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3화
이지수는 적당히 예쁜 외모와 특유의 사교성을 주무기로 영업팀 내에서 남녀 가리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남자 직원들은 원래 접근이 크게 어렵지 않고, 여직원들에게도 나름 이유는 있다.
유서연처럼 질투가 날 정도로 예쁘지 않으면서 같이 다니기에는 창피하지 않을 정도의 준수한 외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상대의 기분을 잘 파악해서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센스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지수에게도 그 동안 소문이 무성한 진세희 차장을 상대로 강민철이 제시한 미션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단지 친해지는 것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게 그녀의 신분증을 복사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단 3일 만에 해야 한다는 제한이 걸려있다.
‘하아, 3일 만에 어떻게 진세희 차장의 신분증을 빌릴 수 있을까...’
이지수는 업무에 집중도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해서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이다.
‘3일 안에 못하면 꿈에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성공해야 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듯, 일단 이지수는 진세희 차장과 친해지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띵동 띵동.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지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지수는 바로 자신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진세희 차장에게 다가갔다.
“차장님, 이지수 대리라고 합니다. 아침에 인사는 드렸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기억합니다. 그런데 무슨일이죠?”
“아, 그냥 식사 같이 하러 가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잘됐네요. 안 그래도 아직 친한 사람이 없어서 혼자 구내식당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나갑시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앗, 염치불구하고 사주시면 잘 먹겠습니다.”
“사교성이 좋네요.”
“그냥 수다 떠는 걸 워낙 좋아해서요.”
일단 진세희 차장은 자연스럽게 같이 식사하자는 이지수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지수는그저 구내식당에서 같이 식사하면서 조금씩 친해질 생각으로 다가갔는데 이렇게 밖에서 식사를 하면 더 빠르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시작은 좋아.’
하지만 순조로운 시작 치고는 그 이후로 큰 성과가 없었다.
나름대로 대화도 많이 나누고 어색함은 많이 없어졌지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신분증을 빌려야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이지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다음 날 역시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하지만 둘 째 날 역시 이지수는 초조하기만 했다.
더구나 진세희 차장이 강민철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장면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아...진짜 큰일이다. 어떡하지...과장님의 기분이 엄청 안 좋아 보이는데, 내가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내일 까지 신분증 사본을 가져가야 해...’
결국 아무 성과 없이 3일 째 되는 날이 다가왔고, 이지수는 미칠 것 같았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쉬는 시간에 휴게실에 들러서 커피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휴게실에서 진세희 차장을 만났다.
“차장님, 커피 뽑아드릴까요?”
“한 잔, 부탁해.”
그래도 3일 동안 열심히 친해진 덕분에 진세희 차장이 이지수에게 말을 놓을 정도로 가까워지긴 했다.
점심 때 얻어먹은 게 많아서 이지수는 자신의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어 진세희 차장의 커피를 뽑아 주었다.
두 사람은 커피를 홀짝 홀짝 마시며 사무실 직원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정확히는 진세희 차장이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말하면 이지수가 대답을 하거나 리액션을 했다.
“박명호 부장과는 어차피 악연이니까 그렇다 치고, 강민철 과장, 그 자식 정말 맘에 안 든단 말이야.”
“저기, 차장님은 뭐 때문에 그렇게 강 과장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세요?”
“나와 강 과장이 동기인 건, 들어서 알고 있지?”
“네, 이미 사무실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은근히 동기라고 나를 상사처럼 보지 않는 것 같단 말이야. 눈빛을 보면 다 알아. 그리고 능력도 없으면서 더러운 잔재주로 과장이 됐다는 사실이 너무 불쾌해.”
대부분의 직원들이 진세희 차장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실력보다는 부사장의 후광 덕분에 진급했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사장의 친인척이라는 사실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태생을 마치 권력인 것처럼 여겼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접대능력으로 과장까지 올라온 강민철이 너무 한심하고 더럽게 보였던 것이다.
