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51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나는 부장님의 자리에 두툼한 보고서 한 장을 올려두었다.
부장님은 나에게 딱히 업무를 지시한 것도 없는데 내가 뭔가를 제출하고 있으니 잠시 당황했는지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한껏 어깨가 올라가며 부장님께 말했다.
“이번에 제가 거래처를 하나 따왔습니다.”
“누가?”
“제가 말입니다.”
“강 과장이?”
“네, 제가 직접 발굴한 신규 거래처입니다.”
“이런 미친...아니 자네가 미쳤다는 건 아니고, 이 상황이 그렇다는 말이야.”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박 부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고는 나를 한번 쓱 노려보는데, 만약 장난으로 쓴 보고서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런 눈빛이다.
나는 그런 박 부장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얼른 보고서부터 읽어보라는 손짓을 했다.
“후우, 신규 거래처 발굴은 둘째 치고, 보고서 못 쓰는 건 여전하구만. 최소한 상사에게 보고서를 제출할 때, 오타 정도는 체크해야지.”
“아, 너무 들떠서 빠르게 작성하다보니...죄송합니다.”
“됐다, 이게 한두번 있는 일도 아닌데, 강 과장이 직접 신규 거래처를 발굴해서 스스로 쓴 보고서라고 해서 기대한 내 잘못이지.”
한껏 올라갔던 내 어깨가 아주 살짝 내려왔다.
씨발, 앞으로 보고서는 절대 내가 직접 안 쓴다.
그냥 내용 알려주고 서연이한테 시켜야겠다.
“음, 정말로 연성종합병원의 가구 전 품목에 대해서 거래 하는 게 가능한가?”
“구체적인 가격이나 옵션에 대한 조건은 서로 협의해서 계약이 체결되겠지만, 저희 회사와의 거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법 큰 종합병원인데 어떻게 거래를 텄지?”
“사람마다 비밀무기는 다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나는 슬쩍 고개를 내려서 내 비밀무기를 훑어봤다.
박 부장은 더 이상 과정을 묻지 않기로 하고 상부에 보고서를 올려서 결제를 받기로 했다.
“보고서에 오타가 너무 많으니 내가 다시 수정해서 이사님께 결제를 받도록 하지.”
“아, 부장님,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뭔가?”
“이 건은 제가발굴한 거래처인 만큼 제가 직접 계약을 체결하고 싶습니다.”
“크흠, 병원장의 접대만 담당하는 게 아니라 계약의 전부를 말인가?”
“네, 자신 있습니다.”
“흠, 아무리 자네가 직접 발굴한 업체라고 해도, 만약에 계약에 실패하면 문책이 따라올지도 몰라. 그냥 이 쪽 분야에 익숙한 다른 직원에게 맡기는 게 어떤가? 그렇게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체결만 되면 성과에 대한 기여도 50%는 자네에게 돌아갈 텐데.”
“정말 자신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오, 지금까지 강과장이 이런 자신감을 보인적은 또 처음이네. 좋아, 어디 한 번 열심히해 봐. 내가 이사님께 업체를 발굴한 당사자가 직접 계약까지 하고 싶어 한다고 말씀드릴 테니까.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갖지 말도록. 모든 문책은 내가 감당한다.”
씨발, 이 양반이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존나 멋있는 척을 하고 지랄이야.
그래도 아주 조금은 감동이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아씨, 쪽팔리니까 조용히 대답해...”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이 나와 부장님에게 쏠리자 박 부장은 쪽팔리는지 나에게 얼른 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듯 손을 휙휙 내젖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서연이가 타다주는 커피를 마시며 연성종합병원과의 거래조건과 옵션에 대한 자료를 정리했다.
아무리 목적은 이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거래 규모가 작지 않은 만큼 전혀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딱 한시간 정도 검토를 해보고는 깨달았다.
씨발, 존나 어렵다.
역시 사람은 안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어차피 그 쪽 병원장과는 이유림의 아버지가 친분이 있어서 잘 말해두었을 테니, 대충 알아서 좋은 조건으로 해달라고 해야겠다.
***
연성종합병원 병원장과의 미팅은 대략 1주일 정도 남아있다.
