하는 줄도 몰랐다.
내 앞에 누군가 다가왔을 때 나는 겨우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과장님 퇴근 안하세요?”
“어...? 다들 어디 갔어?”
“전부 퇴근하고 과장님이랑 저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헉! 벌써 11시라고?”
“네, 저도 이제 밀린 업무 다 끝났는데, 과장님은 아직 멀었어요?”
“하아, 아직 좀 더 남았는데...”
“그럼 저도 남아서 기다릴게요.”
유서연은 커피를 타 와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도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후아~ 이렇게 늦게까지 일 해보는 게 진짜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많이 피곤해 보여요.”
“흐아~ 미칠 것 같아. 유 보좌관이 충전 좀 해 줄래?”
“충전이라면...”
“여긴 CCTV 있으니까, 17층 비상계단으로 가자. 티슈도 챙겨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