‘강 과장님이 들으면 엄청 화를 내시겠지만, 그래도 진세희 차장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해야지. 숨기다가 걸리면 더 큰 벌을 받을지 모르니까...’
이지수는 진세희가 했던 말을 그대로 강민철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당연히 겉으로는 진세희의 말에 동의하는 척 하며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곧 쉬는 시간이 끝날 것 같은데 그만 들어가지.”
“네, 차장님.”
진세희 차장과 함께 사무실로 향하던 이지수는 여전히 어떻게 하면 신분증을 빌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진세희 차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이지수에게 말을 걸었다.
“이지수 대리.”
“네, 차장님 말씀 하세요.”
“나는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갈 테니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아무생각 없이 알겠다고 답하려던 이지수는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가 번쩍 하고 지나갔다.
“아닙니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화장실에서 나오면 같이 들어가요. 백은 저한테 맡기시고 다녀오세요.”
“아무리 부하직원이라지만 화장실 앞에서 백 들고 있게 하는 건 실례인데...”
“에이, 연속 이틀이나 비싼 점심 사주셨는데 이 정도가지고 뭘 그러세요. 얼른 다녀오세요.”
“그럼 좀 부탁할게. 나도 그냥 화장실에 들고 들어가고 싶은데 워낙 신상이라서 솔직히 좀 찝찝하긴 했거든.”
엄청난 고가의 신상 백을 넘겨받은 이지수는 진세희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미친 듯이 사무실로 달려왔다.
그리고 자기 자리에 앉아서 몰래 그녀의 백에서 지갑을 찾았고 신분증을 꺼냈다.
다시 주변을 살피고는 빠르게 복사기로 진세희 차장의 신분증을 복사했다.
그 뒤로 이지수의 행동은 더욱 빨라졌다.
후다닥 원래대로 신분증과 지갑을 넣어두고 화장실로 달렸다.
숨이 차지만 진세희 차장이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에 도착해야했다.
“하아..하아...”
“이지수 대리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차장님 백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자. 쉬는 시간 끝난 지 5분이나 지났네.”
이지수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얼른 진세희 차장에게 백을 넘겨주었다.
그렇게 이지수는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강민철의 미션을 완수하고 속으로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에 쉬는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렇게 강민철에게 큰소리를 쳤던 진세희는 지금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면 전혀 개의치 않는 게 확실해 보였다.
처음부터 진세희는 5분 늦었다는 이유 때문에 강민철에게 그런 모욕을 준 것이 아니다.
그냥 꼬투리를 잡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다.
이지수와 진세희가 휴식 시간이 지난 후에 사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강민철 과장이었다.
이지수는 그런 강민철의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생각했다.
‘얼른 신분증 사본을 주고 와야겠어.’
***
퇴근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사무실에 울렸지만 역시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직원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나는 퇴근준비를 하면서 가방을 챙겼다.
그런데 그때 나보다 한 발 앞서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물이 보였다.
바로 진세희 차장.
“먼저 퇴근합니다. 다들 수고하세요.”
도둑고양이마냥 조용히 일어나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인사까지 하고 갔다.
박 부장이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혀를 몇 번 차고는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때문에 잠시 숨죽이고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다시 퇴근할 타이밍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내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저기, 과장님 이거...”
“뭔데?”
“저한테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이지수가 나에게 서류더미를 건네주었다.
나는 이런 업무자료를 요청한 적 없었기에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서류더미의 가장 아래에 낱장의 종이가 하나 보였다.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다.
그나저나 참 재주도 좋다.
그냥 던지듯이 했던 말인데 정말 3일 만에 진세희의 신분증 사본을 확보할 줄이야.
“수고했어. 가봐.”
“네.”