그런데 갑자기 또 기침이 나기 시작해서 덜컥 겁이 났다.
씨발, 또 독감이야?
내가 부장님께 조퇴시켜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부장님이 먼저 내 기침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바로 조퇴명령을 내렸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동네병원을 방문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차피 내가 거래를 하기로 한 업체가 병원이고, 계약과는 별개로 내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탐방도 필요했는데 마침 잘된 것 같다.
나는 핸들을 돌려서 연성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접수처에서 내과를 선택하고 대기를 했다.
그런데 씨발 욕이 저절로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온다.
도대체 대기번호가 몇 번까지인지 내앞에 인간들이 존나 많다.
심지어 복도에 앉아있을 자리도 없다.
아니, 다른 과는 이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왜 내과만 사람이 터져나가는 걸까.
설마, 내가 걸린 독감이 전염성 강한 신종 바이러스인가?
나는 혹시나 신종바이러스가 퍼져서 여기 대기 중인 사람들 전부, 나와 같은 증상으로 방문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오늘 안에는 진료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차분하게차례를 기다리기로 했다.
“강민철 씨, 들어오세요.”
“네,”
나긋나긋한 간호사의 목소리에 나는 기분이 풀어지면서 진료실로 향했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지만 얼굴도 꽤 귀여웠다.
너무 대놓고 쳐다봤는지 간호사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리며 진료실로 안으로 입장했다.
“여기 앉으세요.”
“아, 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갑자기 계속 기침이 나서....”
“그러시군요. 제가 잠시 검사 좀 해 볼게요.”
상당히 젊어 보이는 의사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다행히 독감은 아니고 단순 감기라고 했다.
나는 지금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독감이 아니라는 말에도 그다지 기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왜 밖에 대기자가 존나 많고, 그 대기자들이 다 시커먼 남자들인지 알았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의사 때문이었다.
씨발, 존나 맛있게 생겼잖아?
나이도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데 미모가 상당했다.
내 기준으로 스타일을 말하라면 그냥 ‘존나 맛있어 보인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눈웃음이 매력 포인트인 것 같은데, 뭔가 하얀 의사가운을 입고 있으니 지적으로 보이면서도 귀여움이 느껴진다.
자꾸만 병원 컨셉의 야동과 겹쳐 보이면서 그녀의 얼굴에 내 정액을 발사해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꾹 참고 있는 중이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진료가 끝난 상태였다.
결국 거의 꾀병에 가까운 별거 아닌 감기였고, 3일치 약을 처방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별거 아닌 단순 감기라는 진단을 받고 나니까 기침도 거의 안 나오는 것 같고 머리 어지럼증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감기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1주 일 후에 있을 연성종합병원 병원장과의 미팅에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 보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오늘 방문했던 연성종합병원의 내과 의료진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미모의 여의사.
그리고 진료실에 함께 있던 3명의 간호사 역시도 괜찮았다.
일단, 계약이 이루어 지고나면 내과 의료진들에게 접근해 보기로 했다.
***
1주일 후
나는 연성종합병원의 병원장실에 방문했다.
지금까지 내가 다녀본 거래처 사무실이나 접대실 중에서 이처럼 화려한 곳은 처음이다.
벽에는 사람의 인체해부도 같은 것들이 걸려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하긴, 여기가 무슨 진료실도 아니고 그런 것들이 있을 리가 없지.
병원장실의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유럽풍의 화려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곳곳에 병원장 자신이 받은 상장과 트로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은근히 과시욕이 있는 인물인 것 같다.
실제로 이유림을 통해서 대충 듣긴 했는데, 권력욕이 대단하고 기본적으로 타인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유림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연성종합병원의 병원장 주석진은 이유림의 아버지인 이유명과 아주 친한 사이기도 하고 내가 자신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뭐, 나도 이런 인물의 성향에 대해서는 아주잘 알고 있다.
원래 권력욕이 강한 인물들일수록 자신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거나 자신의 앞날에 도움일 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더 없이 살갑게 구는 존재니까.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병원장 주석진은 존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하, 반갑습니다. 연성종합병원의 병원장, 주석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가구명가에 근무하는 강민철 과장입니다. 여기 명함...”
