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화
퇴근길에 기술팀이 사용하는 사무실을 방문했다.
우리 영업팀을 비롯해서 사무직군이 사용하는 사무실은 본사에 있지만 고객들이 사용하던 기존 가구들을 철거하고 우리 제품으로 다시 배치하는 작업을 하는 기술직들은 별도의 장소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당연히 일선에서 근무하는 직군이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 사무실이 있지만, 어차피 여기는 서울이기에 본사 건물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크게 중요한 용무는 아니고 그냥 잘 부탁한다는 뭐, 그런 인사를 하기 위해서 방문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병원에서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그냥 니들 원래 할 일 하면 된다는 말을 하러 왔다.
그리고 가끔 내가 업무 지시를 내리면 군소리 말고 지원해 달라는 정도?
물론, 내 양손에는 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들려있다.
서울지점 기술팀 사무실이라면 그래도 전국에 있는 다른 지점에 비해서 가장 시설이 좋을 텐데, 그래도 본사 건물에 비하면 허름하기 짝이 없다.
부장님 말로는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기술팀 사무실이 가구제작 공장과 붙어 있어서 더 형편없었다는데 나름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분리되어 처우가 상당히 개선된 편이라고 한다.
기술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각종 도면과 줄자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컴퓨터도 업무를 보는 사람들도 있고, 고객들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직원들도 보인다.
내가 그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자 누군가 싶어서 나를 신기한 듯 힐끔 거린다.
그리고 저쪽에서 팀장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인물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인다.
혼자만 다른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영업팀 강민철 과장입니다.”
“아, 서울지점 기술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정우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내가 미리 전화를 하고 방문하긴 했지만 팀장은 여전히 내가 불편한지 별로 인상이 좋지 않다.
부장님의 언질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를 무시하거나 싸가지 없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좀 어려워하는 것 같다.
나는 자신을 정우철이라고 소개한 팀장에게 음료수와 과일을 건네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조용한데 가서 대화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
“아,제가 정신이 없었네요. 저쪽으로 가시지요.”
팀장은 사방에서 직원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나를 접대실로 안내했다.
접대실이 그리 깨끗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칸막이가 쳐져있고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라서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제가 오늘 방문한 이유는 바로 이겁니다.”
“이게, 뭔가요...?”
“우리 제품을 사용하고 거기에 대한 고객들의 후기를 작성하는 이벤트입니다.”
“네? 이런 이벤트가 있었던가요...?”
“회사에서 급하게 추진한 사항이라서 아직 잘 모르실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정식으로 기획된 이벤트가 아니라서 일단 내과 의료진을 대상으로만 실시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그런데 이런 이벤트 관련은 저희 기술팀과는 상관없지 않나요?”
“흠, 제가 이 이벤트를 책임지고 있는데, 사실 제가 그들이 사용할 가구의 세부적인 기능은 잘 몰라서 도움을 좀 얻고자 이렇게 방문했습니다.”
“아, 세부적인 기능별 평가항목을 제작하려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작성에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침대는 자는 곳이고, 책상과 의자는 앉아서 업무보기 위한 용도인건 당연히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제작과정에서 의도하는 장점들이 있을 것이다.
이 의료용 침대는 팔걸이를 이렇게 각도를 특이하게 설계를 했는데 실제로 사용해보니 유용한지, 오히려 더 불편한지. 뭐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는 거다.
기술팀장이 이런 항목들을 만들어주면 나는 작성자 란에 이름과 함께 주민등록번호도 작성하도록 제작할 생각이다.
당연히 이런 이벤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주민등록번호를 자연스럽게 얻어내기 위한 편법일 뿐.
그래서 더 진짜 같은 서류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괜히 내 마음대로 어설프게 내용을 지어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후기를 작성한 내과 의료진들에게 뿌릴 선물은 어쩔 수 없이 내 사비를 털어서 구매해야한다.
기술팀의 정우철 팀장에게는 이벤트 관련으로 내과만 현장 방문할 거라고 말했다.
다른 과는 신경 쓸 생각 없으니 알아서 편하게 원래 하던 방식대로 업무를 하라고 했다.