이지수는 나에게 볼일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해서 함께 전달된 서류더미들은 대충 책상위에 던져놓고 진세희 차장의 신분증 사본만 내 가방에 챙겨 넣었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박 부장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얼른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진세희의 주민등록번호를 확실히 암기하고 꿈속으로 들어온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 괴롭힐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지영과 마찬가지로 몽신의 이름을 빌릴까 생각도 했지만, 뭔가 그 정도로는 화가 풀릴 것 같지 않는다.
내가 강민철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인지하는 상태에서 존나 괴롭히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아무리 현실에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때봤자, 나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진세희가 현실에서 나를 존나 갈굴지도 모른다.
감히 그럴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망가뜨려 버릴까?
나의 이런 고민은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다.
정말 희박한 확률이겠지만, 진세희가 엄청난 멘탈을 소유하고 있어서 어떻게든 내 고문을 버텨내고 현실에서 복수하면 나 역시 피곤해 질지도 모른다.
이런 내 고민을 꿈속 시스템이 감지했는지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다.
이 메시지가 주는 의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설레기도 하면서 짜증을 같이 유발하는 이 메시지의 정체는 역시나 유료 업그레이드에 관한 공지사항이다.
[영혼들의 존재감을 조절 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면 메시지를 클릭 해 주세요.]
딱 봐도 존나 재밌는 내용인 것 같은데, 업그레이드 비용이 얼마일지 겁부터 났다.
[현재는 모든 영혼들의 존재감은 100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면 수치를 낮추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존재감이 낮아질수록 현실에서 다른 영혼들로부터 잊혀 집니다.]
[단, 존재감이 낮은 영혼에 대한 외형이나 목소리와 같은 인물정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뿐, 행위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쉼터>로 들어왔을 때는 모든 기억이 다시 살아납니다.]
대충 정리하면 이런 뜻인 것 같다.
특정 영혼을 선택해서 존재감을 낮춰버리면 꿈속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면 그 영혼에 대한 기억이 안 난다.
그러면 내가 정체를 숨길 필요 없이 꿈에서 대놓고 진세희 그년을 존나 괴롭혀도 결국 현실에서는 자신을 괴롭힌 사람의 얼굴이나 목소리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네.
와, 씨발... 존나 쌈박한 기능인데?
문제는 업그레이드 비용이다.
[업그레이드 비용은 300,000,000원입니다.]
[업그레이드 하시겠습니까? YES/NO]
하아, 이 씨발! 좆같은 시스템을 봤나.
얼마 전에 아파트 팔린 건 또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뜯어가네.
존나 눈물 나지만 안 할 수가 없는 옵션이다.
예스!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업그레이드 비용으로 사용하신 금액만큼 현실의 잔고에서 차감됩니다.]
이제 되돌릴 수가 없다.
이미 내 통장에서는 3억이라는 돈이 연기처럼 사라졌을 테니까.
이 시스템은 환불이라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왕 업그레이드를 했으니까 정확히 어떤 옵션인지 실험을 해 봐야지
가장 만만한 대상은 역시나 민지와 유서연이다.
내가 만들어준 고급 호텔방에서 영화를 보며 놀고 있는 민지와 유서연을 모두 내 앞으로 소환시켰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두 사람은 나를 발견하고 상황을 이해했다.
“오빠, 시킬 거라도 있어요?”
“과장님, 뭐든 말씀만 하세요.”
“잠시만, 그대로 대기하고 있어봐.”
업그레이드를 하기 전에 대충 글로써 설명을 듣긴 했지만 막상 매뉴를 실행시켜보니 옵션이 다양했다.
일단 가장 기본 적으로 내 존재감을 직접 조절해서 모든 영혼들에게 전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타인의 영혼에 내 영혼의 존재감 수치를 각인 시킬 수 있다.
즉, 개별 조절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나는 개별 조절기능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대충 서연이에게는 존재감 수치를 50으로 해두고 민지에게는 30으로 확 낮췄다.
어차피 0으로 해두면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질 테니까 실험에 대한 의미가 없다.
설명대로 내가 존재감을 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