“가구명가라...처음 들어보는 회사군요.”
“대기업은 아니고 겨우 코스닥에 상장되어 있는 중견기업이라서 그리 유명하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가구야 튼튼하기만 하면 되지, 회사의 브랜드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 보다...이유명 그 친구 집안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하던데....”
“그 분의 딸과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오, 이유명 그 친구의 딸이라면 제가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어릴 때부터 똑똑했는데, 지금은 검사가 되어 나랏일을 하고 있으니 제가 다 뿌듯합니다.”
이 씨발 새끼가 이미 나에 대한 호구조사는 끝낸 상태인 걸 다 알고 있는데, 은근히 모른 척 하면서 내 입으로 직접 말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이 말이다.
생긴 것도 존나 재수 없어서 면상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내가 이유림의 약혼자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 계약에 관한 건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가격대와 옵션을 다 맞춰주었고, 그 외, 자잘한 것들도 모두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을 맺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장의 표정을 보면 마치 자기가 유리한 계약을 한 것처럼 아주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솔직히 이런 가구 계약으로 이득을봐야 얼마나 보겠는가.
지금 병원장 주석진의 머릿속에는 이번 계약을 계기로이유명 집안으로부터 더 큰 이익을 얻어낼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이유명이 주석진에게 이런 부탁을 할 때도 그런 조건이 있었을 것 같다.
이유명의 아버지 이유권은 비록 지금은 은퇴했지만, 5선 국회의원이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이유한의 뒤를 이어서 같은 당에서 활동했는데, 아무튼 지금도 정치계에서 이유권의 입김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연성대학병원의 병원장, 주석진의 입장에서는 겨우 가구계약 하나 던져주고 이유명 집안에 도움을받을 수 있게 된다면 이 보다 남는 장사는 없을 거다.
그건 자기들 끼리 알아서 할 문제고, 덕분에 나는 계약을 유리하게 잘 성사시켰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계약을 이행하기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편한 것들은 다이렉트로 주석진에게 말하면 존나 빠르게 해결해 주겠지.
나는 회사로 돌아와서 바로 부장님께 미팅결과를 보고했다.
당연히 존나 난리가 났다.
보통 가계약 들어가고 슬쩍 간보다가 룸에서 접대 좀 해주고...빨라도 정식 계약까지는 보름 이상 걸릴 거라고 예상했는데, 내가 정식 계약까지 체결해 버렸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씨발, 간만에 나도 어깨에 존나 힘이 들어갔다.
이럴 때,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반응하며 또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부장님, 병원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물건 회수하고 필요한 가구 조사하는 업무에 저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응? 그건 우리 영업팀에서 하는 게 아닌데? 그건 기술팀에서 처리할 업무인거 잘 알잖아.”
박 부장은 살짝 인상을 쓰면서 나에게 말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기술팀은 그래도 고졸이나 전문대졸로 이루어진 현장 기술직들이기에 살짝 불편한 기색을 내비췄다.
그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일에 영업팀 과장이 같이 섞여서 현장 업무를 보고 있으면 다른 부서에서 우습게 볼까봐 그런 것 같다.
“그래도 제가 직접 계약한 업체인데, 가구가 완전히 배치되기까지 완전한 서비스가 이루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직접 같이 짐을 옮기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병원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불편한 사항이 없는지 점검을 해보려는 겁니다.”
“음, 의도는 좋은데...좋아. 절대로 강 과장이 직접 가구를 나르거나 하지는 마. 그리고 내가 연성대학병원 담당 기술팀장에게도 미리 말해두지.”
“네, 부장님. 감사합니다.”
직군이 달라서 비교가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굳이 비교를 하자면 기술팀의 팀장보다 영업팀의 과장인 내가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박 부장이 기술 팀장에게 직접 말해둔다는 의미는 나를 무시하거나 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경고 차원일 것이다.
어차피 나는 이 일에 깊게 관여할 생각은 없다.
오직, 내과에 있는 기존 가구들을 제거하고 우리 회사의 가구들로 재배치 할 때만 내가 관여할 생각이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내과의 의료진들과 친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