뭔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안도하는 것 같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내가 현장에 같이 나간다고 했을 때 왜 이렇게 불편해 했는지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보통 3층 이상의 건물에 침대나 책장 같은 무거운 가구를 옮길 때, 별도의 추가요금을 주고 사다리차를 부르게 되어 있다.
이런 사다리차 관련 업체는 기술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
서류뿐만 아니라 사다리차 업체에 대금을 지불하는 업무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크지는 않지만 작은 비리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뭐, 비리라고하기는 좀 그렇지만 서류상으로는 사다리차를 이용하는 걸로 해서 대금을 받았지만, 층이 그리 높지 않는 경우에 사다리차를 부르지 않고, 직원들이 직접 들어서 나르고 그 대금을 꿀꺽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팀장 혼자서 다 처먹지는 않고 주로 직원들 회식비용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김상우 대리에게 들었는데 그 놈은 도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입수한 걸까.
출처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김상우 대리가말해 준 정보 중에서 지금까지 거짓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팀장의 표정만 봐도 뭔가 있긴 한 것 같으니, 김상우 대리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뭐, 이런 것들은 회사에서 게임하고 놀면서 월급 루팡을 하고 있는 나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부탁한 자료를 직접 작성까지 해주기로 했는데 당연히 모른 척 해줘야지.
***
병원장 주석진과 나의 계약은 병원에 있는 모든 가구들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의자나 이런 작은 가구들은 부서지거나 하면 그 때 그 때 구입을 했지만, 침대나 책상, 책장 같은 큰 가구들은 벌써 5년이 넘은 상태라고 한다.
물론, 더 오래 쓸 수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냥 모두 교체하는 걸로 계약을 맺었다.
오늘은 내과를 시작으로 가구를 교체하는 날이다.
오늘은 야매가 아니고 정식으로 회사에 외출을 허락받고 연성종합병원으로 왔다.
병원 로비에는 내과의 내부공사로 인하여 오후 3시까지만 진료를 한다고 공문이 붙어 있다.
현재 시계를 보니 벌써 4시였다.
나는 서둘러 내과로 향했다.
그런데 내과에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봐도 의료진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우리 회사의 기술팀 직원들이 붙박이장들을 뜯어내느라고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는데,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아마도 새 가구가 배치될 때 들어올 것 같다.
그 때는 가구의 위치나 이런저런 요구사항들을 말해야 하니까.
나도 다시 여유를 되찾고 내과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서 자연스레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환자들이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 4명의 여성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다들 여기 있었네.
바로 내과 의사와 간호사들이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4명의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진료실 내부 공사가 있어서 3시에 진료를 마감했습니다.”
“가구업체 관계자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여기 앉으세요.”
여기는 딱히 직원전용 휴게실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하지만 내과는 입원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3시 이후로 진료를 종료했기에 환자가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조용히 자기들끼리 쉬고 있는데 내가 와서 방해를 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모두 따뜻하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역시나 직종이 다를 뿐, 상하관계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의사는 당연하다는 듯 자리에 앉아있고, 간호사 한명이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뽑아준다.
딱 봐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걸 봐서 막내인 것 같다.
그래봤자 간호사 한명만 의사랑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고 나머지는 20대인 것 같다.
“저는 가구명가 영업팀의 강민철 과장이라고 합니다.”
나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며 명함을 한 장 씩 돌렸다.
일단 내 명함을 받았으니 예의상 한번 스윽 보기는 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내가 누군지 보다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가 더 궁금한 것 같다.
이들의 눈빛을 보면서 나는 가방에서 서류더미를 꺼내어 각자에게 한 장씩 건네주었다.
이 서류는 바로 내가 이들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내기 위해서 거짓으로 만든 가구 사용 후기에 대한 설문지였다.
기술팀장이 꽤나 정성스럽게 제품의 특징들을 적어가면서 만든 거라서 분량이 제법 많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게 뭔가 싶어서 잠시 들여다보더니 하나같이 인상이 구겨진다.
간호사들은 자기들 끼리 시선을 몇 번 마주치다가 이내 의사를 바라봤다.
묵묵히 설문지를 읽어보던 의사가 설문지를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바빠서 이런 걸 작성할 시간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설문지에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것도 처음 보네요.”
“무작위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가 아니고, 신분 확인이 된 전문지식인의 의견을 들어보는 설문지라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계약 내용과는 좀 다르네요.”
“계약 내용이요?”
“주석진 병원장님과 계약을 체결할 때는 설문지 작성까지 성실하게 임해준다고 했었거든요.”
“그, 그런가요? 저희는 듣지 못한 내용이라서...원장님이 그리 말씀하셨다면 작성 해드려야지요.”
“보름 정도 사용해 보시고 후기를 작성해주시면 되는데, 침대의 경우는 환자용이니까 자연스럽게 몇 분에게 물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권위적인 인물인 주석진의 평소 행동은 안 봐도 예상 가능했다.
그의 이름만 잠시 빌렸을 뿐인데도 이렇게 빠르게 태도를 바꾸는 걸 보면 말이다.
의사는 빠르게 간호사들에게도 설문지를 배분했다.
그리고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제는 솔직히 내 용무는 끝났지만 그래도 이들을 따라서 내과로 향했다.
딱 맞게 모든 가구들을 제거하고 이제 새로운 가구를 배치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기술팀장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의사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침대는 주사실에 넣으면 될 것 같은고...나머지는 어디로 배치할까요?”
“전부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배치해 주세요. 이미 익숙해 져 있어서 바뀌면 더 불편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구를 안으로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기술팀장은 은근슬쩍 나를 바라보며 뭔가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아, 여기 2층이구나.
2층이면 그냥 계단을 통해서 옮겨도 그리 힘들지 않는 위치다.
이미 사다리차를 이용한다고 거짓 서류는 만들어뒀을 것 같고.
그래, 알았다. 꺼져줄게.
“저도 볼일은 다 본 것 같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과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여기는 저희 기술팀에서 알아서 할 테니, 얼른 들어가 보십시오.”
기술팀장 정우철은 존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의료진들에게도 인사를 하며 2주 후에 설문지를 받으러 오겠다고 했다.
꼭 빚 받으러 오는 사채업자가 된 느낌이지만 나중에는 친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너무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지 마라.
***
2주 후.
연성종합병원의 내과를 다시 찾은 나는 의료진들로부터 설문지를 회수했다.
그렇게 귀찮아하더니 의외로 성실하게 작성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읽어보지도 않고 이들의 주민등록번호만 옮겨 적고는 종이를 폐기했다.
늦은 새벽 시간.
나는 바로 4명의 내과 의료진을 소환했다.
하지만 동시에 소환하지는 않았다.
한명을 소환하고 5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소환했다.
밀폐된 공간에 한 명씩 소환될 때 마다 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난리가 났다.
특히 3번 째 인물이 소환될 때는 더더욱 비명소리가 크게 들렸다.
바로 그 3번째 소환자는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이번 게임에는 특별히 나도 참여를 할 계획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이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소환 순서를 중간 정도로 정했다.
내가 소환된 것처럼 연출을 마치고, 그 뒤로도 2명에 대한 소환을 끝마쳤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모두 소환되고 나서 나를 제외하고 자기들 끼리 구석에 똘똘 뭉쳐서 지금의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를 힐끔힐끔 바라본다.
내가 누군지는 대충 알지만 그렇다고 친하지는 않은 인물이니, 경계를 하는 것 같다.
더구나 이런 좁은 공간에 내가 유일한 남성이니 자신들에게 무슨짓을 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쨌든, 나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황하며 겁먹은 척 연기를 했다.
잠시 후. 내가 설정해 놓은 대로 허공에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5명이 모두 모였으니 곧 문이 열립니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하면 정상적인 수면상태로 돌아가거나, 꿈속에서 원하는 것들을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꿈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글쎄...어어! 벼, 벽이 움직이고 있어요!”
밀폐된 공간의 한 쪽 벽이 열리며 길이 나타났다.
오직 한 쪽으로만 이동할 수 있는 길이 나타났는데 그 길의 끝에는 걸물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너무 익숙한 건물이다.
“저건, 연성종합병원...”